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호(163호)

버려진 것들의 외침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4. 2. 17. 17:18

버려진 것들의 외침

 

“장소가 어디라고요?”
“장소가 어디라고요?”, “서대문 양지 커피숍입니다.”라는 말에 조금 의아했다. 이제까지는 무대에서 여러 명의 무용수들이 공연 하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 요즘은 주제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하는 예술 분야가 많으니 어떤 장소든 무대가 되겠거니 했지만, 그래도 현대무용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름도 약간은 촌스럽게 여겨지는 ‘양지 커피숍(?)’이라는 말에는 조금 의구심이 가기는 했다. 아무리 넓은 커피숍이라고 해도 무용을 할 만한 무대를 만들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일단은 내가 이제까지 보아오면서 느꼈던 선입견은 다 버려야겠다는 마음만 가지고 가기로 했다. 
초행길이라 헤매며 겨우 간판을 발견했는데, 옛날에 다방커피가 나왔던 그런 느낌이었다. 멋있고 세련된 간판일거라 생각했던 터라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실내는 인테리어를 새로 해서 조금 다르겠지!’라는 기대를 또 하고 말았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들어가는 입구부터가 낡을 대로 낡은 지하로 들어가도록 안내를 했다.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가다 보니 바닥, 벽은 물론 무대로 쓰일 공간도 마찬가지로 오래전에 사용한 그대로였다. ‘어, 이런 곳에서도 현대무용을 할 수가 있구나!’그야말로〈버려진 것들의 외침〉이라는 타이틀과 꼭 어울리는 분위기이기는 했지만, 이제까지 번듯한 무대에서 보던 그런 무용은 아니라는 게 확실했다. 

 



‘버려진 것들의 외침’, ‘재활용의 외침’
〈버려진 것들의 외침〉의 기획의도가 ‘이미 소비되어진 것들을 새활용(Upcycling)하기 위한 연구’라고는 했지만, 분위기부터 특별해서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소품들도 하나하나가 다 버려진 것들, 이미 사용해 와서 손때가 묻은 것들이었다. 새로운 것들을 좋아하는 요즘 시대에 이미 오래전에 버려져야 했을 것들이었다. 어디 민속품 시장에라도 가서 겨우 구해 왔을 법한 소품들이라 눈길이 갔다. 그런데 알고 보니 양지 커피숍에서 사용해 왔던 것을 그대로 작품에 녹여내었다는 이야기를 공연이 끝난 후 안무가에게 들을 수 있었다. 양지 커피숍이 이렇게 남아서 예술가들의 무대로 사용되었다니 그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새롭고, 화려한 것들이 좋은 것이라 여겨지는 풍조 속에서 얼마나 많은 갈등을 이기고 남겨졌을까? 오래전의 모습을 지키면서 꿋꿋이 지내온 외침이 고단해 보이기는 했다. 그런데 이렇게 버려지고, 남의 눈에 뜨이지 않는 곳을 예술가의 안목으로 찾아내어 무대로 사용한다는 사실에 이미 예술가다움이 느껴졌다. 
  
5명의 무용수들이 시작 전부터 커다란 종이 박스에다가 무엇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때로는 멈추어서 무언가 생각에 젖어 있기도 했다. 그렇게 공연은 시작 시간 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정해진 시간이 되자 조명들이 하나씩 켜졌다. 그것도 그야말로 오래전부터 써오던 조명이었다. 무용수들은 커다란 칠판에 아까처럼 또 다시 글도 그림도 한가득 쓰더니 나중에는 다 지우기도 하고 또 쓰기도 했다. 그러더니 널브러져 있던 커다란 종이박스는 중앙에 나란히 모으고, 플라스틱 박스와 오래된 TV 등 각종 소품들을 한쪽 벽면에 가지런히 정리를 했다. 널브러져 있을 때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어 보였던 것들이 차례로 잘 정리를 해 놓으니 언젠가는 또 쓰여 질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는 물건들로 바뀌어 보였다. 그렇게 정리를 한 뒤에 무용수들은 제각각, 때로는 함께 조화를 이루면서 격렬한 몸짓의 동작을 시작했다. 똑같은 어떤 형식을 띄는 몸짓이 아니라 즉흥에서 스스로가 상대방에게 맞추는 몸짓들이었다. 그러고는 벽면에 정리해 두었던 소품들을 다시 꺼내어 무대 중앙에서 쌓아올리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면서 격렬한 몸짓을 이어갔다. 

‘그래, 내가 지금 어디에 서있고 무엇을 버리고 어떤 것들을 잊어가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지?’
맨 앞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내 눈이 무척이나 분주하게 무용수들을 따라다녀야 했다. 한 무용수에게 잠시 집중하다 보면 다른 무용수의 움직임이 느껴져서 또다시 눈을 돌려야 했다. 버려졌을법 했던 소품들이 하나하나 정돈되는가 싶더니 다 흩어져 버리고, 또 탑을 쌓기도 했다. 그리고는 또다시 다 흩어버렸다. 땀을 뻘뻘 흘리는 무용수들의 숨소리도 점점 거세졌다. 마치 나도 무용수가 된 것처럼 따라다니면서 조명을 밝힐 때는 스위치를 ‘탁’ 올리게 되고, 소품들을 이리저리 정리까지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현대무용은 늘 어렵다고 생각했다.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그렇게 격렬하게 움직이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끔 졸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 이렇게 아주 가까이서 현대무용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무용수들과 호흡을 같이 했다. 중간 즈음에 안무가의 나레이션이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시간이 있었다. 기억은 다 할 수 없지만,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물었던 것 같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늘 숙연해지곤 한다. ‘그래,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고, 무엇을 버리고, 어떤 것들을 잊어가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에 잠시 젖었다. 마지막에는 아주 커다란 하얀 비닐이 하나 펼쳐지길래 무슨 일이 일어날까? 했는데, 결국에는 한 무용수에게 입혀진 옷이 되었다. 비닐로 만들어진 웨딩드레스처럼 예쁜 드레스였다. 버려졌던 것들에서 결국에는 아름답게 꽃이 피는듯한 장면이 연출되면서 무대는 끝이 났다. 어떻게 저런 발상을 할 수 있을까 싶어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역시 연출가와 안무가의 안목은 남달랐다. 우리는 이미 소비 되어져 왔던 것들을 흔적 없이 버리는 일에만 늘 급했다. 가끔 문제로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의 구체적인 재활용(Recycling)에 대해서는 발전된 아이디어가 없었다. 그런데 예술 작품을 통해 우리가 사용해 온 물건들, 추억이 서렸던 물건이지만 새로운 것들에 밀려 쉽게 버려졌던 것들을 다시 떠올려 보게 했다. 뿐만 아니라 새 구성, 새 안무, 새 창조로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아울러 우리의 기억들마저도, 잊지 않아야 할 것도, 쉽게 잊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서울 혜화동 유진하우스 김영연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62>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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