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호(165호)

서양 최초의 자화상 회화전통을 창조한알브레흐트 뒤러의 자화상 (2) - 예비적 탐구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4. 5. 15. 12:23

서양 최초의 자화상 회화전통을 창조한
알브레흐트 뒤러의 자화상 (2) 

- 예비적 탐구

 

 

|자화상 있는 서양문화 vs. 자화상 없는 동양문화
 서양문화(명)와 동양문화(명)를 탐구하는 근본적인 프로젝트인 [서양문화(명)의 황혼과 새문화(명)의 여명]이라는, 10여년 이상으로 진행한 거대한 칼럼의 일부로서, 우리는 서양문화(명)에만 있는 독특한 현상인 자화상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동양문화(명)에서는 없는 서양문화(명)만의 독특한 현상이 자화상 그리는 전통이라는 점은 너무나 현저합니다. 이 글을 쓰는 동양인인 저는 비록 화가가 아니지만, 만약 잘 훈련받은 화가로서 자화상을 그리겠느냐고 묻는다면, 긍정적인 답을 주기가 매우 어색한데 다른 동양인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현대 동양의 화가들 중에서 서양화의 영향을 받아서 자화상을 심지어 나이에 따라서 꾸준히 제작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화가임과 아님과 상관이 없이 내가 내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나의 실체,근본을 파악하려는 태도 자체는 비동양적이어서 아주 어색합니다. ‘내가 나를 그리는’ 자화상 제작이 동양인에게 매우 어색한 이유는,‘나의 무엇을 그리지?’, 더 깊게 들어가서‘나는 나를 누구라고 하는가?’, 더 줄여서 ‘나는 누구인가?’, 더 현실적으로는 ‘나를 표현해서 어떻게 하려고?’ 라는 질문을 하고 대답하는 것 자체가 어색하기 때문입니다. 동양인들이 서양문화(명)를 모르는 가운데 ‘나는 누구인가?’ 라는 핵심적인 질문을 받았다면, 틀림없이 자기 자체가 아니라 자기정체성을 나타내는 외적인 표지인 나이,가족,경력,학력,재산,자산 등을 가진 존재로 나타냈을 겁니다. 그렇지만 서양문화(명)에서의 자기성체성은 이런 흘러가는 것, 관계적인 것, 혹은 손에 무엇을 쥐고 있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나는 어떤 항구적 (가치를 가지고 만드는) 존재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양인들은, 15년을 살다 죽을 우리집 강아지처럼 살았던 흔적만 남기고 지나가버리고 마는 존재 이상으로, 즉 무언가 오래가고 영속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단지 할아버지,아버지의 성을 이어가는 생물학적, 가족적 전통을 이어가는 존재 이상으로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동양인이 자기 자화상 그리기가 어색한 이유는 더 근본적으로 동양문화(명)가 개인의 자기정체성의 확립이라는 문화공간이 비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내재하는 이런 문화공간의 어색함,비어있음 때문에, 유교적 동양에서는 ‘나’보다는 ‘우리’로 나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관계적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는 전통이 지금도 한국에 남아서 가족중심주의(‘우리’)를 이루는데, 그러면‘나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사실 전혀 하지 않는 셈입니다. 전두환의 손자처럼‘나’가 되어서 광주까지 내려가 선조의 죄를 고백하는 용기를 가진 경우는 여전히 우리 중에는 극히 드뭅니다. 잘난 부모찬스를 적극 사용하여 부모와 하나(‘우리’)가 되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일말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조국의 딸 같은 사람들이 한국사회에는 훨씬 더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영원히 대를 이어가며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것이 인생이므로,‘나’의 항구적,영원한 존재 의미는 물을 수가 없는 겁니다. 결국 동양인의 자의식 속에 찌꺼기처럼 남긴 흔적은 설날,추석에 관습적으로 올리는 조상숭배의 제사 밖에 없습니다. 또 다른 동양인 인도에서 발원한 불교의 경우는 나의 해탈을 염원하고 타인의 해탈을 내가 이루어줄 수는 없으니 매우 개인주의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동양이 공동체주의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 서양도 항상 개인주의적이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은, 자화상을 만드는 전통이 뒤러 이전에 조금씩 그 기운이 일어나다가, 16세기 혹은 뒤러 이후로 급작스럽게 일어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불교적 동양에서는, 가족이나 그 어떤 관계도 절단하는 출발을 한 가운데 극복하려고 치열하게 싸우는 대상은 인간 삶의 조건인 세 욕망(소유욕,관계욕,지배욕)입니다. 하지만 무소유의 삶을 살면서 그것을 정복한다고 간주한다고 할지라도, 나중에라도 남는 것은 ‘비어있음’, ‘아무 것도 없음’, ‘공허’일 뿐입니다.‘나’의 생존목적과 의미가 결코 규정될 수 없고 덩그러니 혼자 있을 뿐입니다.
