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호(163호)

서양에서도 매우 특이한 부부의 자화상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4. 2. 3. 17:16

[서양을 깊이 하는 하나의 방식 : 자화상탐구 1]

 

서양에서도 매우 특이한 부부의 자화상 
[Israhel van Meckenem과 Ida](1480s~1490s)
[인동초 정자에서의 Rubens와 Isabella Brandt](c.1609)  

 

 

 |서양의 풍성한 자화상에 비해 왜 동양의 자화상은 거의 없는가?
 매달 거금 2만원을 지불하기로 작정하고 쓰기 시작한 GPT-4에게 위와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다음과 같은, 요약적이지만 제법 똘똘한, 그러나 누구나 다 알고 있어서 하나마나한 피상적 대답이 즉각 되돌아왔습니다 : 
“먼저, 서양에서는 개인주의,휴머니즘,자아성찰과 같은 경향으로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그러나 동양은 다음과 같다: 1) 개인성 대신 집단성 강조, 2) 자아(self)를 환상으로 여기는 종교적(힌두교,불교,도교),철학적 경향, 3) 인간과 자연의 일체성으로 개인에 주목하지 않는 문화, 4) 붓을 사용한 회화에 집중함, 5) 예술가의 자유가 적었던 사회적 상황.”

 예술비평도 일종의 지적 영역이므로 요즈음 가장 문제가 되는 생성(Generative)AI와 어떻게 관계해야 할지를 시험하려고 OpenAI가 개발한 GPT-4를 일종의 3차 자료로써 오른쪽 화면에 띄워놓고 질문,대답들을 이어갔습니다. 물론 기존 인터넷의 정보출력(Google과 Wikipedia 등)도 왼쪽 화면에 올려놓고 2차 자료로써 대조해나갔으며, 가장 중요하게 예술비평에 대한 근원적인 연구서들을 1차 자료로 삼아 중간 화면에 놓고 작업해 보았습니다. 가장 답답했던 것은 1) GPT-4는 내놓았던 답변의 근거를 제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2) 그 대답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으며, 3) 또 과감하거나 독창적 제시는 없이 적당하게 얼버무리고 일반적이고 평이한‘하나마나한’말들을 늘어놓아, 4) 조사하는 데 시간만 소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해서, 5) 당연히 품어야 할 의심을 가지며 조사한다는 자체가 부담되었습니다. 만든 당사자들은 박사학위 논문을 쓸 수 있는 정도라고 자랑하나, 일단 이번 자화상 탐구에서는 고등학교 학력 정도인 것 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근본적 신념,해석과 같은 까다롭고 다양한 답변들이 가능한 질문은 하지 않고, 직답이 가능한 자료(화가이름,년도,역사,작품명 등)는 바로 알려주므로 이런 단순한 것들부터 조심스럽게 사용하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조급성을 버리고 장차 범용(General)생성(Generative)AI가 서서히 개발되는 것을 - 물론 이것이라도 늘 조심하고 합리적 의심의 눈초리로 쏘아보아야 하겠지만 - 기다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서양문화(명)를 깊이 알아가는 우리가 가진 숙제를 푸는 방식의 하나로, 이번 호부터 서양문화(명)가 다양하게 파생해나간 영역 중의 하나인 시각예술과, 그 중에서도 아주 서양적인 특징을 가진 서양의 자화상들에 몰입해 보려고 합니다. 이 때에 반드시 해야 할 하나의 가장 중요한 첫째 질문은 동양에 비해서 서양은 왜 그렇게 자화상이 많은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즉각 더 깊고 넓은 차원으로 이어지는 서양인과 동양인은 자기(자아)의식(self-consiousness)에서 어떻게 다른가? 라는 인문학적인 둘째 질문에 도달합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2022년까지의 인터넷자료들을 가지고 넙죽넙죽 답을 그럴싸하게 제시하는 GPT-4처럼 할 수는 없으며, 앞으로 계속 서양의 자화상들에 대한 역사적 탐구를 거북이걸음으로 계속해 나가면서, 21세기의 작품들에 가서야 찾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떨까요!

