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호(164호)

삶의 끄트머리마저도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4. 3. 19. 19:22

삶의 끄트머리마저도

 

치매를 앓고 계시는 어머니는 요즘 주간 보호 센터에 다니신다. 2남 2녀의 자녀를 둔 시어머니는 전에는 집에서 시누이들의 돌봄을 받으셨다. 그러나 육아에도, 노인 돌봄에도 독박은 안 될 일이다. 각자 가정이 있는 시누이들이고 그렇지 않다 해도 어머님을 전담해서 보살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낮에는 어르신들의 유치원 격인 주간보호센터에 다니시고 휴일 하루는 네 명의 자녀가 당번을 정해 종일 어머님을 돌보기로 했다. 셋째 주 당번인 우리 부부가 이번 주일에 어머님 댁에 갈 차례였다. 전에는 목욕 좀 해드린다고 하면 싫다고 하시더니 이번에는 흔쾌히 욕실로 들어가신다. 꼿꼿한 자존심을 내려놓은 어머니는 자신을 돌보도록 며느리인 내게도 기회를 주시기 시작한다. 점심 식사도 잘하시고 아들이랑 몇 마디 말씀도 나누시더니 오후 4시부터 또 ‘얼른 가라’노래가 시작되었다. 딸들이 오면 갈까 봐 “언제 와?”하신다는데, 아들과 며느리는 어쨌든 딸보다는 편치 않으신 거다. 그래도 저녁 약 드시는 것까지는 살펴드려야 하니 얼른 떡국을 끓이고 살치살을 구워 저녁을 차려 드렸다. 매달 어머니는 우리를 만나기까지 한 달만큼 늙어가고 있다. 깔끔하고 외모 단장을 게을리하지 않으셨는데 이젠 파마도 염색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는지 하얗게 쭉 뻗은 머리를 하고 계신다. 그래도 주방에 서 있는 내 곁으로 와서 예전처럼 물건을 제자리에 넣고 뭔가 묻은 곳을 닦아내시는 손길에 아직 남아 있는 총기가 반갑고 안타깝다.

‘슬픔이란 무겁고 낮고 축축한 것이어서, 발끝부터 조금씩 젖어 들어간다. 사지의 말단부터 차가워지기 시작하다 가슴 어딘가가 무거워지고, 그러다가는 결국 눈가가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것이 우리가 겪는 슬픔의 물리적인 현상이다. 그 낮고 축축한 슬픔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발밑부터 우리를 잠식해 나가고, 우리는 그것을 가벼운 감기나 떨치지 못하는 피로감처럼 짊어지고 오래도록 살아가곤 한다.’

황인찬 시인의《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중 한 구절이다. 어째 슬픔의 외모가 늙음과 닮았단 생각이 든다. 늙어버린 몸은 늘어지고 사지의 말단부터 힘이 빠지기 시작하다가 가슴 어딘가가 공허해지고, 그러다가는 결국 생의 온기마저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젊음을 잠식해 나가고, 우리는 그것을 곧 나을 수 있는 감기나 회복할 수 있는 피로감이 아닌, 더 무거워질 일만 남은 육신의 하릴없음으로 마침내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변함없이 누구에게나 들이닥칠 늙음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 경험이 처음인 우리들은 속수무책으로 들이닥친 늙음에 미처 준비하지 못한다.

“얼른 가거라. 아들 기다린다.” 어머님의 얼른 가라 노래는 우리가 이젠 가겠다고 항복한 7시까지 계속되었다. 약을 드시게 하고 현관 앞에서 작별 인사를 한다. 그리고 어머님이 눈치 채지 못하게 카드키로 현관을 연 후 신발장에 카드키를 잘 두고는 다시 인사를 한 후 끝이 난다. 몇 달 전부터 자꾸 혼자 나가시려고 해서 안에서 카드키로만 열 수 있도록 채비를 해놓았다고 함께 사는 둘째 아들이 알려준 터였다. 네 남매를 다 키워 독립시킨 후 어머니의 시간은 거꾸로 가고 있다. 이제 자기 손을 떠난 자신의 마무리를 자신이 키워 낸 자녀들의 손에 맡기는 중이다. 시간은 그 끄트머리에 개인의 생을 어떤 모양으로 변하게 할지 알 수 없을 만큼 모호하다. 그래도 브라질의 의사 아나 아란치스는 ‘죽음이 물었다’라는 에세이에서 사람들은 결국 살아온 대로 죽는다고 했다. 의미 있는 삶을 살지 못했다면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할 기회를 가질 가망도 없다고 말한다. 그만큼 삶의 끄트머리마저도 가장 빛나는 젊음의 때만큼 존중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생의 커튼콜에서 격조 있는 무대 인사가 될 것이다. 어머니의 그것도, 나의 그것도.

 

 

 

경기도 광주시 이화정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64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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