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호(164호)

서양 최초의 자화상 회화전통을 창조한 알브레흐트 뒤러의 자화상 (1)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4. 3. 17. 15:26

[서양문화를 깊이 아는 방식의 하나로서 자화상 탐구 2]

 

서양 최초의 자화상 회화전통을 창조한
알브레흐트 뒤러의 자화상 (1) 

 

 21세기 초, 한반도 한민족은 과거 일본과 중국이 처참하게 실패한 것을 결코 반복하지 않아야 하는 역사적 현재에 서 있습니다. 그들이 실패한 근본 원인은 서양문화(명)를 피상적으로 흡수,평가,판단한 후에 그것을 다 안다고 착각한 데 있습니다. 그 결과 일본은 2차대전을 일으켰고, 또 중공은 대만 침공을 준비하는듯 움직이며 세계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고 비참한 결과로 이끌어 가려하고 있습니다. 한반도 한민족이 이런 실수들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1) 서양문화(명)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부심을 가지는 그것의 본질까지 깊이 들어가서 2) 그들이 왜 그렇게 여기며 과연 그것이 가치가 있는 지를 그 깊이까지 내려가 확실히 아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그들을 제대로 비평하고 극복할 뿐 아니라, 그것을 우리에게 익숙한 동양문화(명)의 한계 및 가능성과 접목하여 21세기에 시작되는 우주시대를 시작할 새로운 우주문화(명)를 창조할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1) 서양문화의 본질과 같은 서양인들의 자기정체성이 어떤 지를 찾는 중에 
 2) 그것이 현저하게 드러난 자화상 문화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자화상이야말로 오랜 시간을 자랑하는 동양문화(명)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서구문화(명)의 중요한 형태이니 동양인으로서는 집중해서 깊이 탐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서양자화상 전통의 창세기를 일군 알브레흐트 뒤러를 먼저 다루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를 다룰 때에도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1) 자화상에 관련된 화가의 전반적 역사, 2) 자화상을 그릴 때의 화가의 정신적,심리적 상태, 3) 그가 자화상을 통해서 말하려고 했던 메시지, 4) 작품의 사회역사적 배경, 5) 작품이 만들어진 종교적,철학적,인문학적 기초 등을 작품과 함께 고려하려고 합니다. 

 알브레흐트 뒤러 [Albrecht Duerer(1471~1528)] 이전의 자화상들
 뒤러 이전에 유럽에서 두 종류의 자화상을 만드는 전통이 있어왔습니다. 첫째는 군집을 이룬 사람들을 묘사하는 중에 화가 자신을 슬쩍 끼워 넣는 방식입니다. 후대인 1695년에 소실되었지만, 벨기에 브뤼셀시 청사에 있었던 R.v.d. Weyden(1399~1464)이 그린 [정의의 장면들](1435~1440)이나, Taddeo di Bartolo의 [성모의 승천과 대관식](1401)과 같은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을 독립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Jan van Eyck(1390~1441)의 [남자의 초상(?) 혹은 터번을 쓴 자화상](1433), Leon Battista Alberti(1404~1472)의 청동메달로 만든 [자화상](c.1435), Lorenzo Ghiberti (1378~1455)의 피렌체 세례당 북쪽 문에 청동도금으로 묘사된 [터번을 쓴 자화상](c.1420), 동일한 세례당 동쪽 문에 청동도금으로 대머리 부자夫子가 묘사된 [아버지 로렌초와 아들 비토리오의 자화상](c.1447~1448)이 있습니다. 특히 유명한 중세 문인인 보카치오가 쓴 [유명한 여성들에 대하여]의 필사본 중, [자화상을 그리는 마르시아](1402)에서는 세 명의 동일인, 즉 자화상을 그리는 여인, 둥근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 여인의 손을 통하여 그림으로 묘사된 자기를 동시에 표현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모두 단편적인 것일 뿐입니다. 반면에 화가들이 평생에 걸쳐서 자신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탐구하면서 스스로를 철저하게 묘사해간 전통을 창조한 것은‘알브레흐트 뒤러’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생동안 80여점의 자화상을 그린 것으로 잘 알려진 렘브란트도 뒤러가 이런 전통을 150여 년 전에 창조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뒤러는 총 13점의 자화상을 그린 것으로 보고되곤 합니다. 그 중에는 현존하지는 않지만 Giorgio Vasari나 Christoph Scheuri와 같은 당대인들이 직접 뒤러의 자화상을 보고 묘사한 작품들도 있고, 또 그 이전의 전통과 같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신을 끼워 넣은 경우를 제외하고 본격적으로 자신에게 집중한 자화상을 여기서 다루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19세기에 독일에서 뒤러의 자화상을 흉내내며 머리를 길게 기르고 뒤러의 생일에 함께 모여 기념했던, Albrecht-Duereisten‘알브레흐트-뒤러주의자들’로 스스로를 불리던 나사렛파 독일 화가들처럼 그를 영웅화하기보다, 그가 당시 유럽의 전 지역과 전 영역에서 강력한 돌풍이었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라는 역동적인 두 역사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천재성과 창조성을 꽃피워갔던가를 있는 그대로, 제대로 파악해 보려고 합니다.   
 