 이런 모습들을 단순히 규정하여, 동양은‘공동체주의적’이고 서양은‘개인주의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원인보다는 결과를 말하는 것이니 허망합니다. 즉 그 원인인 왜 동양은 공동체주의적이 되었으며 서양은 개인주의적이 되었느냐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자기에 대한 정체성, 종교적 자기정체성의 전통을 이룬 서양문화(명) 
 서양문화가 자화상 전통을 지난 5백년 동안 꾸준히 이어가고 있는 것은, 서양인의 마음 속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진정한 자기(‘나’)를 찾고자 하는, 영원한 자신의 정체성을 갈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자기’라는 의식(자기를 자신으로 인식하는 것)은 인간뿐 아니라 짐승조차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거의 대부분의 포유류가 뇌에 ‘거울뉴런’(mirror neuron)을 가지고서 누군가 앞에서 하는 행동을 모방하는데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본능으로 움직이는 포유류 이하의 생명체와는 달리 포유류도 ‘일종의 자기정체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생존본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죽어가는 자신을 슬퍼하는 코끼리처럼 ‘시간 속에서 흘러 지나가는 존재’가 아니라, 오래가고 항구적,영속적 가치를 지니는 존재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그 본래적 가치를 성취하는 존재라는 자각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은, 인간만이 가지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들은 아주 자주 이런 사실을 잊어버리고 혹은 모른 척하면서 살아가지만,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내재하는 이 영구한 자기정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전통적 일본인’처럼 단지 시간 속에서 흘러 지나가는 존재로만 자기를 인식한다면, 다른 사람을 해하는 것이 나쁜 것이라는 윤리의식 자체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 중엽까지 동아시아에서 어떤 극악한 잘못을 해도 그것을 결코 잘못으로 인식하지 않으려는 보통의 일본인들이 되고 말았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강제위안부(성노예)나 강제징용의 잘못을 결코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흘러 지나가는 것으로만 인식하려는 일본인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유교적 습관을 따라 옳고 그름에 대한 윤리의식을 가진다 해도, 결코 항구적,영속적 가치를 지니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데까지는 도달할 수 없었던 것이 ‘전통적 조선인’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동양에서의 ‘속이는,모른척하는 존재’(일본인), 혹은 그것보다는 조금 낫지만‘인간끼리의 윤리적 행위만을 고려하는 존재(조선인)로서의 인간관에 도전한 것은 서구문화(명)와 함께 도래한 절대종교 기독교였습니다. 그렇지만 ‘일본’은 그 전형적인 일본적 근성을 따라서 이 기독교를 절대적 피상성으로 도입하였기 때문에 철저히 일본적 기독교 혹은 2차대전을 결코 막지 않고 오히려 부추긴 무능한 기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또 절대종교인 기독교가 ‘한반도’에 강력한 영향을 미쳐 20세기 말에는 천이백만 명의 교인을 가질 정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양적인 가족중심적,세속주의적인 것을 버리지 않아 피다만 꽃처럼 되어버린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기독교 자체가 예수의 원래적 종교가 아닌 타락한 기독교였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종교적 자기정체성을 수립하지 못한 겁니다. 둘째는 한국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오천년 동안 이룬 허무하고 허망한 역사를 근본적으로 반성해서, 비록 타락한 기독교가 전해졌다고 할지라도, 그 예수의 원래적 종교에 돌아가지 않고, 이 땅에서 살아남고 이 지상에서의 행복추구를 도와주는 종교(출세,성공,자식,건강)쯤으로 기독교를 타락시킨 것입니다.   

