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호(제112호)

기억한다, 고로 존재한다?!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9. 3. 28. 12:19

[뇌과학 스토리 11]

 

기억한다, 고로 존재한다?!

2019. 1월호 사이언스지에 실린 뉴런 사진

뇌과학에서 기억은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인간 존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그 사람이 누구냐라는 정체성과도 연결될 뿐 아니라, 그 삶의 의미와도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지난 뇌과학 칼럼들에서는 기억과 관련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함께 고민해 보아야 할 부분들을 다루어 보았습니다. 먼저, 기억상실이 정체성과 연결될 만큼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68호), 우리의 의식적인 결정을 뒤집는 뇌의 무의식적인 결정을 다루면서 나란 존재가 그저 뇌에 불가한지 아닌지에 대해(70호), 이미 내 몸에서 없어진 부위를 뇌가 가진 이전의 잘못된 기억 때문에 생기는 ‘환상지통’의 문제를 다루면서 본능과 감각에만 충실한 삶의 결말이 어떠할지에 대해(87호), 그리고, 미래에 영화에서처럼 내 기억이 조작될 때의 문제를 다루면서 인간은 기억에 집착하지만, 그 인간을 정의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96호) 다루어 보았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이런 기억의 실제가 무엇인지와 우리가 하는 기억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기억의 물리적 실제


여러분, 기억이 어디에 저장되는지 아시나요? 에이~ 당연할 걸 왜 물어봐! 라고 하시겠죠. 맞습니다. 뇌에 저장됩니다. 그동안 단기기억, 장기기억, 절차기억, 서술기억, 파페츠 회로 등 기억과 관련된 다양한 동작 메커니즘과 이와 관련된 개념은 많은 연구를 통해서 밝혀졌지만, 실제 기억이 물리적으로 뇌의 어디에 저장되는지는 아주 최근에 밝혀졌답니다. 그것도 한국의 과학자(서울대 생명과학부 강봉균 교수)에 의해서 말이죠. 뇌에는 1000억개 정도의 뉴런(뇌신경세포)이 존재합니다. 이런 뉴런은 뇌가 몸 전체를 통제하고, 다양한 일을 하기 위해 뉴런간에 엄청 복잡하게 연결되어 신호를 주고받습니다. 이런 뉴런과 뉴런이 연결되는 곳을 시냅스라고 하며, 우리 뇌 속에는 수십에서 수백조개가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기억은 바로 이 시냅스에 저장됩니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와 저장될 때 시냅스는 커지게 되는데, 상대적으로 커진 시냅스는 기억이 더 강렬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월이 흘러 기억이 희미해지면 시냅스의 크기도 줄어듭니다. 강 교수는 자신의 연구를 통해서 얻은 결론으로‘기억의 본질은 추상적인 게 아니라 뇌에서 일어나는 전기화학적 작용’이라 말합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자신의 경험을 강하게 의지하기 때문에 발상의 전환이나 태도의 변화를 새롭게 만들기가 쉽지 않습니다. 새로운 변화를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격한 저항을 하곤 합니다. 제 멘토께서 가끔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의 말씀을 저에게 하십니다. ‘40대는 40%, 50대는 20%, 60대는 0%!’이게 뭐냐고요? 나이별 변화가능성이랍니다. 즉, 각고의 노력과 종교성과 관련되는 자신을 부인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 한 사람이 바뀌는 것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거의 불가능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안정적인 과거의 경험을 반복적으로 추구하려는 성향 때문에 당연 그 경험과 관련된 기억이 더 강화되겠지요. 뇌과학적인 관점과 결을 같이한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가끔 인생 후반부를 사는 종교지도자들조차도 자신의 사역을 돌이켜보며 ‘인간은 안바뀌더라'라는 말을 넋두리처럼 하곤 합니다.
한편, 강 교수는 고통스런 기억을 경험한 경우, 이때 생성된 시냅스는 쉽게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커진다는 사실을 쥐 실험을 통해서 발견했습니다. 이는 생존본능과 직결되기 때문이며, 우리가 슬프고, 괴롭고, 수치스럽고, 불쾌한 일을 행복했던 사건보다 잘 기억하는 이유도 이와 관련된다고 합니다. 고통스런 사건을 경험한 후,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를 경험하는 것도 이것과 관계되겠지요. 이런 고통스런 기억도 조작할 수 있는 기술이 최근 연구되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잠자고 있는 쥐의 기억을 조작하는 기술을 개발하였고, 머지않아 개인의 기억을 조작하는 게 가능할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말합니다. 