 |자화상에 담긴 인문학적 기본질문 : 인간은 왜 자기를 그릴까?
 A. 그렇지만 일반적이고 철학적 질문을 우선 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왜 자기를 그릴까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모든 화가는 자신을 그린다’ 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화가가 그림의 어떤 대상을 선택하든 자신의 일부 혹은 전부를 그 속에 투사하며, 거기에 자신을 드러낸다는, 정말 말이 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바로 자기라는 사실은 무언가 특이하고 이상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자기 스스로를 대상화하는 능력은 모든 인간이 가진 것이라서 특별할 것도 없지만, 사실 이 질문은 1)‘철학적’, 2)‘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그리기 전에 자신이 자신을 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철학적으로 소피스트였던 소크라테스는 델피 신전의 슬로건인 첫째 명제너 자신을 알라를 주장으로, 온갖 감언이설로 사회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결론, 판결을 이끌어내는 법을 가르치는 동료 소피스트들과 아테네 시민들을 깨우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사람의 손이 닿을 수 없는 등에서 괴롭히는 귀찮은 벌레인 등애로 자기자리를 매김했습니다. 그런데, 그 질문을 소크라테스 자신에게 했다면, 아마 둘째 명제 나도 나 자신을 모른다로 대답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음 셋째 명제가 사실 더 중요합니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까? 소크라테스가 이것까지는 답하지 않고 죽은 것에 답답했던지 혹은 교만해서인지, 그의 제자(플라톤)와 그 제자의 제자(아리스토텔레스)는 과감무식하게 답변을 제시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즉
 1) 일단 주어진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주로 플라톤),
 2) 이전까지의 그리스의 상반된 두 철학적 전통인, (동쪽의)이오니아 지역의 자연철학적,유물론적 철학과,
 3) (서쪽의 그리스 식민지인) 이태리 지역의 신비적인 파르메니데스와 피타고라스의 철학을, 종합,융합하는 방향으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이데아와 현실세계라는 이원론(플라톤), 그리고 형상과 질료라는 (궁극적으로) 이원론(아리스토텔레스)적 인식론 체계를 형성하였고 그 안에 삼라만상의 시스템을 다 구겨넣었습니다. 하지만 이 둘은 K.Popper의 비판대로 ‘너 자신을 알라’라는 스승의 조언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매우 교만하게도 둘째 명제인‘나도 나 자신을 모른다’라는 스승의 답변도 거부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구나 그 다음의 셋째 명제인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까’라는 스승이 남긴 질문은 영구히 답하지 않은 채, 철학의 비밀동굴에 깊숙이 처박아 놓고 철저히 밀봉하는 위선을 범했습니다. 그러니 중세기 내내와 그 이후에(플라톤), 또 르네상스 이후에 되살려져서(아리스토텔레스), 이 둘을 철저히 따르던 철학자들(특히 독일계)과 예술가들은, 이 연속된 인식론적 질문들 앞에 정직하고 과감하게 선 가운데, 소크라테스가 오래 살았더라면 당연히 했을, 그 다음의, 또 그 다음의 깊은 질문들을 향해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자기라는 자의식으로 단단히 무장한 서양인들이 만든 서양문화(명)가 전 세계를 주도했던 지난 500여년의 비참한 역사입니다. 이렇게 형성해 놓은 서양문화(명)에 살면서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요? 그렇다고 동양문화(명)가 지속되었다면 행복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전혀 쓸데없습니다. 동양문화(명) 또한 그 무능과 한계는, 세계가 하나가 되며 우주시대를 시작하는 지금에서는 더 명백해진 것 같습니다.

