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호(163호)

그 누구의 길도 아닌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4. 2. 17. 17:29

그 누구의 길도 아닌

 

갑자기 시간 부자가 되었다. 찌는 듯한 여름도, 칼날 같은 겨울도 아닌 봄, 가을을 포함한 일 년을! 연구년이란 이름으로. 머리 쓰는 일보다 몸 쓰는 일을 낮춰보는 풍토에서 몸 쓰는 일이 보다 더 나 자신과 가까워지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부터 교육과정 안으로 걷기를 끌어오고 싶었다.《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서명숙)에서 저자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제주도 올레길을 만들었고, 그 후로 각 지차체에서 너도나도 길을 내게 된 과정, 그 가운데 내가 살고 있는 의정부의 소풍길도 있다는 것이 나를 산티아고로 거침없이 잡아당겼다. 산티아고를 가보자. 가기 전에 의정부를 샅샅이 걷자. 그런 뒤 학교에서 수업을 소풍처럼 설계하자. 시와 소설이 살아 움직이도록.《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박태원)을 읽고 도시를 직접 걸어보며 패러디해보기처럼. 나의 계획서는 교육청의 여러 관문을 통해 낙점이 되었고 모든 계획의 출발지인 산티아고로 향하게 했다.

 



연수원의 일정에 따라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포르투칼에서 출발하는 여정을 선택했다. 폰테 데 리마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의도하지 않았는데 숱한 문학작품과 영화, 친구, 가족이 길에서 소환되었다. 첫 번째가 쿵푸 팬더였다. 비행기에서 다시 보면서 그토록 찾아 헤맨 비법은 없다는 게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무자경전. 팬더는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산티아고에 가면 내 모습이 발견되리란 기대 반 걱정 반을 하며 출발했다. 두 번째는 황천왕동이다. 배낭 지고 8시간씩 걸으며 도시이동을 하자 임꺽정의 처남이 생각났다.《임꺽정》(홍명희)에서 매력적인 영웅을 꼽으라고 하면 나는 단연 황천왕동이를 으뜸으로 친다. 그의 장기는 달리기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다. 관군이 출동해도 그만 있으면 문제없다. 요즘으로 치면 레이다와 같은 존재다. 임꺽정이 서울 가서 세 명의 처자와 살림을 차리자 누나의 성화에 못 이겨 찾아올 땐 메신저다. 그의 주파 능력은 신화적이다. 순례길을 나서자 오늘따라 황천왕동이가 새삼 존경스럽다.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능력! 우리 안의 고유한 능력이 점점 고갈되고 기계에만 의존하면서 퇴화되는 것은 아닐까? 8시간 걷기를 실행하며 생긴 깨달음이다.


세 번째는 비가 오는 날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다가 생각 난《삼국유사》였다. 대학 때 교수님이《메밀꽃 필 무렵》은 아버지 찾기 모티브가 들어있는데 거기서는 왼손잡이로 찾지만《주몽신화》에서는 조각 난 칼로, 그리고《삼국유사》에서는 점으로 찾는다는 말씀이었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다가 나이 지긋한 분이 자신의 하룻밤 정분을 이야기한다. 그 때 약조대로 다시 찾아갔으면 지금 이렇게 떠돌지 않을 거란 말에 듣고 있던 총각 하나가 “아이고, 아버지! 아버지 엉덩이에 점이 있지요?”하면서 반색하여 아버지를 찾는다는 구수한 이야기는 강의실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교수님도 벌써 80이 넘으셨겠구나. 국문과는 ‘굶는 과’라고 하면서 졸업 후 무엇이 될지 몰라 막막하던 시절이었으나 우린 순수하게 문학이야기를 하면서 꿈에 젖었던 시절이 불현듯 떠올랐다.


네 번째는《이방인》이다.《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의 주인공이 사형장으로 갈 때와 비슷하다.《이방인》(까뮈)의 뫼르소는 삶에 대한 열정이 사그라진 상태다. 그는 도리어 감옥에서 열정을 되찾는다. 사형장으로 내려갈 때 담장 너머로 빵 굽는 냄새가 나자 맹렬하게 살고 싶은 의지를 내비친다. 공권력으로 사회적 살인을 시도하는 장면에 나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지면서 사형제도 폐지론자로 바꿔놓는다. 순례길에서 빨래를 널어놓은 담장을 보았다. 옅은 세제 냄새와 빨래 삶으면 나는 깨끗한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불현듯 집에 가서 빨래가 하고 싶어졌다. 커피 냄새가 나면 커피를 내려 마시고 싶어졌고, 순례는 집으로 이어져 있다.