 ‘영화에서처럼 기억을 조작할 수 있다니? 무시무시한 세상이 도래하겠군’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사실 무시무시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임을 뇌과학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학적인 첨단기술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태어나면서부터 기억을 조작하는 능력을 타고났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경험하지도 않은 사실을 마치 경험한 것처럼 얘기하는 모습에서도 알 수 있고요. 물론 아이 때는 머리속에서 만들어낸 생각(상상)과 기억을 구분하지 못해서 그런 경우가 가능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흔히들 다른 사람과 함께 경험한 사건에 대해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을거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연인이나 부부가 사소한 기억을 가지고 싸우는 이유도 이런 착각 때문입니다. 
뇌는 감각을 통해서 경험한 사건을 순전히 자기 주관적으로 해석해서 중요한 부분만 재구성해서 저장합니다. 즉, 같은 사건을 경험하여도 각 사람이 느끼는 중요성과 그 사건이 주는 의미나 느끼는 강도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형태로 재구성하여 저장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반면, 어떤 사람은 생존의 위협에 버금가는 중요성으로 기억하기도 하지요. 다시 말하면 각자의 방식으로 감정과 의미를 부여해서 저장하기 때문에 ‘기억은 상대적이다’라고도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범죄현장에서 인상착의나 그 때의 상황을 사진 찍듯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기억이 시간이 흘러도 변함이 없으면 다행이지만, 우리는 뇌 속에서 기억을 넣었다 뺏다 하면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스스로 왜곡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잘 모르죠. 아니 대부분 인정하려하지 않습니다. 지난 글(70호)에서 뇌가 얼마나 자기 합리화의 도사인지 뇌과학의 여러 사례를 통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뇌의 이런 합리화 특성 때문에 아마도 사람이 사는 사회 속에 아주 일찍부터 계약문화가 등장한 것도 이런 이유겠지요.

기억의 되물림


프랑스 사회학자인 모리스 알박스(Maurice Hal-bwachs)는‘무엇이 사회 집단을 결속시키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하고자 집단기억이란 개념을 얘기합니다. 그 집단이 세대를 거쳐 기억을 되물림하며 집단의 정체성을 형성하며 사회와 문화에 영향을 줍니다. 대표적인 사례를 들자면 유대인입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작은 민족 중의 하나임에도 전 세계적으로 사회, 경제, 경영, 예술, 법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민족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른 많은 이유들보다 이들의 성공과 영향력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집단기억의 되물림’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이 가진 집단기억은 유대교라는 절대종교에서 출발하는데, 조상들이 신과의 언약을 맺는 원초적인 경험에서 시작해, 언약 맺은 신이 준 선민의식과 축복의 약속 그리고, 세대를 거쳐 역사를 이어오면서 다른 민족의 경험과 비견할 수 없는 죽음을 관통하는 고난과 핍박의 기억들이며, 이것은 지금도 그들의 사회와 가정속에서 세대를 거쳐 되물림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 가정에 이루어지는 자녀교육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최근에 과학적으로도 인간이 겪은 경험이나 기억이 유전자를 통해 대대로 전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후생유전학’이란 이름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교의 뿌리에서 나온 기독교는 이보다 더 탁월한 종교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왜 그런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할까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예수가 주(LORD)’라는 고백을 통해서 개인이 경험한 어떠한 역경도 넘어갈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하는데, 이는 신이자 인간인 예수가 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졌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나도 생명 걸고 그 거래에 동참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바로 이 때, 예수의 경험이 나의 경험이 되는 기억의 치환이 일어납니다. 내가 아무리 고통스런 경험을 가졌다 할지라도 창조주가 피조물인 인간이 되어 당한 고통과 수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에 얼마든지 넉넉하게 그 고통을 이길 수 있게 되는 거지요. 초기 기독교는 이런 기억의 치환과 세대를 이은 기억의 되물림 과정을 통해서 참 그리스도인들이 사자의 밥이 되고, 몸이 갈가리 찢기는 로마의 300년 핍박을 견뎌낸 놀랍도록 존경스런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기독교는 왜 유대교와 비교는 커녕 수치를 당하는 지경이 되었을까요? 그 역사의 기억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기억을 물려줍시다!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우리 삶의 의미와 가치도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사회와 가정 속에서 어떤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며, 또 어떤 기억을 되물림하고 있나요? 내가 속한 가정 하나 먹여 살리는 것이 가장 중요했던 생존을 위한 시대의 본능적이고 감각적인 기억만을 물려주고 있지는 않을까요? 왜 그렇게 남의 허물을 들추고, 비난하는데 떼창을 부르는데 일등 민족이 되었을까요.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할 것은 상대의 허물과 약점보다는 남에게 보였던 우리의 거짓과 실수, 그리고 무관심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조상이 했던 실패와 수치입니다. 인조가 땅에 머리를 찧으며 절을 했던 삼전도비(대청황제공덕비)의 뼈아픈 기억, 당파싸움으로 열 올리다 나라를 말아먹었던 조선말의 부끄러운 기억, 일사늑약을 통해 일본에게 온 민족이 처절하게 수탈을 당했던 수치의 기억, 그리고, 공산주의란 이데올로기 때문에 같은 민족이 서로 살육하며, 나라가 반으로 쪼개진 가슴 아픈 기억들... 이런 고통스런 역사의 반복을 막기 위해서 제대로 된 기억을 물려줍시다. 이런 기억의 되물림이 사라질 때 우리는 ‘수치를 되물림하는 민족’이 될지 모릅니다. 

 

경기도 군포시 추광재
caleb.kj.choo@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12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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