 


|인간을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온 신이 인간을 위해 죽은,

예수의 원래적 종교가 말하는 자기정체성을 담은 뒤러의 생애와 자화상들 
 1) 예수의 원래적 종교가 말하는 자기정체성
서양문화(명)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그 기초 위에 문화(명)를 세웠어야 할 예수의 원래적 종교적 자기정체성은 무엇일까요? 지나가고야 말 세상과의 세 가지 고리,사슬을 완전히 끊은 후에, 절대자 앞에 벌거벗고 서서 그의 초대를 따라서 그와 공적이고 합법적 관계를 맺으며 그의 법을 따라서 행하는 자아가 바로 종교적 자기정체성입니다.
 첫째, 끊어야 할 세 가지 고리,사슬이란 
 1)‘가족을 진정으로 미워하는 것’,
 2)‘자기 자산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
 3)‘자기를 부인하고 육신의 생명을 내놓고 이 세상의 악과 투쟁하며 예수처럼 사는 것’입니다(눅 14:25-33). 이 세 가지는 원래 인간의 근본적 목적이며 영원한 가치를 이루는 데 꼭 필요한 도구,조건입니다만, 인간 내,외부에 존재하는 악은 이 도구와 조건 자체를 목적으로 삼도록 인간을 속인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변형되어 인간을 옭아매는 고리를 스스로 끊지 않는 한, 아무리 종교인인 척 하더라도, 꼬여지고 불행하고 무의미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다는 자각에서 과감하게 새출발하는 겁니다.  
 둘째, 이 조건을 채운 후에 다음 단계의 세 가지 행동으로 넘어갑니다.
1) 예수께 절대적으로 의탁하여 절대하신 분이 주시는 과거,현재,미래의 죄에 대한 절대적 용서의 선언을 받으며(이신칭의, 수동적 칭의),
2) 절대하신 분과 부자(父子)관계를 영원히 맺으며,
3) 다시 신을 닮은 창조자로서의 인생의 근본목적을 이루려고 신의 법을 따르는 훈련을 하며 그것을 역사 속에서 시행하는 겁니다.

2) 뒤러의 자화상들에 담긴 종교적 자기정체성, 그리고 잘못된 해석
우리의 자화상의 주인공인 뒤러를 우리가 존경하는 이유는, 첫째, ‘그의 예술의 미학적 탁월성’(40% 중요성)도 있지만, 둘째, 더 중요한, 앞에서 언급한 ‘종교적 자기정체성을 가진 예술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60% 중요성)는 사실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동양인들, 예술가들이 제 아무리 뒤러의 첫째 요소인 탁월한 예술성에 감탄한다고 하더라도, 더 중요한 둘째 요소인 철저한 종교적 자기정체성을 가진 존재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를 곡해하고 말 것입니다. 그 전형적 예가 뒤러 전공자로 매우 유명한, 프린스턴대학의 유대인 교수인 E.Panovsky[The Life and Art of Albrecht Duerer](1955)입니다.

▲ 자화상 4 30세 Duerer's self potrait (1500)

 그는 뒤러의 1500년의 자화상(‘자화상-4’Muenchen)를 일종의 자기교만의 표시로 보았습니다. 그는 뒤러를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하여 자신의 책의 표지로 내세운 것은 매우 역설적이게도, 흔히들 집중하는 화려한 ‘자화상-4’가 아니라‘Man of Sorrows'(슬픔의 사람)이라는 제목이 있는 ‘자화상-6’(1522)입니다. 우리가 이전 글에서도 보았듯이, ‘자화상-4’는, 자기교만이라기보다 신의 형상을 닮은 존재인 인간이 신을 닮아 창조적 작업을 하는 존재로 자기를 뒤러가 자각한 것, 그리고 신이지만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온 예수를 닮은 모습으로 스스로를 묘사한 겁니다. 만약 뒤러가 인생의 마지막까지 이런 ‘자기기만’속에 살았더라면, 죽기 얼마 전에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자화상-6’(1522)을 만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Panovsky처럼 해석한다면, 무엇보다도 제작년도별로 이 두 자화상 사이에 있는 ‘벌거벗은 자화상’(nude self-portrait)라는 제목이 붙어있는‘자화상-5’(c.1508)를 해석할 길이 없어집니다. 

▲ 자화상 5 Nude self potrait (c.1508)

앞을 향해서 넘어지듯이 매우 불안한 자세로 서서 벌거벗은 몸을 그대로 노출한 자화상이, 뒤러의 자기정체성 인식에서 차지하는 매우 독특한 위치를 해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Panovsky가 철저히 기독교를 거부하며 동시에 예수의 종교의 근본인 자기부인을 부인하는 유대인이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뒤러의 자화상 전체(적어도 6개 1484,1493,1498,1500,c.1508,1522)를 보면서, 그의 자의식이 변화해 가는 전 과정을 다루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장 화려한 것’이 ‘자화상-4’라면 ,‘가장 비참한 것’이 ‘자화상-6’이며, 아주 특이하게 그 중간에 ‘가장 격렬한’ ‘자화상-5’가 위치합니다. 

