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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문화(명) 나쁜 특성 끄집어내기, 그 뿌리 찾아나가기

2019년 12월호(122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1. 19.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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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문화의 황혼에서 새 문화의 여명으로 28]

유럽문화(명) 나쁜 특성 끄집어내기, 그 뿌리 찾아나가기

 

현재 한국의 미디어들의 제작 기준은 중학교 졸업생이지만 ‘행복한 동네문화이야기’는 조금 높여 고등학교 졸업생으로 기준을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옛 문화의 황혼에서과 새 문화의 여명으로]는 더 높여 한국에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대학졸업생으로 삼았습니다. 이 분들이 조금만 끈질기고 사려깊게 읽어주시고, 또 만나는 분들과 서로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 사회에 건강한 여론을 형성하는 주역이 되시기를 바라는 칼럼입니다.


베토벤(음악), 괴테(문학), 칸트(철학)의 나라 독일 전체가 어떻게 그렇게 악할 수가 있었는가?
독일인이라면 누구나 가슴깊이 느낄 수밖에 없는, 히틀러 시절의 ‘저주받은 12년(1933-1945)에 대한 슬픔과 부끄러움’을, 독일철학이 풀어야 할 근본적인 문제로 삼고 달려든, 현역에서 활동 중이며 100년에 한번 나올 천재로 인정된 이태리계 독일 철학자가 있습니다. 한국여자와 결혼해서 미국에서 가르치고 있는 비토리오 회슬레(Vittorio Hösle 1960-)입니다([독일철학사, 독일정신은 존재하는가?] 2015,416). 독일에서 - 특히 인문,사회영역에서 - 공부하는 유학생이라면 누구든지 자기의 독일 스승이 스스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었던가를 과감하게 스승에게 묻고 정당한 대답을 듣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이런 대화의 부재가 제자 자신의 양심,학문이 왜곡되는 부메랑으로 되돌아 올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끊임없이 고발했음에도 독일에서는 1960년까지만 해도 모두가 침묵했으며, 대다수의 독일교회도 이런 행진에 가담했습니다. 그렇지만 독일수상 빌리 브란트(Willy Brandt)가 폴란드 2차대전 희생자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한 행위(1970)로 노벨평화상(1971)을 받자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이후 독일인들이 사죄하고 회개하는 기사들을 읽고 보면서 이들은 과연 일본과 다르다고 감탄하지만, 사실 2차대전 직후 25여년간 대다수의 독일인들이 침묵했던 위선적 과거도 직시해야 합니다. 심지어 이 주제는 21세기에 이른 지금까지도 독일인을 사귈 때에는 그들이 먼저 꺼내기 전에는 결코 묻지 말아야 할 금기입니다. 정직하게 반성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습니다. 이런 질문에 대해서 흔하게 돌아오는 (특히 젊은이들의) 궁색한 대답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전세대가 한 짓이라는 겁니다. 6백만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주범으로 선 아이히만이 전범재판 때, 자신은 국가가 준 명령에 최선을 다해서 섬겼다는 현실외면어법, 요즈음말로 하면 유체이탈어법을 쓰는 것과 동일하지 않나요? 물론 유학생으로서 자기가 선택한 좁은 영역 하나만 공부하고 돌아와서 잘 사용하면 된다고 간단하게 처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다루는 좁은 영역의 전공은 유기적으로 연관된 전체 문화(명)의 일부이기 때문에, 스승의 가슴에 숨긴 궁색한 양심과 거짓 주장은 결국 유학생의 마음에 남아서 앞으로 그가 악한 문화(명)를 만들거나, 그렇게 행동하는 위선적 개인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동안 이런 질문들을 독일 스승에게 대놓고 한 사람은 과연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요?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동양의 학문은 스승에게서 제대로 배워 그대로 전수하는 것이지, 스승에게 이런 양심과 관련된 도전적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질문은 유럽이 세계를 제패해나가던 지난 5백여년 동안 선두에 섰던 나라들(스페인, 포르투칼,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벨기에 등)을 향해서도 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로마교와 개신교를 기본적 종교로 가졌던 이 나라들은 과연 종교적 가치가 제국주의의 착취를 허용하는지를 과감하게 질문한다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요? 가장 흔한 궁색한 대답의 하나(영국의 경우)는 그런 나라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상업적 거래를 했을 뿐이라는 겁니다.     

21세기 초에 세계화된 유럽문화(명)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이런 질문은 비단 유학생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80억 인구의 전세계는 너무나 빠른 속도로 하나가 되어 지구가 점점 좁아지는 가운데, 모든 나라들과 민족들이 유럽문화(명)의 세례를 흠뻑 받아서 그 질주의 바톤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른 체 급하게 이어달리고 있습니다. 과연 전세계는 지금 제대로 가고 있으며, 이 길이 정말 옳은가 하는 질문은 이제는 보통사람이라도 누구나 물어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요? 더 구체적이며 근본적 질문 두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현대 유럽문화(명)는 과연 유일한 것인가?
2) 동양인인 우리가 거기에 우리의 운명을 걸어도 될 것인가?