 B. 그렇기 때문에 소트라테스의 질문을 이은 셋째 명제에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철학과 예술의 인식론에 있어서 ‘종교적’ 차원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아는, 혹은 나의 잘못된 자기인식을 극복하는 지름길은 바로 나를 만드신, 나를 창조하신 분 앞에 서는 것입니다. 종교학에서는 신 앞에 선 자아(CORAM DEO 중세), 신 앞에 솔직히(Honest to God A.T.Robinson 1963)로 표현되며, 이 종교적 기초를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으로 나갈 때의 첫 관문인 철학적 작업으로 변환한 것이 얼굴(face-to-face)의 철학(I.Levinas)입니다. 유대인을 죽일 때에 마치 벌레나 무생물을 쓰레기통에 집어넣듯이 무자비하게 죽이지만, 독일군 병사가 흘깃 쳐다본 유대인의 얼굴에서 (양심의 가책으로) 움찔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에서 이 철학의 의미를 즉각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저편에 선 인간은 마치 절대타자(The Other)처럼 내가 도무지 인지할 수 없는 저편에 있으므로, 기다림, 관대함, 자비로움이라는 윤리적 태도로 대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윤리학이 인식론에 앞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이후로 인식론이 언제든지 선두였으나, 이제는 이것을 다시 뒤집어야 하니 소크라테스 자체의 한계도 말해진 셈입니다.
 다시 근원에 돌아가서, 이런 철학과 윤리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더 근본적으로 종교적 기초, 즉 (절대)신 앞에 선 자아로 자신을 세우는 작업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진정한 자기를 비롯한 타인에 대한 인식(인식론)이 가능하며, 또한 윤리적 행동(윤리학)도 가능합니다. 그런 ‘신 앞에선 자아’는 즉각 피조물로서의 ‘절대공허’‘절대무’를 자각하여 드디어 ‘절대겸손’가운데 들어갑니다. 그 뿐 아니라 그 분과의 관계를 원천적으로 단절시키고 스스로가 법을 제정하고 행해버리는 무법자임을 자각하여, 드디어 그 분앞에서 ‘절대용서’를 요청하는 자세를 가집니다.‘탐심을 품지 말라는 그 분의 열번째 계명을 듣자마자 탐심을 품을 마음이 즉각 생겨서 남의 아내와 집을 탈취해 볼까 하는 이 타락하고 더럽고 악한 마음’자체를 처리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사도 바울이 되는 겁니다(로마서 7장). 그 분으로부터 놀라운 용서와 변화를 경험한 후에야 비로소 타인을 향한 용서,관용,자비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올릴 자격을 가진다고 예수는 말하고 있습니다(주기도문).  