▲ 자화상 6, Man of sorrow (1522)

이 세 가지 모두가 공존한다는 점이 오히려, 진정한 종교인이자 탁월한 예술가로서의 그의 삶이 매우 값진 것을 보여주며, 예수의 진정한 종교적 정체성을 가지려는 사람들도 역시 그런 삶을 살기를 희구할 겁니다. 매우 역설적인 점은, 뒤에서 설명할 것이지만,‘자화상-6’의 제목인‘Man of Sorrows’(슬픔의 사람)는, 원래 뒤러가 예수를 향한 판화를 제작할 때 여러 번 그리고 기독교에서 자주 사용하던 주제(1493,c.1500,1509,1514,1515)입니다. 그런데 다른 판화에서는 모두 가시왕관과 채찍과 몽둥이를 든 못 박힌 손을 가진 예수를 그렸지만, 유독‘자화상-6’에서만, 늙고 측은한 얼굴, 쭈글거리며 축 늘어진 몸통, 뒤러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았던 흘러내린 곱슬머리, 몽둥이와 채찍을 쥔 못 박힌 흔적이 없는 (뒤러의) 손을 가진 3/4면상이 쓸쓸히 앞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진정한 ’슬픔의 사람‘이었던 예수와 자신을 동일화하려는 시도입니다. 즉 신이지만 인간 형상으로 내려온 최고의 존재인 예수를 닮은 자신을 그려낸 것이 가장 화려한‘자화상-4’(1500)라면, 지옥까지 내려가는 가장 비참한 경험을 한 예수를 닮은 자기를 그려낸 것이 가장 비참한‘자화상-6’(1522)이며, 그 중간에서 외부적,내부적 도전에 직면해 처절한 자기 투쟁을 하는 것이 가장 격렬한‘자화상-5’(c.1508)인 셈입니다.   
 이런 뒤러의 생애와 작품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그를 해석하는 것은, 마치 음악만의 전문인(연주자,작곡가)이 되는 것이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철저한 종교적 자의식을 가졌던 요한 세바스챤 바흐의 작품을 용감무식하게 해석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바흐의 종교작품 중 최고봉인 BWV242를 지식으로 알기는 하지만, 그것의 종교적 기초인 아다나시우스 신앙고백의 본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음악의 진수는 버리고 껍질만 맛볼 뿐임과 같습니다.

 


