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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날 같이  매서운

2018년 7월호(제105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8. 4.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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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통신 노익호의 지휘자이야기 4]


칼 날 같이 매서운 



 일본의 ‘스가노’씨는 검을 만들던 장인입니다. 시뻘겋게 달구어진 철을 망치로 두드리고 기름에다 식히기를 반복하여 명검을 만들었습니다. 쇠를 다루던 그 솜씨로 종이장처럼 얇은 강철판을 가지고 전축 바늘(주로 다이아몬드)을 지지하는 캔틸레버도 만들었지요. 이런 시작으로 그가 전축 카트리지를 만들었으니 그 이름도 유명한 ‘고에츠’ 카트리지입니다.


  여기 명검의 칼날 같이 매섭게 음을 조율하는 지휘자 로린 마젤(1930~2014, 이하 마젤)을 소개합니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했고 바이올린 연주 뿐 아니라 작곡실력까지 겸비합니다. 8세 때 지휘로 데뷔한 신동입니다. 꽤나 많은 천재들이 일찍 꽃을 피워 곧 지는 걸 지켜보던 많은 애호가들의 우려를 뒤로 하고 운명을 달리할 때까지 불세출의 천재답게 고공의 행진을 합니다. 칼 뵘(음악가들이 쳐주는)이냐 카라얀이냐로 배분되던 음악계의 판도에서 카라얀이냐 마젤이냐로 배분되는 양상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서양식(제가 생각할 때) 교양이라는 게 일반인들이 도달할 수 없을 만치 엄격함이 있지 않나 싶은데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음악에만 전념해도 벅찰 법한데 마젤은 피츠버그대학에서 1946년에서 1950년 사이에 수학, 철학, 언어학 등도 공부합니다. 그의 음악에는 이런 논리정연한 감성이 물씬 풍깁니다. 그러니까 음악적 정열이나 거장의 풍모보다는 아주 정교하고 빈틈이 없는 듯한 곡들을 선사합니다. 


  2008년 2월 26일 뉴욕필하모닉 관현악단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여 ‘아리랑(편곡)’을 연주하여 호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마젤은 너무나 유명해 일일이 그의 행적을 얘기할 수 없기에 저와 관계된 사연 하나를 소개할까요? 교회청년부 형이 제가 음악을 좋아하는걸 알고, 자기 누이가 세종문화회관의 매표소 직원이라며 찾아가보라고 했습니다. 유명한 사람이 온다니 가보았지요. 그것도 누나의 ‘빽’으로 공짜라니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나! 마젤이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끌고 온 게 아닙니까. 당시 카라얀 아니면 마젤일 정도로 인기 최절정이었습니다. 


  이리하야 1980년 어느 저녁 날, 공짜로 입장한 사람답게 이층 정중앙에서 약간 삐뚜룸한 계단에 앉아 감상 채비를 갖췄습니다. 말이 계단이지 바로 뒤편은 대통령 등의 귀빈들만이 앉는다는 귀빈석이었으니 소리만으로는 명당자리! 조금 지나니 두 사람이 제 옆 계단에 앉았습니다. 보니 평소 존경해 마지않던 명아나운서 황인용 아저씨가 아닌가요! 아나운서 박봉이 어쩌구 저쩌구 하며 얼마나 내 눈높이를 잘 맞추던지. 최상의 음질을 감상하러 왔다가 주눅이 들지 않고 도리어 횡재한 기분이 들던 날이었습니다. 황인용 아나운서는 당시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전집 레코드판을 옆에 끼고 나타났는데, 내게 맡기고 휴식하러 가기도 하는 여유를 보이더군요. 아무튼지간에 이렇게 무사히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 성대하고도 빈티 아닌 귀티 있게 황인용 아나운서 그리고 그가 대동한 김피디와 함께 마젤이 지휘하는 역사적인 교향곡을 들었다는 겁니다.


  곡이 어땠냐구요? 너무나 제가 긴장한 탓일까요? 얼마나 연주를 잘했으면 베토벤의 6번 ‘전원교향곡’의 느린 악장에서 잠이 다 솔솔 왔을까요. 특이한 것은 베토벤의 5번‘운명교향곡’이었습니다. 운명이 두드린다는 첫 소절을 연주할 때 대부분의 지휘자들은 보통 깊디 깊은 심호흡 다음에 시작하기 마련인데 마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오자마자 득달 같이‘빠바바 바암~!’하고 연주를 해주어‘음악이란 무엇인가?’란 난제에 영원히 잊지 못할 인상적인 깨달음을 선사하였습니다.


  아무도 그리 안했을 때 파격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 소리의 제련사 마젤. 그가 들려주는 음악은 명검의 칼날 같이 매섭게 정확하지만 음악의 아름다움을 매 박자마다 숨겨 놓은 채색가라고 할까요? 이제 그는 갔지만 그의 음반은 남아 있으니 누리는 우리 몫이 더 큰 게 아닌지요. 최소한 저는 마젤에게 ‘빚진 자’라는 걸 굳이 밝힙니다. 



칠레에서 노익호
melquisedec.puentealto@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05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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