다섯 번째《아무튼, 게스트하우스》(장성민) 작가 따라하기다. 약사인 작가가 여행 속에서 만난 세상 이야기를 게스트하우스 중심으로 써나간 여행기. 그가 라오스에서 머물 때 여행자들이 오염시킨 강을 청소하자고 하여 그 귀하디귀한 비닐봉지를 각자 꺼내 각종 쓰레기를 주웠던 미담이 실려있다. 순례 중 바나나를 먹었다. 사람들이 껍질을 몇 개 버려놨다. 오렌지껍질, 과자 껍질도. 비닐에 쓰레기를 주워 담았다. 누가 팬티도 버리고 갔다. 차마 주울 수 없어 자그마한 비닐봉지만 채우고 자리를 떴다. 오늘 55유로로 해안가의 독채에서 마음껏 누룽지도 끓여 먹고 고기랑 소주랑 먹을 수 있는 호사는 혹시 한 봉지의 쓰레기 줍기 때문이었을까?


여섯 번째는 보티첼리의《비너스의 탄생》이다. 조개껍데기 속에서 태어난 미의 화신. 야곱의 시신을 보호해주었던 가리비 조개껍데기. 콤포스텔라까지 남은 거리 42.8km! 잘강잘강 조개껍데기가 배낭에 부딪히며 나를 따라온다. 작은 배낭을 맨 사람은 작은 조개껍데기를 큰 배낭 맨 사람은 큰 조개껍데기를 달고 다닌다. 야곱의 시신을 보호했다는 신성한 가리비껍데기. 내 몸을 보호하듯 자신이 여기 있으니 걱정 말라는 듯 잘강잘강 소리를 낸다. 이제 이틀만 걸으면 계획한 순례를 마친다.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과 체력에 맞춰 걷는다. 도보 100km 이상, 자전거는 200km 이상이면 인증서를 받으니 그에 맞추면 된다. 프랑스 길은 890km로 40일 이상 걸린다. 스페인길, 포르투칼길은 이보다 짧다. 우린 160km를 계획했다. 6일간 약 120km를 걸었다. 막바지다. 잘강잘강 조개껍데기가 남은 시간도 부디 수호해주길 바란다.


일곱 번째는《여우난 곬족》(백석)이다. 마지막 발걸음이 잔칫날 아침처럼 흥성스럽다. 친지들이 모두 모인 날 새벽 무이징게국 끓이는 냄새가 난다는 시. 전곡에 사는 고모는 아버지 생신이면 전날부터 오셔서 이것저것 거드셨다. 잡채를 잘 만드셔서 커다란 다라이에 참기름과 간장 냄새가 나는 잡채를 주물주물 뚝딱 만드셨다. 잔칫날 새벽 두런두런 부엌에서 음식 만들며 이것저것 챙기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얼마 만인가? 오늘 저녁에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는 순례객들은 발소리를 내면서 출발할 채비를 한다. 옆방 사람들이 깰까 봐 조심스럽게 움직여도 설렘을 감출 수 없다. 같이 걷던 사람들은 도시에 도착하면 각자에 맞는 숙소를 찾아 들어가고 그들을 모두 품어 준 도시는 다음 날이면 모두 내어준다. 잔칫날이구나. 오늘은. 사람들과 더 친절하게 인사하고 우리의 두 발을 축복하자.

 


여덟 번째는《폐허》(염상섭)다. 공원마다 깨끗한 화장실을 지니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순례길에서 화장실 찾기가 어려워 애를 먹는다. 100년 전 염상섭은 동경 유학생의 신분으로 잠시 조선에 들어왔을 때 화장실이 더러운 것을 보고‘구더기가 끓는 무덤이다’라고 말하면서 조선의 미개함을 내비친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도리어 우리나라가 세계의 우러름을 받고 있다. 잠깐만 해외로 나와보면 금방 안다. 그렇게 되는 데 100년이 걸렸다.
마침내 콤포스텔라에 도착해서 깨닫는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각자의 마음과 통하는 길임을. 돌아가서 우리 아이들에게 의정부 소풍 길을 걸으면서 자기 안의 작품을 꺼내 내게 해야 함을. 그 누구의 길도 아닌 자신들만의 길을 걸어야 함을.
챗 GPT가 화두다. 과정을 생략하는 결과. 마술 같은 일. 자동차를 타고 주마간산하는 여행과 짐을 지고 우직하게 걸으면서 깨닫는 기쁨을 견주어보니 어떤 철학으로 다뤄야 할지가 보인다. 느린 여행이 가리키는 방향이다. 

 

 

의정부 효자고 국어교사 박희정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62>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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