|뒤러를 통해 보는 절대신 앞에 자신을 세움으로 시작하고 완성하는 서양문화의 종교적 자기정체성 
 1) 서양문화의 종교적 자기정체성의 기초로서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절대신을 떠나서 동쪽(인도)으로 동쪽(동아시아)으로 이동한 동양인들에게는 절대신 앞에 자신을 세운다는 개념 자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스스로 신으로 등극하거나(인도의 불교), 아예 신 자체를 지우고 인간(왕,황제)이 그 위치를 차지하는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이에 비해 서쪽으로 이동한 서양인들은, 동양으로 갔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간 자체를 신격화한 경향(그리스-로마)도 있었지만, 동시에 절대신을 떠나지 않았던 역사도 공존했습니다. 이 두 경향성이 역사의 흐름에 맞추어 뒤러의 시대인 15~16세기에 다시 튀어나온 것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입니다. 그런데 흔히 르네상스는 종교개혁의 전제조건처럼 잘못 여겨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이 진정한 근본적 종교로의 회복이었다면, 중세를 건너서 고대기독교로 가는데 더 거슬러 올라가 구약시대에 다윗-솔로몬이 구가했던 총체적 문화에서의 영광과 풍성을 신약시대에도 경험할 것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아우구스티누스를 필두로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는 성과 속의 이원론적 세계관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구분하는 두 왕국 이론)을 전개하였습니다. 루터는 신플라톤주의적 신학과 문화관,세계관을 가진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수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일차적으로 로마교에서는 떠난 종교개혁은 했지만 더 근본적으로 신플라톤주의적 이원론적 세계관과 결별하는 종교회복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겁입니다. 그래서‘세속’은 그리스-로마의 원리를 재도입하는 르네상스로,‘종교’는 기독교의 초기단계로 돌리는 것에만 집중하는 전통이 서양문화에 생긴 것입니다. 루터가 행한 치적 중 치명적 약점의 하나이며, 죽음에 임박한 뒤러가 루터와 깊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 것은, 루터가 어설프게 처리해서 독일에 파탄을 안긴 농민전쟁(1525)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근본적으로는 루터가 가진 이런 신플라톤주의적 이원론 때문인데, 종교개혁과 함께 독일사회의 현실적 문제인 농민들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일원론적 세계관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독일교회가 만약 루터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일원론적 세계관으로 무장하여 나갔다면 히틀러 같은 독재자가 나와도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독일교회가 그 기초가 되는 루터 자체와 그 이원론적 세계관을 처절하게 비판하여 극복하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히틀러를 다시 생산할 수 있는 위험한 국가가 독일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 루터와 농민전쟁(1525)과 연관된 뒤러의 작품 두 점 
 루터는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으며 운동을 시작했지만, 그것은 곧 자연스럽게 그리고 재빠르게 ‘사회의 개혁’으로 발전되었습니다. 농민들이 대다수였던 독일인들이 극소수인 지주,영주,기사들이 가하는 차별과 억압을 고치려는 움직임은 매우 당연하고 응급한 요구였습니다. 루터는 이 운동의 처음에는 이들의 요구가 정당한 것을 인정하였고 이들을 격려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운동이 곧 폭력적으로 변하자 태도를 바꾸어, 개신교와 로마교 영주들이 칼을 빼어서 이들을 향한 성전을 벌일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Thomas Muentzer가 Muenster도시를 중심으로 일으킨 농민들과 이들에 대항하는 지배계급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인 농민전쟁(1525)입니다. 뒤러는 이 전쟁의 폭력성,파괴력을 개신교적 영향을 깊이 받은 자신의 고향인 Nuernberg에서 깊게 경험하였습니다. 그 전쟁이 일어난 해에 예외적 작품으로 만든, 소위‘제2의 대홍수’로 알려진 매우 고통스러운 꿈을 꾸고 난 뒤에 만든 작품이 ‘뒤러의 꿈의 환상’(Duerer's Dream Vision)입니다. 같은 해에 그 전쟁에서 농민에 대해 승리한 교회들이 요구하여 목판화로 제작한 작품이‘전쟁에서 스러진 농민을 기념하는 탑’(Monument to the Vanquished Peasants)입니다.‘뒤러의 꿈의 환상’에서는 그 어떤 형태도 없이 여러 개의 물기둥이 하늘에서 온 세상에 쏟아붓는 모습을 보입니다.‘농민전쟁 기념탑’에서는 승자의 어떤 환호도 들리지 않습니다. 칼을 가진 기사가 승리자처럼 가장 꼭대기에 위치하지만, 얼마나 자신이 없었던지 혹은 부끄럽다는 듯이 잔뜩 웅크린 자세입니다. 그 아래에는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킬 때 사용했던 농기구들과 추수한 곡식들, 그리고 화병과 가정의 화덕들, 그리고 가장 아랫부분에 가축들이 조용히 엎드린 모습이 차례대로 나열되었습니다. 뒤러는 이것을 위탁받아 제작했으나 결코 승자 편에 서서 그들을 기쁘게 만드는 작품을 만들기보다 그 시대의 슬픔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반영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화가로서의 정체성이 확고했기 때문에, 이런 혁명적 현실에 몸을 던지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무기력을 탓하였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결국 종교개혁 운동을 시작하고 진두지휘하는 루터를 비롯한 신학자들의 몫이었습니다. 이들 개신교 신학자들조차도 로마교와 동일하게 근거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적 이원론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근본적인 종교개혁, 더 원초적인 예수의 종교로의 회귀가 없다면, 역사는 결과적으로 동일했을 것입니다.

 3) 뒤러가 형성하려 노력한 일원론적 세계관 
 뒤러는 루터를 매우 존경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많은 영적,신학적,정신적 고민을 루터의 설교와 글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해결했기 때문이었다고 스스로 밝혔습니다. 그래서 그는 루터를 만난다면 이 위대한 독일인(‘뷔텐베르그의 나이팅게일’)의 얼굴을 그려서 영원한 자취를 남기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또 루터가 잡혀갔고 처형당했다는 잘못된 소문을 듣고서 정신이 나갈 정도가 되어 하나님께 기도했으며, 또 주위를 향해서 어떻게 해 보라고 닦달거릴 정도였습니다. 또 두 번이나 판화를 만들어준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를 향해 왜 이럴 때 나서지 않고 로마교와 개신교 사이에서 저울질하느냐고 고함을 쳤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루터(1483~)보다 12년 전에 태어난 뒤러(1471~)였기에, 청년기에 루터의 영향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누구에게도 신학적으로 배우지 않았지만, 그의 생애와 작품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삶의 태도인 일원론적 세계관을 그는 처음부터 가졌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18명이나 낳았으나 단 3명의 자녀만 가지고서도 경건함을 유지한 어머니나, 헝가리에서 이주했지만 아주 성실했던 아버지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을 겁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신학적 세계관 때문이 아니라, 소박하지만 오히려 삶을 통해서 총체적으로 정립한 건강한 평신도적 세계관이었을 것입니다. 종교가 옳다면 모든 삶과 문화에도 그 옳음이 동일하게 퍼져나가야 한다는 소박한 확신 말입니다. 즉 그가 가진 일원론적 세계관이란 그의 종교와 그의 예술이 연속된다, 즉 종교에서 예술이 흘러나온다는 확신입니다. 종교없는 예술을 시도하는 근대의 경우, 그 예술 자체가 종교가 되어버리는 역설은 뒤러적 확신의 정반대편의 진리를 나타내는 셈입니다.