 C. 그런데 서양의 자화상의 역사는 점차적으로 이것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세상의 배꼽에서 동쪽으로 나간 동양인들은 이런 신을 멀리 떠난 자들이었다면, 서쪽으로 나간 서양인들은 이런 신과 함께 있으면서도 늘 반항하고 도전하며 투쟁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자난 4월호 글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동양인들은 집 밖으로 나간 탕자(둘째 아들)와 같았다면, 서양인들은 집안에 머무는 탕자(첫째 아들)와 같았던 셈입니다. 그런데 서양인들이 이렇게  집안의 탕자가 된 이유는 서양문화(명)의 또 다른 기원인, 연못에 비친 자기를 바라보다가 그 아름다움에 빠져 죽는 그리스의 나르시스 신화에 늘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탐욕,정복,타락,지배,전쟁,죽임,잔인 등의 온갖 병적 현상들이 세기가 지날수록 더 많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모든 심리적,정신적 질병의 근원은 (자기를 괜찮은 사람으로 포장하고 남을 속이고 악하게 이용해먹는) ‘악한 나르시시즘’임을 정신분석자인 스캇 펙(M.Scott Peck)은 그의 저서 거짓의 사람들(People of the Lie: The Hope for Healing Human Evil 1983)에서 밝힙니다. 
 그러므로 서양문화(명)에서의 자기인식(self-consciousness)의 역사는 이 두 기원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과 그것이 지배하는 세계역사가 진행될수록 악한 나르시시즘이 더욱 부정적 극단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자기만이 절대자가 되고, 자기 행동만이 절대적 표준이 되는 반면, 다른 모든 존재들은 상대화,타자화,물질화되기 때문에, 파멸과 혼돈, 죽음과 절망으로 우-러전쟁과 중공의 대만 침략 위협이라는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로 이어집니다. 서양문화(명)의 다른 영역 속에서도 그렇지만, 그 일부인 서양의 자화상의 역사 속에서도 시간이 갈수록 나르시시즘의 강도가 세어지며 극에 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절규](1893)로 유명한 뭉크의 [저승에서의 자화상](1895), 그리고 피카소의 1972년 [자화상], 또 흐느적거리는 그림으로 잘 알려진 살바도르 달리의 [구운 베이컨과 부드러운 자화상](1941) 등은 기괴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에 비하면 한 세기 전의 고흐의 [귀를 자른 후의 자화상](1888)은 아주 젊잖은 편입니다. 흔히는 왜 현대에 들어올수록 좋은 모습이 아닌 이런 일그러지고 괴상망칙한 자화상을 그릴까 생각할 것인데, 화가로서 사실 이런 자아를 외면한다면 진실한 화가가 아니라는 정직한 자각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화가 자신들도 시대정신을 따라서 정신분석학적,심리적으로 고장난 가운데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를 빙빙 돌게 만드는 고흐의 많은 작품들에서 그의 예술적 탁월성을 보기는 하지만, 사실상 이것들이 그의 정신병과 관련있다는 슬픈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예술적 탁월성을 위해서 스스로 정신병을 얻지는 않았을 것이니, 그래도 자기만의 독창적인 표현을 멈추지 않았던 그를 존경하지만, 과연 그것만이 자화상을 만드는 지름길이었나 하는 근본적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화가들은 자기 시대에서 시대정신을 호흡하면서 살아갔지만, 시대정신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집어보아서 서양문화(명)에서 전혀 반대방향으로 자화상 그리기를 시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서양 자화상에서 보이는 서양문화(명)의 한계, 그 대안인 공동체적 정체성의 회복 
 그렇다면 시대정신으로서의 서양의 자화상 그리기는 결국 절대적으로‘자기’를 드러내는 철저히 서양적 발상일 뿐인 셈입니다. 물론 자기정체성을 확인한다는 점에서 자화상의 긍정적 역할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균형을 잃고 자기절대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가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뒤집어 생각해서 동양화에서 자화상이 없는 긍정적 이유를 이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자화상이 거의 없는 동양인들은 자기정체성이 적거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당장 내일 아침에 정신과에 가보셔야 할 것입니다. 동양인이 자화상을 많이 만들지 않았던 것은 자기정체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동양인들에게 자기정체성보다 더 중요한 그 무엇, 즉 공동체적 (자기)정체성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동양의 장점인 공동체 안에서의 정체성도 역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 절대신이 없는 인간으로만 이루어진 사회 안에서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주저앉아있는 개인을 근본으로 상정하는 부정적 방향으로 나가기 쉬웠습니다. 