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호(164호)

딸아! 함께 가자! 언제까지일지 모르겠지만아빠가 또 함께 걸어갈게!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4. 3. 19. 19:24

딸아! 함께 가자! 
언제까지일지 모르겠지만
아빠가 또 함께 걸어갈게! 

 

무기로 앞세울 수 있는 건, 60년 공력 담긴 소리를 배운 것 하나.
근 한 달간 처음 참가하는 판소리 대회 출전을 준비하고 있는 초등학교 4학년 딸아이의 매니저이자 음악 디렉터, 운전기사, 사진사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코로나 이후 열린 첫 대면 메이저 대회라 그런지 소리를 배우는 초중고 학생들이 서울, 광주, 대구 등 전국에서 77명이 몰려들었다. 대회장 앞이 참가자와 부모들로 가득 찼고 자세히 보니 젊은 명창들이 가르치는 아이들을 서 너 명씩 앞세우고 직접 대회에 참석했다. 나이 지긋하신 문화재 할머니 선생님 밑에서 이제 1년 남짓 아장아장 소리를 배우고 있는 딸아이는 그런 현장 지원을 받기 쉽지 않다. 화려한 동작을 앞세운, 연출된 멋들어진 발림도 없다. 무기로 앞세울 수 있는 건 그저 60년 공력이 담긴 소리를 잘 받아 배운 소리 하나. 작년 어린이 판소리 왕중왕 대회에 출전했던 친구들도 여럿 보인다. 초등학교 아이들이라 1년 성장이 큰 차이가 난다. 딸아이는 4학년. 키는 좀 자랐지만 몸이 말라 통통하게 살이 붙고 있는 5, 6학년 언니들보다 키도 작고 소리통 자체가 작아 힘으로 밀어붙이기도 어렵다. 대회에선 자기 장점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 공력, 성음, 감정은 선생님의 칭찬과 함께 성장했다. 소리목이 없는 아이들이 소리를 할 땐 뭔가 노래를 하는 느낌이라면, 딸아이는 자기 성음을 선물로 받고 태어나 소리를 하면 선생님이나 듣는 사람들이 무척 신기해한다. 

 



긴장한 아이, 밥을 잘 먹지 못한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어 가보니 주최 측에서 많은 참가 인원으로 경연 시간을 3분으로 단축한다고 발표한다. 아뿔싸, 준비한 ‘흥보 뺨맞고 탄식하는 대목’은 4분부터 하이라이트로 터지는 노래인데 3분만 듣겠다니… 마음이 좀 무거워진다. 재빨리 가사집을 보며 노래를 점검하니 노래 중간에 강조할 수 있는 두 부분이 드러난다. 전략을 바꿔 이 두 부분에 공력과 감정을 집중적으로 표현하기로 한다. 1~3등은 일요일 본선 무대에 진출하고 4~7등은 토요일 예선이 끝나고 장려상을 바로 준단다. 초등부에 28명이 나온다는 소리를 듣고 본선은 언감생심, 첫 대회이고 예상보다 많은 아이들이 참가한 만큼 장려상 정도로 목표를 수정해 본다. 경연 순서로 16번을 뽑은 아이. 절반 좀 지난 순서라 원했던 대로 잘 뽑았다. 금손이다. 경연장이 좁은데 사람들이 꽉 차 있어 공기가 텁텁하고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아이에게 호흡을 충분히 확보하라고 일러준다. 작년과 달리 마이크가 다이나믹 마이크로 바뀌어 있어 마이크에 입을 더 붙이라고 일러주고, 발림 동작이 짧은 경연 시간으로 사라져 버려 밥을 먹으며 다른 소리꾼 영상 속에서 적당한 발림을 찾아 아이에게 부랴부랴 일러준다. 경연장에 들어가 앉아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데 대기실과 경연장이 한 공간이라 20분 정도 목을 쓰지 못한다. ‘아 저러면 풀었던 목이 다시 굳는데…’ 20년 이상 성가대, 합창단 활동을 하며 예술의 전당, 세종문화회관에서의 큰 무대들부터 거리 무대까지 수 백 차례 크고 작은 공연을 하며 무대 밥 좀 먹어본 아빠는 컨디션이 작은 변수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어린 딸아이의 목상태가 염려가 된다. 대기하며 조용히 호흡법으로 목을 풀어두라 당부를 하고 나는 사진을 찍으러 내려온다. 