 물론 그도 시대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당대의 일반적인 이태리의 예술적 경향을 따르기도 했습니다. 또 르네상스적 경향을 따라서 그리스-로마의 신화를 차용한 작품을 만들기도 했으며(‘Hercules at the Crossroad’ 1496~1500, ‘Apollo and Diana’ 1501~06), 로마교의 영향을 따라서 로마교적 교리인 성모숭배를 작품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성모의 승천과 대관식’ 1508~9 Frankfurt). 심지어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된 이후에도 로마교적 동판화 한편을 만들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선명하지 않습니다(‘Madonna Crowned by an Angel’ 1520).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의 그의 작품은 다시는 로마교의 교리를 나타내는 것이나 그리스-로마신화를 다루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이 한 작품만 예외적입니다. 
 먼저 그는 가정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돈에 아주 민감하였고 일기에도 꼼꼼하게 지출 항목을 적어나갔을 정도입니다. 그는 선임인 막시밀리안의 선택을 받아 궁중화가로 연금을 받았습니다. 황제가 죽자(1519) 후임 황제로부터 연금이 보장되지 못할 것을 염려해 로마교 편에 확고하게 서 있는 새 황제의 대관식이 열리는 아흔Aachen과 네덜란드로 아내와 여종을 데리고 떠나는 긴 여정(1520~21)을 시도하였습니다. 루터의 편에서 보면 뒤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제도적으로도 로마교를 떠나 자기편에 확실하게 건너와서 종교개혁의 깃발을 널리 펼치는데 화가의 재능을 쓸 것을 기대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평신도인 뒤러의 입장에서는 재정적 문제라는 기본적인 고민 외에도, 루터의 종교개혁과 그 결과에 대해 2차적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 쉽사리 행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4) 종교와 예술의 연속성에 대한 2차적 고민과 무해결로 마무리되는 뒤러의 생애 
 종교와 예술의 연속성에 대한 2차적 고민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된 이후에 발생하는 두 가지 점 때문이었습니다.
 첫째, 종교와 예술에 대한 아주 근원적이며 오래된 문제로, 십계명 중에서 제2계명과 시각예술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나? 하는 겁니다. 제2계명은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라, 즉 우상숭배 하지 말라는 것인데, 종교를 예술로 표현하는 일은 사실 신성을 눈에 보이게 시각화하기에, 제2계명을 어기기 쉬운‘위험한 작업’입니다. 그런데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종교를 가르치는 일이 어렵기에 종교화를 교육용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제는 종교화가 그들에게 일종의 우상으로 변질되기가 매우 쉬웠습니다. 그래서 8세기 교회는 이를 두고 성상 파괴에 대한 극단적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런 것이 중세기 동안 잠잠하다가 본격적 종교개혁이 시작되자, 성상이나 성화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가 필연적으로 다시 대두되었습니다. 뒤러가 이 문제를 예민하게 자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신의 예술적 사명을 이루는 데 가장 근본적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정작 종교개혁이 시작되자 ‘교리의 개혁’과 함께 ‘예배의 개혁’이 시작되고 그 일부로서 교회당 내부에 넘쳐나는 시각적으로 화려한 성물들을 처리하려는 ‘성상파괴운동’이 고대교회에서처럼 벌어졌습니다. 종교적 진리는 매우 섬세하고 치밀하게 일상에 적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종교적 열정의 불만 붙인다면 주위의 모든 복잡하고 풍성한 종교적 결과물들이 타버릴 수 있다는 점을 뒤러는 염려하였습니다. 한편에서는 종교개혁이 인간 삶의 모든 면에서 진행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깊은 생각이나 준비가 없는 가운데, 모든 것을 단순화시켜서 결론을 내고 행동으로 돌입하여 인간 삶과 문화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었던 겁니다. 또 뒤러 자신도 물론 예술활동에서 그동안 받았던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가져온 모든 그리스-로마적 신화를 버릴 것이며, 또 로마교적 주제를 버릴 것임이 분명했으며, 나머지 10년의 삶도 실제 그렇게 진행되어서, 주로 인물화 제작이나 예술에 대한 방대한 교과서 세 종류를 만드는 일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흑백으로 결론을 낼 수 없고 매우 섬세하고 치밀한 점이 문화적 삶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데, 이 혁명과 폭력이 난무하는 시기에 이것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점이 그의 근본적 고민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루터를 매우 존경해 많은 작품들을 선물로 보내었지만, 루터 편에서는 그의 이원론적 경향 때문에 종교와 예술의 연관성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았고 또 그의 신학으로는 감당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가 뒤러를 생각한 것은, 종교개혁의 편에 서서 그 교리를 시각화하는 일에 그가 앞장 서주기를 기대할 정도였지, 세기를 뛰어넘는 위대한 기독교 예술가로는 아니었다는 것이 나중에 뒤러 사후에 루터가 남긴 비망록(obituary)에서 드러났습니다. 뒤러가 에라스무스를 두 번이나 만났던 것에 비하면, 루터는 한 번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루터 편에서의 종교와 예술에 대한 무지 때문이기도 했지만, 뒤러 편에서 진정으로 이해받지 못할 것에 대한 염려로 적극적으로 찾아가지 않았을 겁니다.  

