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호(제112호)

앞에는 절벽! 뒤에는 양떼! 절박함을 가슴에 품은 젊은 피아니스트 ‘제이슨 배’를 만나다!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9. 3. 18. 22:32

[편집장 김미경이 만난사람]



앞에는 절벽! 뒤에는 양떼! 
절박함을 가슴에 품은
젊은 피아니스트 ‘제이슨 배’를 만나다!






   학 력 


 2013  뉴질랜드 오클랜드대학교 음대 피아노전공  학사 수석졸업

 2015  영국 왕립음악원 (Royal Academy of Music) 피아노전공 석사, DipRAM수여, 차석졸업


   경 력 


  * 연주

 2008  만16세 제이슨 배 뉴욕 카네기홀 와일 리사이틀홀 데뷔 피아노독주회

 2011  유럽연합 EU 집행위원장, 조제 마누엘 바호주(Jose Manuel Barosso) 위한 특별독주회

 2016  공식 스타인웨이 아티스트로 임명

 2017  제이슨 배 피아노 독주회-Pianists of the World Series; 영국 런던 St. Martin-in-the-Fields

 2018  영국 왕실 HRH Duchess of Sussex, 서식 스 공작부인 메건 위해 특별 독주회 영국 런던 왕립 미술관


   지휘

 2016  영국 런던 GOOD.ENSEMBLE 오케스트라  지휘

 2017  핀란드 쿠오피오 심포니, 바사 심포니 오케스트라지휘 

 2018  스웨덴 오로라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





음악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이 아이에게 뭔가 있다’ 


 피아노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면서부터 입니다. 뉴질랜드에서도 완전 시골로 가서 동양인은 우리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바이올린도 배웠는데 마침 바이올린을 만드시는 할아버지께서 이웃에 살아 어머니가 간곡히 부탁을 드려 바이올린을 계속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더 집중적인 교육이 필요하여 여기저기 알아보니 오클랜드대학교에서 유스(Youth)들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오디션을 보기 위해 준비를 하며 피아노와 바이올린 둘 다 다룰 수 있었던 저는 두 군데 오디션에 나갔고 엄청 떨었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솔로가 아닌, 앙상블에 합격을 해서 어렸을 때부터 혼자 하는 것이 아닌 같이하는 음악으로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지금에 와서 보면 그때의 경험이 큰 재산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피아노와 더 가까워 질 무렵 피아노부분 오디션을 맡았던 뉴질랜드 선생님에게 직접 피아노를 배울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평가하기를 “기교는 부족하지만, 이 아이에게는 뭔가가 있다. 음악적인 부분을 가르치면 스펀지처럼 빨아들인다”고 하셨습니다. 1년 동안 꾸준히 레슨을 받으며 지역, 종목별 대회 등 나가게 되었는데 그 때마다 1등을 했습니다. 뉴질랜드에서도 갑자기 동양인 아이가 툭 튀어나와 매번 1등을 하니 ‘이게 뭐지’했겠죠. 일찍부터 관심을 받으면서 조금씩 더 큰 목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승을 하면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할 기회가 주어지는 큰 대회에서 우승을 하여 12살에 정식데뷔, 13살에 오클랜드시향과 최연소로 연주를 했습니다. 무엇보다 음악을 하면서 연습한 만큼 결과가 나온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습니다. 하지만, 뉴질랜드 생활에 만족을 못했습니다. 어리기는 했지만, 이민자에 대한 차별로 힘들었고, 제 눈은 항상 유럽에 가 있었습니다.



뉴질랜드에서의 생활


 솔직히 굉장히 힘든 학창시기를 겪어서 좋았던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감사한 것은 제 피아노 스승을 만나고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12년을 어머니보다 더 자주 보며 저를 가르치셨던 ‘라에 드 리슬’(Rae de Lisle)선생님과 사춘기를 좌충우돌 하며 보내는 저를 바로 세워주신 선생님의 남편 ‘빌 멕카시’(Bill McCarthy)를 만났다는 것은 제 인생에 큰 행운이었습니다. 이분들에게 사람과 인간성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다. 아버지가 없었던 저에게 선생님의 남편 분은 아버지와 같은 분이셨죠. 저에게 항상 롤 모델이셨습니다. 뉴질랜드는 제게 음악인이 되기 전에 인간성을 가르쳐준 나라입니다. 

 뉴질랜드하면 보통 사람들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떠올릴 것입니다. 하지만 제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은 앞에는 절벽, 뒤에는 양떼뿐인 삭막함입니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홀로 절박함을 가지고 피아노를 쳤습니다. 이게 저를 정신적으로 많이 성장하게 해준 것 같아요. 