 예술적 분위기 속에 태어나 스스로를 창조적으로 만든 뒤러
 알브레흐트 뒤러Jr.는, 아들에게 동일한 이름을 부여한 어떤 헝가리의 금세공업자가, 2차대전 전범재판소로 유명한 뉘른베르그로 이주한 이후, 거기서 취직한 사업장 주인의 딸인 Barbara Holper와 결혼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1455). 즉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농업이나 공업이 아닌, 예술가로 발전할 수 있는 기능인의 집안들 출신이었던 셈입니다. 그의 동생인 Hans Duerer도 같이 훈련받은 화가였으며, 또 다른 동생인 Endres Duerer도 금세공업자일 뿐 아니라 아예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았습니다. 뒤러의 세례식에서 대부代父였던 Anton Koberger는 뒤러가 태어난 해에 금세공업을 버리고 화가가 되었으며, 또 구텐베르크의 출판술이 발명된 이후 급격하게 호황을 이루던 출판업에 뛰어들어 [42행성경](1450)을 발간했고, 24대의 출판기계를 두어 독일 뿐 아니라 그 외 유럽에 사업장을 열기도 했습니다. 그가 출판한 [Nuernberg Chronicle](1493)의 독일어판과 라틴어판에 모두 무려 1,809개라는 예외적으로 많은 판화들이 실려 있습니다. 


 이런 가족적,사업적 환경 속에서 성장한 뒤러였기에, 그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판화의 대가가 된 것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판화본을 제작한 Michael Wolgemut 작업실은 Nuernberg에서 특히 목판화로 아주 유명하였고, 또 뒤러가 15세(1496)의 방랑하면서 배우던 시기(Wanderjahre ‘도제방랑기’)에 머물며 배우기도 한 곳입니다. 독일의 중남부에 위치한 Nuernberg는 알프스를 넘어서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이태리 특히 베네치아로 가는 최단거리의 길목에 있었고, 독일의 출판물과 이태리의 호화품이 거래되던 떠오르는 국제도시였습니다. 이런 지리역사적 사실은 후에 뒤러가 베네치아에 머물면서 그 곳에서 발원하는 르네상스적 영향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북독일의 정신세계나 후기 고딕적 요소와 융합할 계기를 마련하는 기초로 작용합니다. 아버지는 그가 금세공사로 머물기를 원했지만 그는 스스로의 예술적 기질과 능력이 금세공사라는 기능인의 한계를 뛰어넘는 가치를 가진 것임을 깨닫고 그 길로 걸어나갔습니다. 그는 이태리에 머물고 배우면서 “자신의 고향에서는 일종의 기술자로서 사회에 기생하는 존재처럼 여겨지지만, 예술을 인정하는 여기(이태리)에서는 신사(gentiluomo 예술가)로 대접받는다”(1494)는 불평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음악의 독립적 가치를 당대의 권세가들에게서 인정받지 못해서 고통스러워했던 모차르트와 아주 유사합니다. 