 둘째, 봉했던 문이 막 열리면서 전개된 종교개혁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즉 로마교황의 권위를 부인한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기 위한 절대적 권위를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먼저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라고 선언했지만, 바로 이어지는 질문은 어떤 성경 해석이 옳은가? 하는 겁니다. 이 문제 때문에 발생했던, 뒤러의 후반부 생애와 그의 사후(1528)까지 이어졌던 두 사건이 있습니다. 첫째, 앞에서 언급한 독일의 농민전쟁(1525)이며, 둘째, 두 위대한 종교개혁가인 루터와 즈빙글리 사이에서 일어나 결국 종교개혁이 둘로 쪼개어지게 된 마르부르그 논쟁(Marburg Coloquay 1529)입니다. ‘전자’는 종교적 진리를 어떻게 사회적 삶에 적용하여 일체화할 것인가에 대한 해석문제1입니다. 루터는 로마교에 순교를 각오하고 개혁을 외친 것과 마찬가지로, 급진적인 천년왕국운동으로 변질된 농민운동을 직접 대화하면서 다루려고 하지 않았고, 그들을 개신교와 심지어 로마교의 군주들의 칼로 다스리도록 호소했습니다.‘후자’는 중세기에 있었던 실재론-명목론 논쟁의 연속으로 루터는 성찬에서 예수의 피와 살이 실재적으로 임재한다는 편이었다면, 즈빙글리는 그것은 단지 이름일 뿐인, 즉 상징적 행위일 뿐이라는 명백한 해석의 차이를 보이는 해석문제2였습니다. 
이렇게 뒤러의 종교와 예술에 대한 2차적 고민은, 행복할 것만 같게 출발한 종교개혁이 역사의 새로운 현실 앞에서 매우 암담하게 전개되는 고통스러운 현실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뒤러의 최후반부의 생애는 예술의 본질과 원리적인 저술에 몰입하는 것이었으니 실제예술행위 자체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문제들은 혼자서 혹은 이 시기에만 해결할 수는 없었고, 그 이후 각 시대의 종교와 문화가 반드시 바르게 고민하고 가장 밝게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영속적인 문제였습니다. 이것이 종교와 예술의 일치에 대한 뒤러의 파생적 2차적 고민이었다면, 그가 먼저 고민하고 해결했던 종교와 예술의 근원적 1차적 고민이라는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루터의 도움으로 이 1차적 고민을 해결했기에, 비록 그의 생애의 후반부이지만 깊은 종교성과 탁월한 예술성이 일치하는 삶을 사는 그의 이상이 어느 정도 실현되었습니다.   