수많은 동양의 정치역사가 이렇게 흘러갔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freedom,liberty)와, 거기서 발생하는 개인의 권리와 책임이 없는 전제정(군주정)이나 독재정에 매우 익숙했기 때문에, 중공, 북한의 압제나 일본의 도무지 바뀔 것 같지 않는 전통을 스스로 뒤집는 일이 일어날 수 없는 겁니다. 즉 동양은 동양 나름으로 비뚤어진 방향으로 공동체적 정체성이 전개되었기에, 길고 긴 고통의 역사를 지냈고, 지금도 바로 위(북한)와 서쪽(중공)에서는 사람들이 신음하고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서양은 정반대로 갈수록 심각하게 왜곡되어간 절대화된 개인정체성으로 삐뚤어진 역사를 만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공동체적 정체성과 함께 개인적 자기정체성을 동시에 건강하게 가질 수 있을까요? 이것을 위한 대답도 역시 (절대)신 앞에 선 인간과 공동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만약 한 개인이 신(들) 앞에 선다면, 그 절대신(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우리는 여럿(셋)인데, 너는 왜 혼자 오느냐?” 레비나스의 절대타자(The Other)의 철학의 한계는 그가 섰던 유대교신학(동시에 이슬람신학)의 한계 때문입니다. 즉 유대교신학이나 이슬람신학은 신을 ‘숫자적 하나’(one)로만 규정하는데, 이는 그들이 근거했던 구약성경 신명기 6:4을 잘못 해석한 결과입니다. 거기서 ‘하나’ (에하드echad)는 숫자상의 한 분(singleness)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언약관계를 맺은 유일한(uniqueness) 분이라는 의미입니다(Yahweh elocheka‘야훼는 너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 분은 너와 언약을 맺은 유일한 분이시다’). 더 나가서 구약성경 창세기 1:26~28에도 신은 자신을 공동체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을 공동체적 존재로서 대표적인 표현인 남자와 여자로 창조했다고 표현하였습니다.‘(공동체인) 우리(신들)가 우리의 형상과 모양(공동체적 존재)대로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공동체적 인간)로 만들자’그리고 공동체적 존재가 힘을 합쳐서 세상과 우주를 섬세한 정원사처럼 다스릴 사명을 주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절대교신학인 유대교신학과 이슬람신학은 단수성을 가진 하나님을 확정해버렸기 때문에 수많은 치명적 논리적,실천적 문제가 즉각 발생합니다.‘논리적’으로만 보아도, 인간은 공동체로 사는 것이 맞다는 것을 그들도 인정하지만, 그러면 단수적 존재인 신이 어떻게 인간이 복수적 존재로서의 공동체를 이룰 것인가를 전혀 모를 뿐 아니라 본을 보일 수가 없다는 한계를 지닙니다. 즉 신 자신이 이루지 못한 공동체성을 어떻게 인간에게 가르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따라서 유대교신학과 이슬람신학이 독선적으로 흐르기 매우 쉬운 겁니다. 그러기에
 1) 동양문화(명)의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기 쉬운 공동체적 정체성과
 2) 서양문화(명)의 개인의 자아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강조라는 두 왜곡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공동체적 정체성으로 인간공동체를 창조하신 그 분에게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럴 때에 동양인으로서 자화상이 거의 없었던 것에 주눅 들 필요가 없으며, 서양인으로서 자화상이 많았던 점에서 헛된 교만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예가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1871~1958)의 [부상당한광대](Le Clowen Blesse 1914)입니다. 비록 이 작품은 자화상은 아니지만, 부상당한 중간 광대(예수)를, 앞에서 큰 형님 같은 광대(성부)가 메고, 뒤에서 막내광대(성령)는 근심어린 눈으로 졸졸 따라가고 있습니다. 삼위로 일체를 이루신 이분들이 모두 역사에 참여하여 같이 신음하시고 고통받으시는 모습을 탁월하게 묘사했습니다.
서양은 개인(자유와 책임)에서 시작하지만, 동양은 공동체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이제 상식입니다. 시작점에서는 동양이 옳은 것 같지만, 그 이후 개인적 자유와 책임은 분명히 따라왔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서양은 첫 단추는 엉뚱한 곳에 집어넣어 혼돈되었지만,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제대로 강조함으로 옷 자체는 단단히 고정된 셈입니다. 동양은 옷은 걸치고 있지만 서로 여미어지지 않아서 펄럭거리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이런 동서양의 가능성과 한계를 넘어서는 선명한 사례를 공동체(적) 하나님이 인간에게 남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적 하나님을 본받은 공동체적 인간, 이어서 개인적 자기정체성을 확립하는 방향으로 시각예술이 승화할 기회가 생긴 것은, 지구가 점점 좁아져 동서양이 하나가 되어가는 21세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엄청난 축복인 셈입니다.           