 뒤러는 관습적인 것은 그 무엇도 하지 않았습니다. 쉽게 그릴 수 있는 ‘연필’이나 ‘초크’를 사용하지 않았고, 쉽게 그릴 수 있는 그 어떤 대상도 그리지 않았습니다. 또 베네치아뿐 아니라 독일(알사스), 네덜란드, 스위스(바젤), 벨기에 등지로도 돌아다녔으며, 네덜란드 북부인 제이란트의 해변에 떠내려 오는 고래를 만나려고 한겨울에 6일이나 작은 배로 항해하는 위험을 택하기도 했습니다. 온갖 경이로운 일을 향해서 호기심을 활짝 열어 제켰으며, 50명이 함께 누었던 거대한 침대, 치솟는 혜성, 삼쌍둥이, 54미터에 달하는 거인의 뼈에 대한 기록들도 남겼습니다. 그는 보는 대로 그렸는데, 그가 묘사한 사나운 해마와 그 어금니, 몸을 떠는 그래이하운드, 황소의 재갈, 기이한 자세로 내려앉은 잠자리 등은 동물학적으로 아주 정확했습니다. 또 그는 꿈에 본 얼굴, 열병에 걸리던 날 본 그리스도의 얼굴, 들판을 뒤덮은 홍수 등도 그렸습니다. 이런 그림들은 맥락을 벗어나면 매우 기이하게 보일 수밖에 없지만, 그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네 기사 등을 상상력이 충만한 가운데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던 기초가 되었습니다.   

 

자화상1 [13세에 그린 자화상]

종이에 은필 27.5x19.6cm 1484 빈 알베르틴 미술관


 뒤러의 천재성이 일찍부터 개화되었음을 이 자화상에서 우리는 즉각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의 정밀도와 예술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아직 자화상을 그리는 전통이 거의 전무한 독일에서 아버지 아래에서 금세공 기술을 배우던 13세의 어린 소년이, 그 어떤 모방할 역사적 선배도 없는 가운데 거울을 보며 스스로를 묘사할 생각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울 뿐입니다. 이 그림을 위해 한 개 이상의 거울을 사용한 것이므로, 매우 도전적 작업이었을 겁니다. 이 그림에서 그는 셀카를 찍으면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만을 인스타에 보여주려는 오늘날의 싸구려 문화와는 전혀 다르게, 또 당시 권력가나 재력가들이 원하던 방식대로 결코 자신을‘미화’혹은‘영웅화’하지 않습니다. 그는 훗날 유크리트 기하학의 새 판본을 구입하였으며(“1507년 금화 한 냥을 주고 베네치아에서 이 책을 샀다 알브레흐트 뒤러”), 늦은 나이에 기하학에 대한 자신의 연구를 종합한 책인 [Four Books on Measurement](1522)나 죽는 해에 마무리된 책인 [Four Books on Human Proportion](1528)을 만든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는 이 그림에서 르네상스의 대표적 정신인 ‘과학자로서의 호기심’을 가장 먼저 자신에게 투사한 겁니다.   
 

