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호 (114호)

기리야마 본진, 신상목대표를 만나다!!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9. 5. 9. 18:55

[한국에서 만나는 일본]

기리야마 본진, 신상목대표를 만나다!!

 꽃샘추위로 쌀쌀했던 오후에 강남에서 정통 일본식 우동가게를 운영하시는 신상목 대표를 만나보았습니다. 외교관으로 전 세계를 다니면서 국가를 위해 봉사하던 중, 돌연 사표를 던지고 우동가게를 차린 분인데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이 분의 삶의 스토리와 일본역사 이야기를 듣기 위해‘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가 방문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기리야마의 간단한 소개와 더불어 쫄깃쫄깃한 면발의 비결을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기리야마’라고 하는 우동집을 운영하는 신상목이라고 합니다. 기리야마는 일본에 있을 때에 인연이 닿은 면 장인집에서 기술 전수를 받은 우동집입니다. 음식은 정성이라고 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정성의 정체는 지루함과의 싸움입니다. 매일매일 정해진 일상을 예외없이 그대로 반복하는 것, 쉬워 보이지만 그거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견딜 때 보람도 함께 누릴 수 있는것 같습니다. 이 밀가루가 요물이어서요, 밀가루를 어떻게 다루었는가에 따라서 천상의 음식이 되기도 하고 못 먹을 음식이 되기도 하는데 저희는 찰기를 내기 위해서 위생적으로‘밟는 작업’을 합니다. 적당한 체중을 가진 사람이 정해진 방식으로 밟는 것입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어떻게 보면 이런 것은 생략하고 싶기도 하지만 지킬 것들을 지키면서 하는 것, 그것이 우동집을 운영하는 철학이라고 할까요.

일본의 장인정신, 매뉴얼을 지켜가면서 세밀하게 집중도 있게 만드는 문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꼭 일본만 특별한 것은 아니고 유럽의 마이스터도 있지요. 보통 일본의 장인정신을 이야기할 때에 한국에 없는 것을 상정하고 말씀들을 하시는데 이것은 인간의 기질이나 캐릭터보다 사회구조를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에도시대부터 상공업 문화가 발달했고, 신분사회이기에 자기 위치에 머물러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으나 그 이전에 가업이란 문화가 있었습니다. 한국은 상공업이 발달하지 않았기에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는데 일본은 술을 빚는 집안이라도 사회적로 인정을 받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죠. 자기가 자기 일을 잘하면 돈도 벌고 어느 정도 지위를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개인의 노력들이 축적이 되고 노하우가 되고 이게 가업으로 계승이 되는 이런 정신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장인정신을 생각할 때에 혹시 부정적인 요소가 있지 않나요? 예를 들어 일본사람들의 특징 중에서 계층을 나누고 계층에 따라서 할 일이 정해져 있기에 그것만 할 수 밖에 없었던 사회구조의 영향이 있었는지요?
 