저는 10년을 유럽에 살면서 보통 한국어를 거의 잃어버린 후에 귀국해 청년들과 뒤범벅이 되어 뒹굴면서 겨우 한국말을 회복했습니다. 하지만 긴 문장의 독일어에 워낙 익숙해졌기 때문에 지금도 글자로서의 한글은 여전히 어색하고 틀린 곳이 많습니다. 그래서 반쯤은 유럽화되었다고 생각하는 저 자신이라도 이 근본질문들에 대해 단호하게 부정적으로 답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운명을 걸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다른 대안이 가능하며 반드시 그것을 찾아야 할 시점에 왔습니다. 이런 경험을 한 저와 다르게 한국에서 오래 사신 대부분의 한국인들도 역시 아니라고 답하실 것 같은데 제 추측이 맞나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28회째 진행하는 [옛 문화(명)의 황혼에서 새 문화(명)의 여명으로]시리즈의 핵심주제입니다. 
 
현대유럽문화(명)가 유일한 것이 아니며, 우리가 거기에 목숨을 걸고 사수해야 할 이유가 없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요? 가장 먼저 무섭고 징그러울 정도로 동양인인 우리의 정체성까지 되어가고 있는 유럽문화(명)의 나쁜 특징들을 적나라하게 끄집어내어 파헤쳐 보는 겁니다. 

유럽문화(명) 첫째 나쁜 특징은 모든 문화(명)현상을 개별적으로 분리해 버리는 것, 문화(명)의 파편성입니다.
이런 분리성, 파편성이 근본특징이라면, 내가 만들고 행한 결과물들이 돌아서 결국 나에게까지 되돌아와 극도의 해를 끼친다는 것을 아예 처음부터 알 수 있을까요? 좁고 구체적 분야 하나를 전공하는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우선 나 하나만 잘 하면 되고, 이어서 모두가 그렇게 잘 한다면, 만사는 잘 돌아갈 것이라는 순진하고 어리석은 낙관론 자체가 사실 이런 나쁜 유럽문화(명)가 만든 가치관일 뿐입니다. 문화(명)의 전全과정(holistic)이나 전全역사(wholistic)을 보고 관장하는 사람이나 영역을 만들 체제나 원리를 갖추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만만함에 더하여 교만하기까지 한 문화(명)가 유럽문화(명)임이 이제는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만약 이런 총체적 체제, 원리를 만들 능력이 없다면, 적어도 조심스러웠어야 하고 겸손했어야 하지 않나요? 이런 사례로 현재 많은 학자들뿐 아니라 심지어 전세계 여학생까지 들고 일어나서 이전 세대와 지금 세대가 혼자 잘 살자고 퍼질러 놓은 쓰레기를 책임지라고 고함치는 지경까지 온 환경파괴가 아닙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환경문제의 주범은 어떤 개인, 민족, 종교,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유럽문화(명) 자체라는 것을 잘 생각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우리 동양인이 언제 서양인이 되었으며, 그들이 쓰레기더미들을 생산하는 문화(명)공장에서 우리까지 일해서 더럽고 악한 문화(명)를 제품으로서 만들어내어야 할 이유가 있나요?    

유럽문화(명)의 둘째 나쁜 특징은 물질주의적 경향입니다.
유럽인들이 1) 중세기 내내 지중해라는 작은 바다에서 훈련했던 배를 다스리는 기술, 2) 중국에서 가져간 총포, 화약, 그리고 3) 서로 쪼개어진 가운데 치열하게 경쟁해야 했던 지정학적인 위치라는, 세 가지 중요한 장점을, 대서양시대에 큰 범선을 타고 세계를 휘저으면서 지배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장점들을 자세히 보면 모두가 다 물질주의적인 것입니다. 이들도 정신, 마음, 감성 등의 보이지 않는 면들에 대한 추상적 단어들을 사용하지만, 이것들조차도 대부분은 물질적 개념에 불과해서, 이들이 가진 가장 중요한 정신적 능력에 해당하는 이성(로고스)은 아주 쉽게 냉혹한 판단을 내리는 실체로 변질됩니다. 이들이 종교라고 하는 기독교조차 물질화되었습니다. 서방기독교의 절반인 로마교는 물질과 종교의 이원론을 만들어서 극단적인 악을 식민지에 행하고서, 그 벌어들인 돈으로 교회를 지어바치고 신부에게 죄의 용서를 받는 위선적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서방기독교의 또 다른 절반인 개신교는 물질과 종교의 이원론을 극복하려고 했지만 사실상 패배했고 위선적이 되었습니다. 가장 개신교가 활발했던 영국과 네덜란드가 제국주의를 가장 많이 시행한 나라라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물론 이들 나라의 교회들은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자기들 정부가 그렇게 했을 뿐이라고 변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정부가 만들어지지 않도록 자체 내에서 처절하게 투쟁하기 전에는 식민지에서 도둑질한 물질은 사용하거나 먹지도 않겠다고 먼저 작정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요? 이런 물질주의가 19세기에서는 이론적 형태로 나타났는데, 다윈의 진화론,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프로이드의 성심리학입니다. 이런 유럽문화(명)의 끝물(막내)에 해당하지만 지금은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전통이 극히 박약한 미국이, 갈팡질팡하면서 세계질서를 어지럽히는 가운데 21세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물질주의화는 곧 타락한 세속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는 냉혹하고 더럽고 무책임한 문화(명)일 뿐입니다. 