 뒤러에 집중하여 [Albrecht Duerer: Der Mensch und Sein Werk](1963)를 쓴 Marcel Brion은 이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세히 분석합니다.
 “그의 포동포동한 뺨은 소년스럽지만 창조적 우아함을 지니고 있다. 그의 넓은 눈은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열정으로 가득해서 노획물을 찾는 새의 눈처럼 앞으로 솟아 나와서, 태양을 눈을 깜박거리지 않고서도 쳐다볼 자세다. 그림 자체는 그의 다른 그림 이상으로 ‘특이할 정도로 어눌하다’(oddly clumsy). 우선 한번 그리면 교정이 불가능한 은필로 종이 위에 작업했는데, 은필은 주로 아주 정교한 작업이 요구되는 귀금속을 다룰 때 쓰여진다. 여기서는 눈꺼풀의 곡선과 자신의 얼굴을 치밀하게 강조하는 선을 구성하는데, 그 결과로 드러난 그의 눈길은 마치 환각(hallucination)을 쫓는 듯하다. 그는 아마 어린 시절에 이미 자신의 능력이 가진 깊이와 특성을 놀랄만하게 스스로 인지한 듯 보인다. 3/4의 정면상으로 묘사된 얼굴에서 약간 매부리코 형태로 공격적으로 보이는 코와 부드러운 뺨은 서로 좋은 대조를 보인다. 전체적으로 아직도 완성되어야 할 부분이 있지만, 적어도 코와 눈은 이미 그 완성도를 향해 가고 있는데,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 비로소 확신 가운데 충만한 형태로 묘사된다.”
 그런데 이 어린 소년이 가리키는 손을 주목할 필요가 있으며, 이것은 그가 이 그림의 오른쪽 상단에 남긴 글과도 관계합니다 : “이것은 내가 아직 어렸을 적인 1484년에 거울에 비쳐진 나의 모습을 보고 그렸다. 알브레흐트 뒤러” 화가로서의 굉장한 자의식을 보이는데, 실제로 그런 자의식을 가진 것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결과를 내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을 그리는 데 가장 중요한 육체적 수단인 ‘길고 우아한 손’은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훗날(1500)에 제작된 [자화상 4]에서 아주 명백하게 묘사된, 완성된 화가라는 자의식을 드러내는 듯한 ‘우아하고 기다란 손’의 어린 시절 원형이 바로 여기에 있는 셈입니다. 화가로서의 자의식을 명백하게 가진 손이며, 앞으로 그 손으로 전혀 없던 세계를 창조할 기세를 보입니다. 마치 12세에 예루살렘에서 율법학자들과 토론할 정도의 실력을 가진 예수의 스토리를 알고 있는 뒤러가 이것을 의식적으로 자기화했을 가능성마저 있습니다(J.Hall [The Self-Portrait: A Cultural History] 2014). 그 자의식의 선명한 표지로 다른 이들이 복사해서 판매할 생각이란 결코 하지 말라는 투로 자신의 이니셜인 AD를 모든 작품마다 빠지지 않고 선명하게 박아 넣었습니다. 또 매 그림마다 기록된 그림의 주석 같은 글들은 최고의 화가로서의 자의식이 평생을 따라다녔음을 보여줍니다(“이것을 5일도 안 걸려 완성했다”,“아팠을 때 두려움을 품고 그린 것이다”,“안트베르뻔에서 이것을 보았다”). 흘러가는 역사 속에서 자신을 항구적으로 고정하려고 시간과 싸우던, 어릴 적부터 형성한 이 버릇을 끝까지 가져간 겁니다.       

 

자화상 2 [에린지움(엉컹퀴)을 들고 있는 자화상]

 이것은 그가 배움과 익힘의 방랑기인 Wanderjahr(‘봔더야르’1490~1494)를 보내는 중에 아버지가 선정한 결혼상대인 Agnes Frey에게 보내기 위하여 자신을 나타낸 첫 유화 작품입니다. 그녀의 아버지인 Hans Frey는 실내우물장식의 대가로 Nuernberg의 공직에 근무했습니다. 아마도 양가가 서로를, 그래서 뒤러도 그녀를 이미 알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지만 결혼생활이 행복했던 것으로 보이지 않으며 그래서인지 이 둘 사이에 자녀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경건하고 충성스러운 아내였지만 이기적인 자기만의 방식대로 남편을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할 남편의 예술세계를 몰랐으며, 그가 추구하는 독창성,창조성을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인 고독의 차원을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늙은 까마귀’로 아내를 묘사하며 거친 말로 표현하기도 했을 정도였지요. 그는 그녀에게서 영감이나 생애의 기쁨을 기대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일찍부터 아들의 탁월한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는 자신이 원하는 금세공사로서의 삶은 살지 않고 예술가로서의 삶을 사는 아들의 고집을 결코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Strassburg에 있을 때에 아버지로부터 받은 편지를 통해 기정사실화되어 버린 결혼만큼은 완강한 아버지의 뜻이었기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여겼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뒤러는‘미래의 혼인대상자에 보여질 그림’에서 아주 다양하게 해석할 여지가 있는, 애매한 그리고 매우 자의식이 충만한 말을 적어놓았습니다 : “나의 사명은 별에 새긴 것 같으니(My sach die gat, als es oben schat).”

