랑카위에서 사바섬까지 #1
[동남아 일주 요트 여행기]
랑카위에서
사바섬까지 #1
여행을 위해 오랜만에 여권을 열어보니 2020년 필리핀 세일링 이후의 출입국 도장이 보이지 않는다. 3년만의 해외 요트 트립인데 마음은 해외여행 특유의 설레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 유럽에서 50피트 배를 사서 이송 중인, 홀로 인도양을 건너며 여러 어려움을 겪었을 김선장을 위한 정신적, 물질적 응원의 목적이 첫 번째. 아직 장거리 해외 요트 트립 경험이 없는 요트 클럽의 안선장, 조선장에게 장거리 요트 트립의 경험을 주는 것이 두 번째. 개인적으로 적도 근방의 낮은 위도권의 뜨거운 바다에서 세일링 경험을 갖는 것이 세 번째 이번 트립의 이유 정도 될 것 같다. 안선장, 조선장 모두 연구원이자 회사원으로 시간을 쪼개 쓰며 바쁜 일상을 지내고 있는 한국인들이라 20일 가까운 시간 동안 짬을 내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지난 몇 년간 여러 요트 모험들로 손발을 함께 맞추고 있는‘찐’크루들이라 함께 하는 여정이 기대된다.
20kg을 넘지 않게 가방에 꾹꾹!!
쿠알라룸푸르 비행기 출국 이틀 전. 짐을 준비하는데 우리가 비행기에 가져갈 수 있는 물품은 인당 20킬로, 세 명이 60킬로가 제한이다. 이고 지고 가는 것은 제한이 별로 없어 보인다. 뭐가 필요하냐, 뭘 가져갈까 물어보니 김선장은 한국 물티슈가 좋단다. 그 외에도 롱노즈, 붐마스트 볼트, 검정 테잎, 소포장 쨈 등 여러 물품들을 주문한다. 유럽 현지에서 배를 구입 후 곧바로 배를 끌고 오는 여정이라 필요한 물건을 구하기도 만만찮고 준비가 많이 부족한 상황에서 출발했다. 한국의 품질 좋은 물티슈, 볼트 하나가 아쉬운 상황이다. 빠져버린 붐마스트 볼트 사이즈가 흔치 않은 물건이라 구로 공구 상가에 안선장과 두 번을 가서 겨우 비슷한 물품을 구했다. 김포에 있는 마트에서 김치, 라면, 누룽지, 참치, 캔으로 된 밑반찬을 담는다. 40만원 가까운 식품, 약품 등을 가방에 실어보니 무게가 오버된다. 에어아시아 항공이 무게를 넘기면 오버 차징 한다는 소문이 ‘흉흉해’어떻게든 무게를 줄여보려 패킹을 두 번 세 번 다시 했다. 간이 저울로 가방 한 개 당 20킬로 근방을 겨우 맞춰 물티슈 한 박스와 식품들 대부분을 가방에 패킹했다. 김치찌개 끓여먹으려 구매한 꽁치 세 캔과 비스켓은 결국 못 넣었다.
3년 만의 세일링의 설레임
구로에서 김포 마리나로 향하는 길, 오랜만에 대도시의 교통 정체 속에서 안선장은 노곤한 잠에 빠졌고 혼자 음악을 듣는데 방화대교 위의 하늘이 여름 특유의 낮과 밤이 뒤섞인 하늘이다. 이 여행의 후엔 또 무엇이 달라져 있을까? 살짝 설레는 걸 보니 여행은 여행인 듯하다. 이 요트 트립을 생각할 때부터 이미 마음의 스위치는 일상에서 벗어나 절반은 여행으로 맞춰져 있었다. 여행은 떠날 때가 아니라 준비할 때부터 시작된다. 코로나 이전엔 1년에 한 두 번씩은 나가던 해외를 3년 만에 처음 나가는 설렘이 있다. 배에 돌아와 옷 짐을 정리하며 최종적으로 가방에서 몇 가지 옷들을 빼 공간을 만들고 누룽지 5킬로를 쑤셔 넣는다. 오랜만의 큰 바다 세일링에 파도가 들이쳐 멀미가 올라오면 토하지 않고 유일하게 위 속에 흡수되어 피를 돌게 할 음식이라 8킬로 가까이 사뒀다. 짐을 정리하고 나니 갑자기 머리가 무거워지고 몸이 잘 안 움직인다. 어제부터 목포에서 올라와 쉬지 못하고 무리한 일정들을 소화한 피로감이다. 잠깐 눈을 감고 배에서 쉬다가 모아나호에서 스노클 장비, 우비 등 필요한 남은 몇 개 물품을 정리하니 조선장이 합류했다. 폭우 때문에 모기가 별로 없었지만 전자 모기향 두 개를 펴고 엘사호에서 샤워를 하고 1시쯤 잠에 들었다. 비행기 시간이 7시 반이라 3시 40분에 일어나 빵으로 허기를 달래고 택시를 부르니 전기차가 왔다. 큰 가방이 셋에, 매고 가는 가방이 넷에 장정 셋이니 꽤 많은 짐임에도 전기차 한 대 트렁크에 큰 가방 셋과 두 개 가방이 모두 실린다. 문명의 힘이 새삼 느껴지는 순간. 고집스럽게 추진해 전기차의 새 세상이 빨리 오게 당겨 준 일론 머스크가 고맙게 느껴졌다.