첫 번째 터닝 포인트, ‘예일대 4년 장학금 포기’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인 첫 시기가 17살에 있었던 큰 대회에서였습니다. 제가 2등을 했는데 그 대회의 심사위원 중에 현 예일대 교수이자 학장인 ‘보리스 버만’(Boris Berman)이 계셨어요. 그분이 저에게 4년 장학금을 줄 테니 오라 했습니다. 보통 예일대에서 장학금을 준다고 하면 가게 되지요. 하지만, 저를 12년 동안 가르친 선생님께서 제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저에게 “가지 마라”라고 하신 선생님의 말에 예일대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레슨비를 못내는 상황에서 저를 가르쳐주셨기 때문에 선생님 말씀을 듣는 것이 보답이라고 생각했고, 선생님에 대한 충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LA에 있는 대학 (Colburn School of Music)에서도 콜이 왔었지만 못 간다고 했습니다. 만약에 예일대나 LA에 있는 대학을 갔었다면 저의 삶이 달라졌겠죠. 저는 뉴질랜드 오클랜드대학에 진학했는데 이런 저의 성격으로 결정을 내린 게 아닌가 합니다. 



두 번째 터닝 포인트, 영국왕립음악원 (Royal Academy of Music)에 입학 


 선생님의 발걸음을 따라가고 싶었습니다. 선생님은 영국에서 공부하셨고, 저는 선생님의 스승인 ‘크리스토퍼 앨튼’(Christopher Elton)이라는 분에게 오디션을 보고 합격해 영국왕립음악원 (Royal Academy of Music)에서 석사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뉴질랜드에서 살다가 영국으로 가게 된 것이 저에게는 두 번째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영국에 적응하기까지 꼬박 1년 반이 걸렸습니다. 뉴질랜드 촌놈이 대도시의 삶에 적응하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경쟁이 심하고, 살벌하고, 비인간적인 것 같고 무엇보다 뉴질랜드와는 다른 스케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왜? 여기 앉아 있나’하며 작아지고 우울한 시간을 버텨 내는 동안 제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언제든 뉴질랜드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지만 ‘끝까지 버텨보자’,‘포기하지 말자’는 생각을 항상 하며 졸업까지 마쳤던 것 같아요.(웃음) 영국에서는 뉴질랜드 출신이면 2년을 지낼 수 있는 혜택이 있어 4년간 머물다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유학의 힘듦에 버금갔던 정체성에 대한 고민


 태어난 곳에 오래 머물며 살게 되면 솔직히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난 한국인이고, 무엇을 전공했고, 무슨 일을 하고 이것은 겉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유학이나, 또는 어떤 상황이 되었든, 자신이 생각하지 않은 여러 곳에 가봐야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그전까지 나는 이런 사람이고, 나는 이런 스타일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자신을 정말 알고 싶으면 자신에게 주어진 울타리 밖에 나가봐야 합니다. 저는 겉모습은 한국 사람인데 속은 뉴질랜드인으로 영국에서 유학하고, 연주활동을 위해 해외에 다니다 보니 개인적인 생각, 감정들을 어떤 권위자 앞에서도 존경심을 갖되 솔직하게 표현합니다. 이런 저를 한국 사람들은 오해합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돈을 어떻게 벌 것인지에 관심이 없고, 안정된 삶과 더 좋은 지위를 추구하지 않는 저를 무모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원하는 꿈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달려온 저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저는 특이하지도 않고, 단지 제 겉모습이 한국인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지는 1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거의 30년이나 걸린 거죠. 하지만, 지금은 온 지구가 더욱 가깝고 하나가 되어가면서 저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세계시민’이라는 정체성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한국 밖으로 나갈 때는 의지도 필요하지만, 겁도 없어야 합니다.(웃음)

 


연주자로서의 롤 모델


 너무 많습니다. 한 사람이라고 절대 말 못합니다.(웃음) 다 이야기 할 수도 없지만, 굳이 이야기 하지 않은 이유는 우상화 되는 것이 싫습니다. 저는 연주자들은 ‘메신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연주자들이 스타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연주자가 스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스타화해야 하는 거죠. 즉 연주자보다 작품을 내세우고 싶습니다. 작곡가로서의 롤 모델도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라흐마니호프’를 아주 어렸을 때부터 쉽게 이해했어요. 선생님의 해석 없이도 음악을 들으면 제 스스로 작곡가가 어떤 것을 이야기 하는지 알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10대인 저에게 선생님이 물어본 적도 있었습니다. 러시아 작곡가들인 라흐마니호프 뿐 아니라 프로코피에프, 쇼스타코비치. 무소르그스키 등이 저에게는 너무나 쉽게 다가왔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글쎄요.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유는 잘 알 수 없지만 러시아 작곡가들에 대한 해석을 제 안에서 폭넓게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이슨 배’하면 ‘러시아’라고 이야기를 하곤 했었지요. 하지만 아쉽게도 한 번도 러시아에 가서 연주를 한 적이 없어 언젠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서 연주를 꼭 하고 싶습니다. 영국 유학시절, 러시아 친구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고 그들과 소통하면서 러시아 문화와 그들의 철학에 대한 고민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연주자로서 자세