 5) 종교와 예술의 연속성에 대한 1차적 고민과 그 해결 뒤에 열린 뒤러의 새로운 예술세계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에도 유럽에는 종교개혁적 기운이 늘 있었지만, 루터가 다른 개혁가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집중해서 해결하기 원한 것은, 윤리,예배,교회정치,면죄부에서의 부패와 타락 같은, 눈에 드러나는 종교 현상이 아니라, 그런 것이 일어나게 만드는 근본원인입니다. 즉 모든 부패의 원인은 근본교리인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어떻게 시작되는가가 명백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교는 인간의 능동적 행위(‘능동적 의’, 헌금,기도,봉사)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수동적 은혜(‘수동적 의’)가 순서가 정해지지 않은 채 뒤섞였기 때문에, 모든 타락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루터에게는 인간은 1차적으로 그 어떤 공로도 없이 오직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은혜를 수동적으로 값없이 인간이 절대의탁으로 받아들이는 길(justification by faith alone)에서 출발해야 하는 겁니다(‘수동적으로 받는 의’). 이 수동성 때문에 ‘오직 은혜로’(Sola Gratia)라는 슬로건이 가능했습니다. 만약 어떤 인간이 하나님의 공짜로 주시는 은혜를 통해 ‘수동적 의’를 확실히 얻는다면, 그 이후의 삶은 이런 은혜에 보답하는 삶이 될 것이고 그런 삶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서 올려드리는 ‘능동적 의’가 되는 셈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행하는 ‘능동적 의’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로서 이루는 것일 뿐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로마교의 모든 부패와 타락이 척결될 원리,기초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뒤러에게는 루터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받는 ‘수동적 의’의 우선성과, 그 이후에 그런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인간의 행위인 ‘능동적 의’의 후속성은 정말 정교하고도 분명한 해결책이 되었을 겁니다. 이 해결은 단지 그의 개인적,영적 차원에서의 해결일 뿐 아니라, 그가 평생 동안 간직한 종교와 예술의 연속성에 대한 근본적 고민을 해결해 주었을 것입니다. 평신도인 뒤러는 12년 후배인 루터가 신학적으로 머리 싸매며 투쟁할 이 문제를 진즉에 자신의 삶 자체에서 고민하던 것으로, 루터가 해결책을 제시했을 때 즉각 이해할 수 있었고 바로 자기에게 적용해서 극단적 해방감을 맛보았던 것입니다. 결혼하기 전에 아내 될 사람에게 보낸‘자화상-2’(1493 Louvre)에서 보인‘예술가로서의 사명이 별에 새겨진 것 같다’는 엄청난 확신과 함께,‘자화상-4’(1500)에서 보인 예수 닮은 종교적 존재로 예술적 창조자로서의 자기정체성이, 이제부터 다시는 뒤죽박죽 혼돈되지 않고 말끔하게 정리될 수 있었습니다. 죽음에 임박한 63세 어머니의 초상화(Berlin)를 그리면서 죽음이 무서운가를 물었을 때, 죽는 경험 자체는 무섭지만, 그 분 앞에 서는 것은 무섭지 않다고 대답한 경건한 어머니의 종교적 확신은, 뒤러의 삶의 근본도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가운데 예술의 영역에서 창조자로 활동하는 자아정체성은, 이제 다시는 구원을 이루기 위한 부담이 아니라,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와 보답으로 왕성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1517)되기 직전에 뒤러가 만든 네 작품은, 바로 그가 가졌던 근원적이며 1차적 고민을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모두 종교개혁 직전인 1514년과 1516년에 제작되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시기와 뒤러의 작품들의 시기가 어떻게 이렇게 정교하게 맞아떨어질까를 역사적으로 발견한 일은 정말 소름이 돋을 일입니다. 이 네 작품에서 묘사한 경험의 세계는 사실 뒤러가 루터와 동일하게 경험한 셈입니다(Marcel Brion [Duerer His Life and Work] 1960).  

▲ Durer Melancolia I - 동판화 (1514)

첫째, ‘멜랑꼬리아 I’(Melancolia I)입니다(동판화 1514). 뒤러 생애에서 독일과 유학한 이태리뿐 아니라 전유럽에서 유명하게 된 그였지만, 무언가 근본적인 우울에 빠질 수밖에 없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였습니다. 이 판화도 일종의 뒤러의 간접자화상인 셈입니다. 루터 역시 극단적 무기력과 우울함을 호소하여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장과의 많은 대화를 했습니다.

▲ Durer Despair (1516)


 둘째, 이 감정에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서 뒤러가 빠졌던 ‘절망’(Despair)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1516).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었지만 자기는 살아남은 것에 대한 극단적인 공포와 절망감에 빠졌던 루터의 모습도 연상됩니다. 
 셋째, 성경연구하는 성 제롬(St. Jerome in his Study)입니다(동판화 1514). 
성경을 차분하게 공부하고 있는 제롬의 모습은. 시편과 로마서를 철저하게 연구하면서 큰 확신을 얻은 후에 설교하는 루터의 모습을 연상하게 만듭니다. 거기에는 사자와 같은 맹수도 얌전히 침묵을 지키면서, 고귀한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넷째, ‘기사,죽음,마귀’(Knight,Death, and the Devil)입니다(동판화 1513~4). 
영적, 정신적 압박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분연하게 일어나서 싸우러 나가는 모습은, 뒤러나 루터나 동일한 일상이었을 겁니다. 유배된 것 같이 성안에서만 살면서 성경을 독일어로 꾸준히 번역하는 중에 상상 속에서 자신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마귀를 향해 벽에 잉크병을 던진 루터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segensong@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65>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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