‘아… 열심히 준비했는데, 이렇게 끝나는구나’  허나 반전에 반전
작은 아이는 자기 차례가 되어 태어나 처음, 모두가 자신을 주목하는 경연 무대에 오른다. 역시나 좁은 공간의 텁텁해진 공기로 목이 갈라져 나온다. ‘내게 언제 전곡 맡겼소? 아나 밥! 아나 돈!’ 굶는 자식새끼들 밥 구하러 곡식을 꾸러 간 놀부 형에게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맞고 살려 달라 도망가다 형수에게 또 뺨을 맞는 흥보의 설움. 놀부 마누라의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아니리를 시작하니, 심사위원들과 사람들의 입에서 웃음과 짧은 탄성이 흘러나온다. 시작이 좋다. 잘 진행되나 싶더니 창조(아니리와 노래 중간의 노래와 대사가 섞여 있는 노래)부터 목이 갈라진다. 급히 만든 발림을 아이가 하지 않는다. ‘아, 많이 긴장했구나…’ 음정을 찾아 힘 있게 내지르던 노래가 갑자기 박이 밀려 버린다. 대회의 지정 고수 분들은 처음 만나 합을 맞춰보는 분들이라 아이는 고수 북을 자신이 리드해 소리를 밀고 가야 하는데 그런 걸 배운 적이 없는 아이는 두어 번 북 박자를 기다렸고 음악이 미세하게 끊겼다. 카메라 뷰 파인더로 이 장면을 보며 순간 아찔해진다. ‘진양조다 보니 박자가 어려워 웬만한 실력으로 아이들이 잘 도전하지 않는 노래를 택한 것이 실수였나? 아이가 긴장해서 가사를 잊어버린 건가?’ 짧은 시간에 역시 대회 초보인 아빠의 마음엔 여러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셔터를 한 번 밖에 못 눌렀다. 아이를 보며 그대로 나의 뇌도 굳는 것이 느껴진다. ‘아… 열심히 준비했는데, 이렇게 끝나는구나’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아이는 준비한 대로 또 무대 위에서 힘을 낸다. 박은 밀렸지만 준비한 노래를 감정을 잡고 씩씩하게 부르니 관중석에선 어이! 얼씨구! 하는 추임새가 나온다. 처음 보는 관중들 사이에서 추임새가 나온다는 건 소리가 듣기 좋다는 뜻이다. 아이의 트레이드 마크, 선생님께 배운 두세 번 꺾는 공력이 자연스레 들어가며 소리를 만드니 사람들의 입에서 아~ 하는 짧은 탄성이 흘러나온다. ‘흥보 놈을 벼~라아아악(벼락)을 때려주면~~’ 선생님께 배운 이탈한 음정의 독특한 아귀성이 쏟아져 나오니 또 한 번의 탄성이 나온다. 분위기가 반전되었지만 밀려버린 박의 찝찝한 기분은 그대로다. ‘뎅~’ 징이 울리고 짧은 노래가 끝나는데 반전된 분위기 속으로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린다. 

“사랑아, 내일 경연 준비하자. 너 2등해서 내일 본선 나가야 돼.”
여기저기서 “잘했다, 잘한다~” 하는 추임새와 박수가 터져 나온다. 분위기는 너무 좋은데 무대에서의 실수에 실망한 아이의 표정이 좋지 않다. 10년 키운 딸아이에게서 처음 보는 표정이다. “잘했어, 잘했어. 경험이 없어서 그런 거야, 다음부터는 북이 나오지 않아도 네가 고수를 끌고 가면 돼, 다른 대회 또 있으니까 준비해서 도전해 보자.” 실망한 아이를 다독이며 초조하게 점수를 기다리는데 395만 점에 389점이 뜬다. 사람들이 “와~”하며 다시 웅성거린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까지 나왔던 점수들 중 최고점이었다. 사람들의 반응과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점수가 좋은 것 같다. 목표했던 장려상은 받을 것 같다. 상황을 모르는 아이에게 설명을 해주자 아이는 기분이 회복되고 하이파이브를 나누곤 “이제 축제다. 놀자!”하고 딸아이를 데리고 옆 건물 대학부 예선 경연장으로 구경을 갔다. 운이 좋았는지 때마침 실력 좋은 대학 전공생이 아이와 같은 미산제로, 또 아이가 배우고 경연하고 있는 흥보가 앞 대목을 똑같이 소리하고 있다. 내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이 아이는 대학생의 연주를 들으며 경연 소리꾼이 어떻게 고수를 끌고 가는지 짧은 시간에 그대로 보며 흡수한다. 


