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보내며
아내를 보내며
옆자리가 허전하여 아내를 확인할 량으로 오른손을 뻗었는데 아내가 없었다. 머리를 들어보니 아내가 침대 끝에 걸터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색씨! 위험하게 뭐하는 거야. 화장실 가려면 꼭 나를 깨우라고 그랬잖아!”… 대답이 없었다. 이렇게 올해 5월 27일 토요일 이른 아침 6시 30분에 아내가 죽어있는 것을 본 것이다.“이건 아니잖아~!!!…” 나는 절규했다. 살려보겠다고 코에 기운을 불어 넣어보기도 하고 몸으로 할 수 있는 별의별 몸동작으로 아내를 어루만졌다. 나는 그야말로 지랄발광 상태가 되어 눈앞이 캄캄해지고 말았다.
그 사람‘이성표’
한국 나이로 겨우 육십을 채우고 간 아내 이성표는 1964년 말미에 태어났다. 평택에 사시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맏손녀가 너무 귀엽다고 두 살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맡아 기르셨다. 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셔서 결국 할머니가 혼자 도맡아 키우셨다. 할머니가 엄마 역할을 대신한 것이다. 단편소설《소나기》를 쓴 황순원을 존경하여 그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경희대 국문학과에 들어갔다.(실력으로는 서울대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연탄가스를 맡은 바람에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어서 점수가 낮게 나와 경희대에 들어갔다는 말을 들었더랬는데, 창피하니 남들에게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더랬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도 구구단을 못 외워서 쩔쩔맸던 소녀 이성표는 이렇게 지독시런 노력파였다.
대학교 다닐 때부터 안양에 사시는 부모님과 네 명의 동생들과 함께 살 수 있게 되었지만 종교 문제에 부닥치며 어둡게 살아야 했다. 대학을 졸업하니 취직이 어려웠다. 다름 아닌 꿈 많던 문학소녀가 “그까짓꺼~” 하면서 2급 교직 이수과목을 무시했던 결과를 맛본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1987년 어느 날, 나중에 자신의 남편이 될 노익호를 만나게 된 것이다. 안양의 청원상가 2층에 있는 사무실로 이성표가 찾아왔다. 공문수학으로 유명세를 떨칠 시절에 아류로 만들어진 ‘하나수학연구회’에서 교재연구개발을 주로 하며 재밌게 일하고 있을 때였다. 신입사원 모집기간이 아니니 뽑을 수 없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절박감이 보여 입사 시험을 보게 했다. 산수·수학의 기본실력을 보는 것이지만 고득점 맞기는 어려운 시험이었는데 90점쯤 되는 점수가 나왔다. 사장님한테 간언했더니 임시교사직을 허락해줘서 같이 근무하게 되었다. 나와는 딱 3개월간 같이 일했지만 꿈 많던 문학소녀에게 자유로운 영혼으로 보인 노익호가 자신이 기댈 큰 나무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음악 공부를 하겠다고 회사를 뛰쳐나갔기 때문에 이성표는 울상이 되고 말았다.
연애를 8개월간 하면서
무직 상태인 나는 정식직원이 된 이성표와 연애를 했다. 키가 작은 나였지만 힘은 장사라고 믿고 살았기에 작은 도랑을 건널 때 멋지게 보일량으로 이성표를 번쩍 들었지만 의외로 무거워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멋쩍어 웃고 이성표는 창피해서 웃었다. 절대로 이성표하고는 결혼을 안할거라고 다짐했던 내가 이 실없는 사건으로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결혼을 하고 나니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 싶어 다시 학습지 회사에 입사해 결혼을 했지만 회사를 퇴사한 이성표는 불안해했다. 어느 날 다섯 권의 책을 사 왔다. 내 봉급 가지고는 안되겠다면서 공무원 시험을 보겠다고 했다. 나는 가장의 권위를 갖고 싶어 어렵지만 이성표가 원하는 만큼 절약하면서 살겠다고 맹세했다. 임산부 이성표는 짬짬이 병아리 인형에 눈을 다는 허드렛일이라든가 봉제 인형들의 마지막 마무리를 하면서 푼돈 벌기를 마다하지 않았다.(세 들어 살던 안양비산주공아파트의 방바닥 하나 가득 채워진 노란색의 병아리 인형을 보았을 때의 감흥은 아직도 뭉클하구나…ㅠㅠ) 나중에는 뭐라도 될까 싶어 타자기를 사고 타이핑 연습을 죽도록 했다. 산수·수학교재를 만들 때 숫자 따위를 일일이 잘라 붙여야 하는 일로도 용돈벌이를 지독시럽게 했다. 그랬다… 아내 이성표는 쉬지 않고 일했다.
어떻게 그녀를 다 설명할 수 있으리요…
그녀는 날 독일 유학까지 보냈다. 결과는 실패 비슷했지만 이에 연연치 않고 칠레로 이민을 가면서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실력 발휘를 하기 시작했다. 결국은 무에서 유를 일구며 아파트와 집을 사기에 이르렀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암에 걸렸고 결국은 깊은 잠에 들고 말았다.
아내와 사별한지 48일째 되는 오늘
아내는 나에게 어떻게 살면 되는지 가르쳐 주고 떠났다. 아내가 설마 죽을 줄 몰랐던 나는 황망했지만 돌이켜 보니 그녀는 이미 죽을 준비를 다 끝냈던 것이었다. 그녀의 빈자리는 날이 갈수록 허전함과 슬픔으로 나를 찌르지만 굵고 짧게, 감정에 몹시 충실하게 살았던 그녀가 존경스럽고 그리움에 사무치누나. 내 빵꾸 난 양말은 사정없이 버리지만 자기의 빵꾸 난 양말은 기워 신었던 천상 또순이 이성표. 그녀가 몹시도 보고 싶고 그리워 두 시간을 걸었다.
“이성표 사랑한다!”, “존경한다 이성표!”, “미안하다! 이성표~ㅠㅠ”. 고개를 들어 허공에 외치며 울었다. 일을 억척 같이 하면서도 성경 말씀을 읽고 기록한 노트가 다섯 권이 발견되었다. 기뻤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 힌트를 남겨준 것이다. 일기도 이틀 전에 발견했다. 어제였다. 한 구절을 읽으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2022년 7월 1일
‘... 오늘 하나님의 임재가 달콤했다. 남편 노익호를 만나 그와 결혼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었다. 그때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망가졌을 거다. 결혼생활 기간 동안 내가 고난이라 생각했던 일들은 고난이 아니라 나를 주께로 부르시는 calling이었다. ...’
칠레에서 노익호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66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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