 |서양의 자화상 탐구하는 방법
 먼저 우리가 서양의 자화상들을 여러 가지 관점에서 다룰 수 있지만, 이 탐구는 미술계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이 어떻게 서양문화(명)를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하는 관점을 가지므로 조금 더 폭넓고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려고 합니다. 1) 자화상에 연관된 화가의 전반의 역사(가족사, 영향을 주고받았던 예술가들…)를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2) 이어서 이들이 이 자화상을 그릴 때의 정신(분석학)적,심리적 상태가 어떤 것이며, 거기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3) 나아가 개별 화가가 그런 그림을 그리려고 했으며 그릴 수밖에 없었던, 사회역사적 환경을 자화상에서 유추하려고 합니다. 4) 마지막으로 더 근본적으로 이 자화상을 그릴 때에 르네상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살았던 정신적,철학적,종교적 역사와 변화를 같이 살피려고 합니다.

 |드물지만 존재했던 서양의 부부의 자화상들
 서양의 자화상들 중에서도 아주 특이한 점이 하나 있는데, 서양에서 부부의 자화상이 드물지만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중에 하나는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20세기에서 탁월한 남미화가였던 프리다 칼로Frida Kahlo가 자신과 난봉꾼인 자기 남편Diego을 함께 묘사한, 애처로운 감정으로 눈물을 쏟게 만드는 자화상인 [Frida and Diego Rivera](1931)입니다. 남편 Diego를 미술계에서 우뚝 선 거장으로 인정하여 위대한 거목처럼, 정반대로 작은 체구를 가진 자신은 거기에 착 달라붙은 매미처럼 대조적으로 묘사합니다. 남편은 사랑스런 아내가 아닌 다른 곳으로 시선을 약간 기울이며, 손에는 화구를 잡고서 자신이 화가라는 사실을 기사처럼 크게 공포합니다. 그렇지만 아내의 오른손은 남편의 왼손을 위에서 능동적으로 잡는 형태로 올려놓고 있으며 (제목에서 자신을 남편보다 먼저 놓았습니다!), 왼손으로는 여성적인 붉은 색 숄을 부여잡고선, 고개는 남편 쪽으로 기울이는 전형적인 여성적 포즈만을 내보입니다. 하지만 이로서 탁월한 화가로서의 모습을 완전히 지워버렸는데, 매우 주관적인 페미니스트들이라면 눈살을 찌뿌리고 분통을 터트리며 직관하기를 거부했을 이 그림에 대한, 좀 더 객관적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적 의미를 다음에 자세히 다루어봅시다. 
그렇지만 이보다 400~500여년 전에, 이번에는 남편들이 자신을 아내와 함께, 묘사한 자화상 두 점이 있습니다 : [Israhel van Meckenem과 Ida](1480s~1490s), [인동초 정자에서의 Rubens와 Isabella Brandt](c.1609)  