 제가 이해하는 일본은 엘리트 사회인 것은 맞습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엘리티즘은 있습니다. 그러나 직업에 귀천이 없습니다. 일본에서는 철학적으로, 사상적으로‘심학’이라 해서‘이시다 바이간’이란 사람이 상업의 의미를 저열하거나 저급한 직역이 아니라는 것을 사상적으로 설파 하면서 모든 직업에는 귀천이 있지 않다는 것과 정직하고 근면하게 돈을 벌면 가치가 있다는 정신사조가 18세기부터 퍼지게 됩니다. 자기가 맡은 직역에서 얼마나 맡은 역할을 잘 해내는가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지, 그 사람이 길가에서 생선을 판다해서 귀천을 따지는 문화는 한국, 조선사회보다 덜 하였습니다. 그런 것은 우리가 일본에서 배우고, 따라 해도 좋을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선호되는 직장이나 직역이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이 우동집을 한다해서 부끄럽거나 판검사보다 덜 가치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에 얼마 정도 계셨는지요? 그리고 일본의 에도시대에 대한 책을 쓰게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공부하는 기간 포함해서 5년 정도 있었습니다. 국제정치학으로 석사과정을 했습니다. 그때 했던 주제는 동북아의 안전보장체제인데, 중국과 미국이라는 양대 세력가운데 중소국가들이 어떻게 살 기회를 찾는지가 지금의 중요한 이슈라면, 당시에는 EU, OSC같은 집단안보체제에 대한 논의가 유행했었죠.일본에 있으면서 관심을 가진 것이 에도시대에 대한 것이었는데, 한국사람들은 일본이 메이지 유신이라는 특정시기의 국가개조 프로젝트를 통해 급격하게 변화했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사실 저는 의문을 좀 가졌습니다. 그 이전시대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연속성으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가 일본을 여행하고 글을 쓰면서 메이지 유신을 연구했는데, 에도막부에도 개혁의 의지가 있었으니 만약 메이지 유신의 주체세력이 사초연합세력이 아닌 에도막부 사람들이었다면 동아시아에 불행이 없었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에도시대의 260년 평화를 지킨 것과 그런 가운데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발전하는 기초가 되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도쿠가와 가계의 수장을 한 번 방문해보려는 계획도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에도시대에 대해 백지상태입니다. 에도시대하면 칼 찬 무사들과 무인정권들이 굉장히 폭압적이었다고만 생각을 합니다. 물론 전근대사회로서 가진 성격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숨구멍이 트여 있었습니다. 조선과 달리 정치인들에 의해 슬로건화되어 바꾼 것이 아니라, 밑에서 서서히 물을 끓이듯이 일본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조금씩 영향을 미친 것들이 많았습니다. 이후에 메이지 유신시대에 사초연합이 칼 들고 나온 것이 있지만, 어떻게 이런 급격한 정치세력이 들고 일어난다고 해서 다 바뀌겠어요? 이런 변화를 흡수하고 수용할만한 지식인, 일반인들의 에너지가 260년동안 축적된 것이 에도시대였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정권이 250년이 넘어가면 피로감이 쌓이고 에도시대 마지막에는 그런 피로감이 많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동서의 대립가운데 서쪽에서 억눌렸던 것이 분출한 점은 있었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에도시대의 이런 차분한 준비가 없었다면 메이지 유신은 불가능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에도막부는 기존의 가마쿠라 막부 등과는 완전히 다른 시스템입니다. 그 전의 막부는 권력다툼에서 이긴 무인정권으로서의 의미만 있었지만, 에도막부는 자신만의 통치철학을 가진 정부였습니다. 16세기 중반부터 일본은 유럽과 교류를 하게 됩니다. 일본 전국시대의 한복판에 포르투갈 사람들이 조총을 전래해주고 기독교 세력이 엄청나게 들어옵니다. 당시 30~50만명으로 추정되는 기독교 신자들이 생겼고, 쇼군의 거소에 신부나 사제들이 거의 단독대면을 할 정도로 자유롭게 출입을 했고 교회나 신학교들이 생겼습니다. 일본 내에서 서양의 정신적인 측면 뿐 아니라 서양 문물의 진수인 자연과학,철학들이 교습되고 재생산되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그 시절을 거치면서 세계관이 바뀝니다. 물론 쇄국정책을 폈지만 그 70~80년 교류에서 온 모든 것을 제거하지는 않았고 그것이 난학으로 이어진 면이 있습니다. 국학, 미토학도 서양신학의 요소가 들어가 있습니다.

왜 외교관을 하시다가 이 길을 들어서게 되었는지요?
 우연적 요소, 의지적 요소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외교부는 굉장히 좋은 직장이고 보람찬 직장입니다. 주위에 인품이 훌륭한 분들이 많고 공적인 일이니 저만 떳떳하면 됩니다. 그리고 민원인들, 국민들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외교관으로서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외교부라는 큰 조직, 자신의 의지가 직접적인 결과로 나타나기까지 너무도 많고 복잡한 절차들이 톱니바퀴 같았습니다. 그래서 남은 인생은 내 머리 속에서 꿈꾸는 것을 나의 의지로 해보고 싶은 생각에 우동집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모 든 분들이 다 반대하셨는데 아직 사농공상의 잔재가 남아 있어 그러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정도로 사람들이 놀라고 의외로 생각한다는 것에서 한국사회의 경직된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에 서양친구들도 놀랐지만 바로 축하를 해주었습니다. 자기 이름을 걸고 사업을 한다는 것의 의미를 가치있게 생각하거든요.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업, 자기 이름을 걸고 비즈니스를 하는 것에 대해 사회에서 구성원들이 부여하는 가치는 공무원 이상으로 높습니다. 한국과 많이 다르지요.

한일관계가 지금 더 경색되어 있는데 어떻게 하면 보다 나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까요?
 
 교류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개인 대 개인으로 교류하는 것‘, 역지사지’는 서로하는 것이거든요. 한국사람들도 무조건 피해자라고 주장하기보다 일본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해보고, 일본도 가해자로서 피해자의 입장과 상대국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지 않는가를 생각한다면 한국과 일본처럼 잘 통하는 관계도 없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책을 쓰는 데 걸린 시간과 앞으로 다른 출간계획이 있으신지요?
 
 월간조선에 20회 정도 연재하던 글들을 모았습니다. 이번 달 말에 다음 책이 나옵니다. 범위를 넓혀서「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세계사」부제가‘일본, 유럽을 만나다’입니다. 동양과 서양이 만나게 되는 16세기 대항해시대가 1차 글로벌라이제이션인데 조선은 거기에 편입될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본은 중국보다도 더 집중도를 가지고 편입했었거든요. 그러나 17세기가 되면서 막부체제 안정을 위해 통로를 막지만 그 전의 80년은 완전히 열린 세계였어요. 에도시대도 이 80년의 경험에서 파생된 것들이 굉장히 많거든요. 다른 측면으로 서양은 왜 이 먼 일본까지 배를 타고 오게 되었는가 이런 것들을 다뤄보려 합니다.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14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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