캔버스에 붙인 양피지 위에 유채, 56x44cm 1493 / 22세 루브르,프라도,Pinakothek 박물관

 

 여기서의 사명’이란 아마‘예술가로서의 그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을 결혼할 상대를 향해서 보내는 그림에 써놓은 뜻이 무엇인지 확실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예술적 능력을 충만하게 발휘할 그 손으로 들고 있는 식물인, 독일에서는 ‘충성된 남자’(Maenner treu)를 상징하는 엉컹퀴(에린지움 Eryngium amethystinum)와 이 글귀를 상관시킬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당시의 종교적 신념을 따라 1) 그리스도의 고난을 받아들이는 것, 혹은 2) 자신이 예술가로서의 신에게 부여받은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것을 상징하는 의미로 이 식물을 그렸을 수 있습니다. 이 식물에 대한 후자의 해석은 이 자화상에 써놓은 사명에 대한 글귀와 연관됩니다. 이런 그와 장래의 아내될 사람과의 소원한 관계는 그가 결혼한 지 몇 달이 채 되지 않아 바로 베네치아로 유학차 떠나버린 사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1494년 가을~1495년 봄).


 이 자화상은 지난 5백여년 동안 지나친 ‘자기애’혹은 ‘동성애’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혹평되기도 했습니다. 또 뒤러의 모든 판화를 소장했던 괴테는 뒤러의 에너지를 ‘나무로 깍은 남성성’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이 자화상이나 5년 후에 그릴 [자화상 3]에서도 마찬가지로 오히려 아주 약간은 여성적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뒤러의 자화상 전체가 그러하듯이런 낮은 차원의 성적 차이를 의식했다기보다, 예술가가 누리는 ‘자유’와 그것으로 성취할 ‘창조’, 하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할 부정적 대가인 ‘근심’‘자기회의’같은 심리적 격랑의 청년기(Strum und Drang)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 가계의 특징인 ‘습관적 침묵’이나 ‘침울함’으로, 대부분의 그의 자화상에서 나타나는 대표적 특질인 ‘기쁨이나 웃음의 힌트조차도 없다’는 사실은, 그가 훗날에 조각할 작품인 [우울]Melancolia(1514)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며, 대부분의 천재들이 겪는 ‘창조적 우울’의 모습이 그에게도 있음을 봅니다.    

 

 

자화상 3 [장갑을 낀 자화상]

 이태리에서 돌아온 후 이 자화상이 만들어지기까지 5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그가 독일로 귀국하자마자 새롭게 연 자신의 작업실 안에서 했던 작업의 핵심은 자신의 기초였던 북유럽적,후기고딕적 전통 위에 이태리적,르네상스적 새로움을 조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지 이 자화상에서는 화가로서의 자신의 활동의 자부심을 표현하는데 중요한 관심이었던 손은, 잠시 뒤로 물러나서, Nuernberg특산품인 사슴 가죽장갑 안에 감추어졌습니다. 즉 자신을 중세기적 기능인이자 금세공업자의 아들이 아니라, 신시대인 르네상스적 예술가로서 자리매김하려고 한 겁니다. 자신의 계시록 판화가 대부인 Anton Koberger가 경영하는 출판사를 통해 전 유럽에 팔려나갔으며, 베네치아에까지 알려지면서, 유명한 화가이며 멘토였던 Giovanni Bellini의 칭찬도 얻었습니다. 하지만 신예술의 본산지인 이태리에서 자신이 더 이상 판화 정도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정식 예술가임을 증명하려는 듯이 이 자화상을 그린 겁니다. 