보고, 듣고, 느끼고 씹고, 토하고 맛보는 장거리 요트 항해의 시작을 알리다
공항에 가니 이른 시간에도 밖으로 나가는 인파가 대단하다. 코로나가 종결된 것이 인파 속에서 느껴진다. 짐 무게가 약간 오버되는 일들과 제네시스호 요트 물탱크를 소독할 하이크론(하얀 알약 청수 소독제)의 염소 냄새가 좀 강해서 여기 저기 검색을 당할 때 까탈스럽게 보지는 않을지 염려 되었던 생각들이 거대한 인파와 정신없는 짐 검사 속에 다 묻혀 버린다.
신혼의 젊은 조선장은 면세점으로 아내님 빗을 찾으러 먼저 달려 나가고, 안선장과 환전소의 긴 줄을 기다려 현지에서 쓸 링깃을 조금 샀다. 비행기 안에서는 지난 이틀의 피곤들로 4시간을 그대로 푹 뻗어 잤다. 쿠알라룸푸르까지 운항 시간은 총 6시간 반. 글을 쓰고 있는 곳은 공항의 커피빈이다. 한국 브랜드라 그런지 한국 스타일대로 전기 충전기가 있어 좋다. 점심으로 씬 하와이안 피자, 샐러드, 알리오 오일 파스타, 아이스 커피를 주문하니 한국 돈으로 3.5만 남짓. 그제 목포-서울 올라오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사이다 한 잔, 토스트 하나, 소떡 하나에 1.2만을 지불했던 것을 생각하면, 현재 한국 물가와 견줄 세계 물가가 몇 곳이나 될까 궁금해졌다.
에어아시아를 타는 말레이시아인들을 보니 화교로 추정되는 사람들과 아랍 쪽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베트남인이라 해도 무방한 사람들과 검은 피부의 인도 계열 사람들이 뒤섞여 있다. 인류는 황·백·흑인의 구분이 아닌 무지개처럼 다양한 피부와 머릿결의 아름다움들로 반짝이고 있음을 다시 떠올렸다. 여성들이 히잡을 쓴 것을 보니 60% 인구가 무슬림이라는 이야기가 또 실감된다. 종교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국가라 9%가 기독교인, 불교인들도 꽤 있다는데, 공항의 기도실과 조용한 성품의 사람들을 보니 전반적으로 무슬림 국가처럼 느껴진다.
카페의 한국인들은 핸드폰을 만지거나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고, 백인들은 카드놀이를 하며 가족들과 수다를 즐긴다. 말라카 해협의 섬 근방을 떠돌 때 Esim이 잘 터지는지 Usim이 좋은지 검색하며 랑카위의 섬으로 갈 로컬 비행기를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기다리며 여정을 기록한다. 밤에 김선장을 만나면 꽉 한 번 안아줘야지, 그간 혼자 고생하며 삐쩍 마른 걸 생각하면 눈물 날 것 같다. 3천 킬로가 조금 넘는, 해적 이슈가 남아 있는 동남아 일주 여정이 시작되었다. 비행기 속에서 판소리를 배우고 있는 딸아이의 영상을 찾아 듣는데 벌써 딸이 보고 싶다. 일주일 전에는 양을산에 올라 아열대와 온대 기후가 뒤섞여 있는 다양한 수종의 숲 속에서 텐트를 쳐 놓고 딸아이의 흥보가를 듣고 있었는데, 지금 공항의 카페에선 백인, 동양인, 현지인들 등 다국적 사람들이 최소 4~5개의 언어로 이야기를 하는 바벨론의 생경한 풍경이다. 나와 내 육체, 내 인식은 그대로인데 주변 풍경들이 달라져 버렸다. 보고, 듣고, 느끼고 씹고, 토하고 맛보는 장거리 요트 항해가 시작된 거다.
세일링서울요트클럽, 모아나호 선장 임대균
keaton70@naver.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66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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