Israhel van Meckenem의‘부인 이다와 함께 한 자화상’


 |[Israhel van Meckenem과 Ida](1480s~1490s)
 Israhel van Meckenem(c.1445~1503)은 그의 이름에서 von(독일)이 아닌 van(화란)이 들어간 것으로 보아서, 그의 네덜란드적 기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그의 고향이자 최종 활동무대인 보홀트Boholt는 현재 두 나라의 접경지입니다. 이런 지리적 특징은 그의 작품 세계가 당시 세상의 중심인 베네치아를 비롯한 남유럽이 가진 로마교적이며 세속과 종교가 뒤엉킨 정신세계와는 차별되는, 북유럽의 강인하고 소박하며 위선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보여줍니다. 가까운 화란쪽 도시들인 즈볼레Zwolle나 깜뻔Kampen은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a Kempis ‘깜뻔의 토마스’1380~1471)가 활동했으며, 소위‘현대적 경건’(Moderna Devotio)을 표방하며, 소박하고 개혁적 공동체로 살았던 ‘공동형제단’(Common Brothers)이 있었던 곳입니다. 즉 은총-자연의 이원론 혹은 위선에 치우친 로마교에 비해서, 교리와 생활의 일치를 어떻게 하든지 추구하였고 결국 그의 사후 14년(1517)이 채 안되어 일어난 종교개혁의 진원지가 되었던 북유럽의 정신세계 속에서 살고 활동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작품 중에 아주 예외적으로 특이한 것들이 눈에 확 뜨이는데 [사냥꾼을 굽는 토끼](Hares Roasting the Hunter)가 있습니다. 매우 역설적으로 토끼들이 사냥꾼을 통구이하고 있으며, 동시에 사냥개들도 통에 집어넣는 장면이 길죽하게 옆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사냥꾼과 사냥감이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을 냉소적으로 표현한 것이겠지요. 또 특이하게도 세례요한이 목베이는 것을 묘사한 작품이 두 개 있습니다. 그런데 두 작품 모두 목 베이는 장면은 화려한 만찬이 진행되는 주무대가 아닌 부무대에서 진행되는 것으로 묘사하여, 역사적으로는 아주 중요한 그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정작 당대의 피상적인 사람들의 관심은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만찬에 있었음을 냉소적으로 묘사한 겁니다. 또 종교화로 [(가롯)유다의 키스](hand-colored)도 배신에 초점을 정밀하게 맞춘 아주 역설적 작품입니다. 
 그런데 그의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남녀가 같이 나오는 것이 제법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여성의 육체를 상세하게 표현하여 성적 환타지를 자극하는 그리스-로마 신화나 종교화를 남긴 남유럽의 경향과는 확연하게 차별되는 것으로, 일상생활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매우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관계의 삶을 드러내는 작품들입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화가 자신과 아내인 Ida를 묘사한 판화입니다. 금세공업자인 아버지를 따라 기술을 연마한 것이 그가 판화제작자로 명성을 떨치게 되는 자연스러운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자화상으로서의 자기와 아내를 표현했던 이유가 무엇일까를 GPT-4에 물으니 역시 ‘하나마나한 말’을 답변으로 내놓았기 때문에, 판화 자체를 자세히 관찰하는 것이 우선적입니다. 자화상 연구에 탁월한 책을 쓴 James Hall은‘지금까지 만들어진 연인의 초상 중 가장 유쾌하고 강력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라고 일반적으로 평가합니다. 먼저 두 사람의 얼굴이 프레임을 넘어설 정도로 꽉 채우고 있습니다. 또 배경의 패턴으로 묘사된 소위 ‘명예의 휘장’Cloth of honor은 그가 살았던 15세기의 관습으로, 성인이나 귀족 같은 매우 중요한 인물을 묘사할 때 배경이 되었던 패턴으로, 자신들을 귀족처럼 묘사하는 겁니다. 부부는 모두 미소를 살짝 띠면서 전면에서 보면 90도 각도로 서로 마주하며 바라보는데, 아주 가까워서 얼굴이 거의 닿을락말락합니다. 그런데 Ida의 얼굴은 둥글넓적하며 하얗고 오동통하며, 남편보다 더 큰 두 눈들에다 그 사이의 거리는 남편보다 넓습니다. 반면에 Israhel은 약간 길쭉하고, 검고 마른 얼굴에 약간 가늘게 뜬 눈을 가졌으며, 크게 묘사된 매부리코는 그가 남자임을 선명하게 내보입니다. 즉 아내의 주장이 센 가정임을 알게 모르게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머리를 감싸는 두건과, 털장식이 들어간 고급진 Ida의 드레스 위로 가슴의 윗부분이 살짝 올라와 있습니다. 판화의 아래에 고딕체로 ‘이스라엘과 그의 부인 이다의 초상’, 그리고 그의 이니셜인 IVM이 아내의 왼쪽 아래에 적혀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작품으로 알려진 600여편의 판화작품 중 본인 스스로 제작한 10~20%의 작품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는 이 판화로 자신이 이룬 사회적 성공(지위,부)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는데, 실제로는 아내의 강한 주장에 눌려 살았을 남편이라고 짐작되지만,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것 같습니다. 그는‘르네상스 판화계의 탐욕스러운 불법복제자’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조만간에 독일에서 크게 문제시되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었던, 면죄부를 비밀스러운 판화로 제작하여 비싸게 판매한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남편은 이웃과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으며, 아내는 공무원에게 욕설하고 조롱하는 부적절한 언행으로 벌금을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인쇄술을 발명한 구텐베르그(1448) 이후로 유행하기 시작한 인쇄업을 독자적으로 운영하면서 남편의 판화를 인쇄하며 팔기도 하며 가세를 같이 불려나갔을 겁니다.
 이 판화는 서양에서 아직 개인적 자기정체성이 심각하게 추구되지 않았던 시대, 종교개혁 직전의 르네상스기에 북유럽에 살았던 부부의 일상적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서양적 의미의 개인 자화상이라고 보기에는 어색합니다. 그렇지만 아내와 같이 있는 자신을 당당하게 묘사함으로, 가족공동체 속에서의 자기정체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이미 말씀드린 공동체적 인간정체성에 더 가까우며, 서양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초현대적 작품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Rubens의‘이사벨라 브란트와 함께 한 자화상’1609~1610