 

52x41cm, 1498 26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그는 자신의 그림에서 두 가지 이태리적 특성을 나타내려고 했는데, 먼저 창 너머 배경으로 묘사된 이태리적 자연풍경인데, 이것은 모나리자에서도 볼 수 있는 르네상스기 이태리 화가의 전형적 특징입니다. 바로 그가 입고 있는 옷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의 연륜, 재력, 도시적 분위기, 또 자신을 제3자처럼 묘사한 스타일 등이 엿보입니다. [자화상 1]이나 [자화상 2]에서 본대로 헝크러진 것이 아니라, 규칙적으로 잘 굽이치며 잘 정리된 갈색으로 드리내리워진 머리카락과 멋지게 처리된 연갈색 수염이 그 화려함을 대변합니다. 흰색과 검정색이 규칙적으로 교차하는 디자인의 고급스러운 모자가 얼굴 위에 있으면서 이런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근엄하고 사회적 지위를 암시하는 듯한 3/4의 정면상에서 묻어나는 약간의 긴장감을 포착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두 눈 사이의 짧은 미간에 그 어떤 내면적 기쁨도 없고, 또 자기를 드러내려는 그 어떤 암시조차 없는, 화려한 외면과 무감정의 내면의 불일치라는, 이상한 불편함이 느껴집니다(Laura Cumming [A Face to the World] 2009). 이것은 그가 지금 르네상스적 외형을 추구하고 있으나 이미 내재한 북유럽적 정체성 속에 그것을 충분히 내면화시키지 못함을 보입니다. 그의 내면은 여전히 이전의 습관을 따라 이 작품의 역사성을 글귀로 남기는 것 속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

“Das malt ich nach meaner gestalt / Ich war sex und zwenzig Jor alt. Albrecht Duerer”

(나는 이것을 나의 모습을 따라서 그렸다. 내가 26세 일 때에).    

 


자화상 4 [자화상]

 

 어렸을 적에 뒤러에게 익숙한 거울은 뒷면에 납을 입힌 양철조각에 불과할 정도로 섬세하지 못했으며 공모양이었지만, 어른이 된 후에 구입했던 베네치아의 거울은 휠씬 더 선명했습니다. 이런 거울 앞에 선 자신을 묘사한 1500년의 [자화상 4]는 자화상의 역사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미술 역사에 항구적 가치를 가질 놀라운 창조물입니다. 근본적으로는 위에서 언급한대로 아직까지 이루지 못한, 북유럽적 내면과 남유럽적 외면의 통합이 드디어 완성된 느낌을 명확하게 주는, 거의 영원성에 근접한 탁월한 작품입니다. 그런데‘거의’근접했다고 한 이유는, 전 유럽에 이 즈음에 일어나는 세 가지 거대한 문화(명)사적 움직임 가운데 오직 하나인 르네상스만을 경험하며 나온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남아있는 두 움직임은
1) 유럽문화(명)의 근본을 뒤집는 종교개혁(1517)과,
2) 신대륙의 발견(1492)과 함께 베네치아에서 스페인,포르투칼을 빠르게 지나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정치적 패권이 이동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무판에 유채, 67x49cm, 1500 30세 뮌헨 알테피나코테크 미술관