유럽문화(명)의 셋째 나쁜 특징은 개별성, 이기성의 추구입니다.
심리학 실험에서 밝혀진 바로는 서양인들은 구체적 사항에 먼저 집중하지만, 동양인들은 전체의 맥락과 연관관계를 먼저 살핀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자기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구성하는 버릇이 있는 반면, 동양인들은 주위와의 상관관계를 살핀 후에 자신의 위치와 행동범위를 정한다는 겁니다. 장단점이 모두에게 있습니다. 서양인의 장점은 자신의 삶을 확실하게 책임지는 반면 매우 이기적이고 독선적이 되기 쉽습니다. 동양인은 전체의 맥락을 살피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장점이 있지만, 매우 위선적이고 자기주체성이 박약하며 책임감이 없고 의존적이어서 상대의 눈치를 매우 잘 본다는 겁니다. 그런데 전세계가 유럽문화(명)화되는 가운데, 이미 말씀드린 물질주의화와 윤리,사회의식의 타락이 서로 맞물리면서, 나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매우 이기적이고 냉혹한 거대도시의 문화(명)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지구의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눈에 보이는 물질을 찾기 전에, 영속적,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종교,윤리,정신의 기초 위에 만들어나가야 하는 공동체의식과 역사의식은 눈을 닦아도 찾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SNS 속에서 열심히 글과 사진을 올리면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려고 할수록 개인은 더욱 소외되어가고, 그 속에 남은 것은 사이버공간이라는 사막에서 자기주장만 외쳐대는 늑대들만 난무하거나, 상업주의에 휘둘린 개인만 남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따뜻한 공동체는 가족 내에서조차도 찾기 어려우며, 역사적 공동체는 도무지 형성되지 않는 대신, 갑자기 생성되었다가 갑자기 소멸되어버리는, 외로운 인간들로 이루어진 허구적 만남만 남게 된 겁니다.    
  