 |[인동초 정자에서의 Rubens와 Isabella Brandt](c.1609)  
 한국인에게는 [고려인 복장의 남자](Man in Korean Costume c.1671)를 그린 사람으로 잘 알려진 Peter Paul Rubens(1577~1640), 그리고 van Meckenem(c.1445~1503) 사이의 130여년이란 시간에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종교개혁(1517)이 일어났습니다. 이 역사적 사실은, 다 같이 부부의 자화상을 묘사한, 다 같은 저지국가(네덜란드) 출신의 두 사람이지만, 그 활동과 작품 경향에도 아주 중요한 차이를 보입니다. van Meckenem이 종교개혁으로 변화될 북유럽 출신으로 강직한 경향을 가졌다면, Rubens는 정반대로 남쪽(현 벨기에)인 안뜨베르뻔Antwerpen에서 주로 활동하며, 로마교적이며 화려하고 부드러우며 세속적인 남유럽(베네치아)적 요소를 강하게 가졌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그와는 정반대로, 개신교 칼빈주의자인 그의 아버지 Jan Rubens는, 침묵으로 네델란드의 종교개혁과 국가 독립의 기초를 놓은‘침묵공’오렌지공 윌리엄 1세 가족의 법률자문자로 활동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로마교의 핍박을 받아 쾰른Koeln과 지겐Siegen으로 도망가 감옥에 있을 때 아들이 태어났지만,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죽자, 엄마는 바로 아들을 데리고 로마교가 지배적인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거기서 그는 로마교식 양육을 받았으며 그 결과로 ‘작품’과 ‘활동’도 로마교적 모습을 철저히 띠고 있습니다.
 ‘작품’에 있어서는 종교개혁 이전의 로마교적 르네상스적 미술의 두 경향인 ‘종교화’와 ‘그리스-로마의 신화’를 그리는 것을 그대로 따라갔습니다. ‘신학적’으로 교황청이 그리스-로마의 신화화를 허용한 것은, 로마교의 이원론을 따라서 하위영역인  ‘자연’에 속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하위영역이 상위영역인 ‘종교’, 로마교적 통치에 복종하기만 한다면, 신화화와 종교화가 공존하는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고 여긴 겁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종교개혁 이후 로마교가 지배하는 남-동유럽 지역에서 일어난 ‘반동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을 격려하는 사조로 일어난, 화려하고 장식적이고 육감적인 바로크-로코코적 경향을 여지없이 보입니다. 또 화가 외에 그에게 매우 중요한 ‘활동’외교관으로서의 삶은 당시에 가장 중요한 사건인, 30년 종교전쟁(1618~1648)이라는 유럽 전체를 비통에 몰아갔던 긴 기간을 통과하는 것이었지만, 결국 그는 전쟁의 끝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런 속에 그리스-로마의 미네르바와 마르스 신화를 이용한 [전쟁과 평화의 알레고리](1629~1630)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로마교나 개신교 양쪽에서 다 인정을 받아서 양쪽(합스부르크가와 영국국왕)에서 기사작위를 수여받는 독특한 위치에 올랐는데, 이는 자신의 근본은 분명히 로마교 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쪽 모두를 위한 공평한 중재를 통한 평화를 목표로 삼았다는 점이 모두에게 인정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중요한 자화상인 [인동초 정자에서의 Rubens와 Isabella Brandt](c.1609)은 ‘다산과 풍요의 자화상’이라는 새로운 미술 장르를 네덜란드에서 발달시켰습니다. 이것은 첫째 아내와 결혼 직전 혹은 직후에 그린 것인데, 아내와의 사별 후에 아내와 친척 중의 한 사람과 재혼하면서 그녀만을 독립적으로 그린 그림인 [웨딩드레스를 입은 Helena Fourment](1630)과 동일한 가치관 위에 서 있습니다: 인간이 가족을 형성하여 행복과 풍요를 누리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세계관 이것은 그가 그린 것으로 보이는 [자신과 두 번째 아내와 자식이 함께 있는 자화상](1639)에서도 볼 수 있는 유사한 감정과 세계관,가치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가 흑백으로 소묘한 것으로 여겨지는 독립적인 [자화상](1620s), 그리고 그를 대표하는 [자화상](1623)으로 소개되는 작품에서, 그의 선명한 눈매와 섬세하고 밝은 얼굴, 잘 다듬어진 수염을 비롯한 멋지게 차려입은 모자와 복장이 즉각 눈에 띕니다. 
 아내와 함께 있는 그의 자화상에서 부부를 둘러싸고 있는 ‘인동초’는 동양이나 서양이나 추운 겨울을 이겨내는 사랑을 상징할 뿐 아니라, 결혼의 기쁨을 상징하는 도상들입니다. 아내는 고향에서 매우 지체 높은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답게, 과도할 정도로 위로 길게 뻗은 화사한 노란색의 모자에서, 화려하고 밝은 비단과 정교한 무늬로 치장된 허리부분의 옷을 거쳐, 길게 풍성하게 내리워진 자주빛 치마에 이르기까지 매우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습니다. 조금 작은듯한 생기가 도는 밝은 얼굴은 사랑받아 행복을 확신하는 미인상을 가졌습니다. Rubens는 다른 그림과는 달리 자신을 정면에서 자신 있게 그리고 느긋한 자세로 그렸습니다. 이태리 유학이 이제 막 끝난 후, 최고의 가문의 딸과 결혼하여 성공의 가도를 달리기 시작하는 청년의 자신감과 여유를 보입니다. 개인 자화상에서 보이는 긴장은 배제되었고, 자기의 모든 것이 되었던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 가운데 상실감으로 자칫 불행하게 될 뻔했던 삶이 결혼으로 정반대인 행복의 길로 가는 것을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종교개혁과 함께 유럽에서 자각되기 시작한 종교적인 개인적 자기정체성의 시대에 루벤스는 자기 정체성에 있어서는 여전히 구시대적 모습을 보입니다. 그가 오랫동안 몸을 담아서 거의 자기화된 로마교적 세계관을 따라서 최고의 화가로 인정을 받았으며, 초혼 뿐 아니라 첫째 아내의 질녀(37년 연하)와의 재혼에서마저 행복을 누리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웠을 겁니다. 자신만의 작업실과 별도의 집을 짓고 또 자신의 가족만을 위한 교회와 가족묘를 조성하여 후손조차 거기에 묻히게 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구시대적이고 평화로울 것 같지만 자연과 은총의 이원론이라는 그 자체의 모순을 내재하는 로마교 지배의 시대가 완전히 끝장나는 역사(1648 베스트파리아조약)를 경험하기 전에 죽은 것조차도 개인 차원에서는 차라리 행복이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는 반동종교개혁의 편에 극단적으로 서서 개신교를 핍박하는 쪽으로는 달려가지 않았으며, 가끔은 [양초 앞의 노파와 소년](c.1617/17)이라는 매우 실제적 그림도 그릴 줄 알았습니다.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segensong@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63>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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