 훗날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그는 루터에게서 매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의 동판초상화를 제작한 것(1526)과 마찬가지로, 루터의 초상화를 제작하기를 정말 원할 정도로 그는 루터에 경도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이전에 즐겨 제작하던 로마교적 종교화를 거의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내면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그 독일인이 발견한 종교적 진리에 전적으로 동의했으며, 따라서 로마교가 강조하던 그림을 통하여 종교적으로 교화한다는 원리를 부인하게 된 겁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자체는 안정적 운동이 아니라, 여러 가지 긍정적,부정적 가능성을 함께 가진 이제 막 시작하는 운동이었습니다. 그 부정적 발전의 하나는 뒤러가 직접 목도한 것으로 종교개혁직후 전 독일을 혼란으로 몰아넣은 Thomas Muentzer를 중심으로 Muenster에서 일어난 극단적인 천년왕국적 운동인 농민전쟁(1524~1525)입니다. 종교개혁의 부정적 발전의 다른 하나는 뒤러 생존 당시에 들끓었으나 결론을 보지 못하고 죽었던(1528), 파국으로 끝난 두 종교개혁가(루터와 즈빙글리)가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결렬된 Marburg회의(1529)입니다. 


 유럽의 이런 정치적 움직임과 종교적,문화적 운동은 각각 자신의 ‘절대성’(절대왕정, 절대신학)을 주장하지만, 그 속에 어쩔 수 없이 존재하게 되는 것은 ‘시간성’ 혹은 ‘상대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뒤러가 천직으로 여기며, 모든 문화(명)적 활동의 한 부분인 예술계에서, 시대를 초월하며 동시에 이끄는 어떤 예술적 결과물을 산출하기에 한 사람의 생애로는 턱없이 짧을 뿐입니다. 대신에 그가 처했던 이제 막 한 세기가 바뀌는 1500년에, 거의 영원성에 도달한 듯한 이런 놀라운 자화상을 그려냈다는 사실은 그의 천재성의 발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당대의 바로크 음악으로 만들어졌지만 영원성을 지닌 바흐의 [평균율클라비어곡집]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술가로서의 그의 생애는 이것으로 정점에 올라섰지만, 그 이후로 새로운 도전을 받아 전혀 새로운 길로 갈 생애가 너무 짧았기 때문에, 화가로서 내리막길을 서서히 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자화상에 있어서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 내리막이라고 할지라도 종교의 빈 껍질을 벗어난 본질적 방향으로 그 나름의 발버둥친 역사일 겁니다.


 전적으로 정면상으로 화면을 채우는 것은 예수를 대상으로 하는 종교화에서나 가능한 일인데, 뒤러는 아주 과감하게 자신을 향해서 이렇게 해버린 점이 매우 역설적으로 가장 독창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뒤러가 이 그림으로 스스로를 예수로 그리려고 한 것이 아닐까 라는 의심을 많이 받을 정도입니다. 만약에 이 자화상이 그런 종교적 자의식을 가진 이단적 그림이 아니라면, 정반대로 그가 어릴 적부터 지녔던 최고의 화가나 가장 독창적 예술가라는 자부심,자의식, 즉 신이 준 사명감을 최고로 이룬 화가로 충만하게 자각한 모습으로 해석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에 대한 예술가로서의 종교적 자의식이 충만했다면, 즉각 서양문화(명)의 자기 인식이 부패해 버리는 또 다른 양상인‘내가 초인인가 봐’라고 읊조리면서 정신병원에서 자살로 생애를 마무리한 니체가 가졌던, 악한 나르시시즘, 자기 절대주의로 빠져 들어갔을 겁니다. 그러나 이 그림 이후에 뒤러가 그렇게 타락하였다든지 혹은 그런 타락 이후에 커다란 경험을 통해 종교적으로 크게 겸손한 인물이 되었다든지 하는 역사기록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이후로 나이가 들어갈수록 만들어진 질이 떨어지는 것 같은 자화상들에서 그는 늙어가고 병들어가는 자신의 무기력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냅니다([Head of the dead Christ 죽은 그리스도의 머리] 1503, [Self-portrait in the Nude 누드로 묘사된 자화상] 1509, [The Sich Duerer 아픈 뒤러] 1521, [The Man of Sorrow 슬픔의 사람 그리스도] 1522). (* 이 자화상 자체의 분석은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segensong@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64>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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