경연장에 남아 경연을 끝까지 본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사랑아, 내일 경연 준비하자. 너 2등해서 내일 본선 나가야 돼.” 생각보다 좋은 결과다. 남도에 여행을 하러 오셨다가 경연을 보신 부모님들이 너무 기뻐하셔서 또 함께 즐겁다. 어르신들과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와 피곤한 몸을 누였다. 본선이 아침 일찍이라 6시에 일어나 다시 보성을 향하는데 나도 왠지 밥이 잘 먹히지 않고 잠도 푹 자질 못한다. 본선에 진출한 예선 1,3등이 모두 작년에 왕중왕 대회에 나왔던 5학년 언니들. 소리 경력이 최소 3~4년, 대회 출전만 5~6회가 넘는 경력자들이다. 물론 키도 크고 몸도 크다. “준비한 것만 하고 오자, 어제 실수했던 것만 조심하고 고수가 박을 잘 못 맞춰도 그대로 밀고 가~” 본선에서 아이의 금손은 마지막 3번을 뽑았다. 본선은 예선을 통과한 초중고 3명씩 겨루는 경연이라 분위기가 엄격, 근엄, 진지다. 하지만 예선 1등 언니의 쑥대머리를 듣는 순간 이기기 쉽지 않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타고난 공력, 성음은 사랑이가 더 좋지만 이 곡을 수 백 번은 더 불러본 듯한 여유와 힘, 능숙한 발림에서 ‘아, 이건 어렵다.’하는 직감이 들었다. 나중에 유튜브 등을 통해 찾아보니 이미 이 언니는 3년 전부터 똑같은 노래를 무대에서 부르고 있었고 큰 무대 경험도 많아 보였다. 경연을 마치고 마음을 졸이며 결과가 발표되었고 아이는 처음으로 나간 큰 전국 대회에서 초등부 2등을 하는 놀라운 성과를 만들었다. 경연을 마치니 심사위원 분들이 새로 등장한 다크호스에 많은 관심을 보이신다. “누구에게 배웠냐?, 어느 소리냐?, 몇 년 했냐?, 아, 타고 난 거구나…, 집안에 소리의 피(유전)가 흐르는 것 같다.” 등등 중견 명창 분들에게 관심과 좋은 덕담을 많이 들어 또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다. 결선에서도 경연시간이 단축되어 준비한 하이라이트 부분을 다시 보여주지 못해 아쉬움이 있었지만 첫 대회 치고는 큰 성과였다. 아이는 명창부, 일반부에서 다양한 소리꾼들의 경연과 문화재 선생님들을 직접 보고 전설 조상현 명창과 사진도 찍고 “소리로 크게 대성하라”는 덕담도 들으며 첫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손흥민의 아버지 손웅정 씨의 마음을 알다
손웅정 씨가 손흥민 경기를 한 번도 앉아서 본 적이 없다는 말이 경연을 마무리하며 떠올랐다. 우리 부모님도 나의 성장과 무대를 보며 이렇게 가슴 졸여하셨겠구나… 경연을 마치고 옷도 갈아입지 않고 맨 먼저 어머니, 아버지 숙소로 가서 기념사진을 찍고 생신을 맞으신 아버지 생일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축하 노래를 불러드렸다. 딸아이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상장과 사진을 보며 싱글벙글, 여기저기 친구들에게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으시다. 6월이 되면 목포에서 소리를 배운 지 이제 만 1년. 지난 1년 일로 서울을 오가며 목포까지 내려와 이게 뭐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발견한 아이의 재능이 어느 정도 검증이 된 것 같아 이제까지의 고생이 한순간에 씻겨 내려가고 아이를 위한 또 다른 목표를 세우고 전진할 힘이 되어준 경연이었다. 부모 된 보람이 무엇인지 내 부모님의 사랑은 또 얼마나 컸던 건지, 자식을 기르고 중년이 되어서야 겨우 알게 되고 배우게 되는 것들이 있다. 첫 발을 잘 내디딘 소릿길. 딸아, 주말에 놀지도 못하고 그간 소리 배우느라 고생했다. 함께 가자. 언제까지일지 모르겠지만 아빠가 또 함께 걸어갈게. 

 

 

세일링서울요트클럽, 모아나호 선장 임대균
keaton70@naver.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64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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