 저는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연구를 많이 합니다. 예를 들어 라흐마니호프를 연주한다면 러시아와 작곡가의 인생에 대해 연구합니다. 그냥 느낌대로 연주한 적이 없습니다. 그 시대, 배경, 역사, 그 나라의 문화를 완전히 공부한 다음, 작곡가의 작품을 보고 내 안에서 자기화 된 해석으로 연주를 합니다. 이런 것 없이 한다면 AI연주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음악뿐 아니라 모든 아트는 정말 엄청난 힘이 있구나 하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더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저의 인생 스토리가 있듯이 작품들의 스토리도 있습니다. 작품 안에서 영감을 받아 연주하게 될 때 관객들에게도 전달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음악은 너무나 솔직합니다.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진정성 있는 연주를 들으면 ‘아~ 이 사람은 정말 음악 하는 사람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음악으로 장난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음악이 제 인생을 바꿨기 때문에 내 인생을 바꿨다면 다른 사람의 인생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하는 연주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자존심이 제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더 진지하게 하고 싶습니다. 더 잘하고 싶고요. 



연주여행을 하며 그 나라의 살아있는 작곡가의 곡을 연주하는 이유


 베토벤이 250년 이상 연주되는 이유는 작곡의 완성도와 사람들에게 어필될 수 있는 요소가 있었고, 또 베토벤의 작품을 계속적으로 연주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들이 했던 것처럼 똑같은 작곡가의 연주가 아닌, 최신의 곡들을 연주하고 싶습니다. 시대에 맞춰 가고 싶다고 할까요? 전통을 굉장히 존중하지만, 제가 거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배우고, 자유롭게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겁니다. 안전하게 머무는 것이 아니고요. 그래서 어딜 가더라도 어떤 작곡가가 있을까 항상 궁금해 하고 매 연주 때마다 프로그램이 바뀝니다. 

 아무리 훌륭한 작곡가의 작품이 있어도 작품들을 프리젠테이션 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결국 2D에 머물고 맙니다. 저는 연주자로서 2D의 작곡들을 3D, 더 나아가 4D까지 만들어내지 못하면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제 일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편으로 살아있는 작곡가들의 곡을 연주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같은 청년으로서 한국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


 감히 제가 한국청년들에게 뭐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청년들이 대단하고 존경스러워요. 한국에 있다 보니 십대부터 정말 힘들게 살면서 청년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시스템에 눌리지 말고 자기가 가진 각각의 생각을 펼치고 실험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의지를 가지고 실천하는 용기가 있었으면 합니다. 외국인들이 똑똑해서 잘 되는 것이 아니라 공적이든, 사적이든 어떤 상황에 부딪히게 될 때 그들만의 개개인의 생각들을 가지고 싸우는 거예요. 우리나라는 그들에 비해 이런 부분이 너무 약한 것 같습니다. 제가 마음으로 하는 격려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싸워라’라는 겁니다. 감정적으로, 합리적인 근거 없이 싸우라는 것이 아니라 어른 된 청년으로서 자신의 말, 행동에 분명한 책임을 가지고 말입니다.



앞으로의 계획


 제가 가진 철학이나 음악적인 부분을 최대한 많이 쓰고 나눌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 제 스스로의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연주로는 2월에 캐나다 데뷔공연이 있고 지금은 피아니스트로 있지만, 저의 최종 목표는 지휘자입니다. 유럽과 미국에서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직접 하기도 했었습니다. 지휘자는 음악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리더십이 있어야 합니다. 다툼이 없고 부드럽게 이끌어 가는 리더십을 배우고 싶습니다.





 제이슨 배는 평소에 음악분야와 상관없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도리어 이런 분들과 대화를 할 때 음악에 대한 더 솔직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전형적인 한국인의 눈으로 본다면 분명 제이슨 배는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뚜렷이 달랐습니다. 젊은 피아니스트이지만, 음악의 본질에 대해 꿰뚫어보고자 노력하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습에서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왜 이렇게 힘들게 사냐”고 말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자기의 확신과 믿음이 이 젊은 피아니스트를 더 돋보이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12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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