유럽문화(명)의 넷째, 그리고 가장 나쁜 특징은 종교에 대한 반발심이 거의 절대적일 뿐 아니라, 반발하는 자신(주장)이 아예 종교가 되는 현상입니다.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은 그 전의 사람의 잘못을 지적할 수는 있지만, 자신이 과연 그런 위치에 선다면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단지 혁명을 했다는 자격, 자부심, 권리 때문에 다음 세대의 지도력을 장악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국 자체에서 서서히 일어난 대헌장(1215)-청교도혁명(1643)-명예혁명(1688), 지리적으로 영국과 분리된 가운데 일어난 미국혁명(1776)만이 유일하게 성공한 혁명의 사례에 해당합니다. 유럽 대부분의 프랑스혁명, 좌파혁명, 공산당혁명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4.19, 5.16, 그 이후의 대부분의 혁명들에는 근본적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적극적으로 그 무엇을 창조할 능력을 증명하며 권력을 장악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권력의 공백기에 권력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더 거대한 시각에서 마찬가지의 현상이 유럽문화(명)에서 볼 수 있는데, 바로 종교에 대한 증오에 가까운 혁명적, 적대적 태도라는 겁니다. 앞으로 보겠지만, 종교에 대한 이런 적대적 자세, 태도는 트로이 전쟁 이후 고대그리스가 고대서아시아, 이집트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던 문화(명)적 경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당시까지 모든 문화(명)를 받아들였으며 자신들이 거기서 용병까지 했던 동방을 바바리안Barbarian(다른 언어의 의미도 있지만 무시하는 야만이란 의미로 주로 사용)으로 욕하며 하시하는 그리스인들의 태도는 어디에서 많이 보던 것이 아닌가요? 바로 지구의 동쪽 끝에 위치하여 가장 뒤늦게 문화(명)들을 받아들였지만, 개화기 때에 우리보다 발빠르게 서양의 물질문화를 받아들인 후에 지금까지 한반도와 그 문화를 무시하는 일본인들의 태도 말입니다. 이는 사실 열등감의 소치일 뿐입니다. 바로 이런 태도가 유럽이 자신의 상고기(上古期)라고 여기는 고대그리스에서부터 있어왔으며, 그것이 그대로 근현대기의 유럽문화(명)의 태도, 자세로 굳어진 겁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분리성, 파편성과 함께 이기성이 발동되는 가운데, 종교를 철저히 거부하는 생리를 가진 겁니다.
그렇지만 그 정도에 머문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갔습니다. 그것은 바로 종교를 뒤집은 혁명을 일으킨 주체가 스스로 종교가 된 점은 앞에서 말한 혁명현상과 동일합니다. 이전에 다룬 것처럼, 고대그리스에서 철학이 고대서아시아로부터 유래된 왕이 제사장적 권위를 동시에 가지는 종교-정치 통합형태를 뒤집어서, 그 최고위의 자리를 철학자가 꿰차고 앉도록 한 것이 플라톤의 사회철학 시스템입니다. 근현대에 이르는 유럽문화(명)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그런 철학이 차지한 수위권의 자리를 과학이, 다시 그 과학이 차지했던 종교적 권위를 가진 자리를 기술이 차지하여가는 과정이었을 뿐입니다. 물론 철학, 과학, 기술 안에서도 상이한 주장들이 나와서 각각 종교적 권위를 외치며 충돌하는 과정들이 연속되어 왔습니다. 전통적 철학에서는 경험론과 합리론이 각축을 다투었으며, 헤겔철학에서 종합된 독일의 관념론은 헤겔좌파에서 발원한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헤겔우파와 종교적 권위의 자리를 놓고 쟁투를 벌였습니다. 이 둘[국가사회주의(나치), 계급사회주의(공산주의)]의 종교적 투쟁의 격렬함이 극에 달해 20세기에 세계의 불행이었던 2차세계대전을 겪게되었습니다. 전자의 멸망(1945), 50여 년 후에 일어난 후자의 파멸(1989) 이후, 지금 시대에 전자가 되살아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푸틴이 경배할 정도로 전세계의 러시아화를 향한 이데올로기를 놓은 ‘이반 일린’, 그리고 미국제일주의를 무식하게 밀어붙이는 ‘트럼프’, 로마교적 전통을 등에 업고 점차로 득세해 나가는 동유럽의 민족주의적 경향 말입니다. 모든 것과 사람들을 자기 밑에 두고 명령을 내리고 움직이게 만들려고 하는 이런 이데올로기적 태도가 종교가 아니고 무엇일까요? 
과학의 영역도 하나가 발흥하면 곧바로 종교의 모습을 갖춥니다. 19세기의 첫 이단아인 헤겔좌파(포이에르바하)가 변질된 것으로서의 공산주의(마르크스)가 이데올로기로서 등장할 때 ‘과학적 ’scientific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어서 19세기의 둘째 이단아인 생물학에서의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해서 종교적 열정으로 유럽계를 휩쓸었습니다. 진화가 아닌 신이 허락한 외부의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이 발현된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생물학의 한계를 넘어가면서 만물에 적용하는 생물학 만능주의의 만용을 부렸습니다. 19세기의 셋째 이단아인 프로이드의 성심리학이 등장할 때에 마치 모든 현상을 그것으로 압도할 수 있는 것처럼 역사를 오도하였지요. 19세기의 넷째 이단아인 A.꽁트가 시작한 사회학은 아예 위선을 벗어버리고 종교임을 선언하고서 교만을 만천하에 드러내고야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20세기에 등장한 물리학과 수학에서, 가장 위대하고도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 발견이 양자물리학과 불확정성원리,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incompleteness theorems)입니다. 역사가 지날수록 인간은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기 때문에 생각과 행동에서 더욱 겸손해져야 할 것이 인간임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학문적 발견만으로 결코 인간은 바꾸어질 수 없기에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전쟁들의 소용돌이가 20세기 내내 지구를 덮쳐야 했습니다.

유럽문화(명)의 본질(Ground Zero)을 찾아가는 네 과정. 그리고 최우선 과제 
이런 매우 나쁜 특징들을 가진 유럽문화(명)는 분명히 우리 동양인들에게는 매우 이질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그것이 정식이나 정통인 것처럼 그대로 배우고 그대로 사용하면 되는 줄로 알고 살아왔습니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우리가 유럽문화(명)의 그 긴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근본을 반성해볼 시간으로는 너무 짧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것을 근본바닥(Ground Zero)에 내려놓고 다시 출발해 보는 겁니다. 즉 네 가지를 근본부터 차근차근히 따지는 겁니다 : 
1) 유럽문화(명)의 본질을 형성하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고대 그리스 철학, 
2) 그리고 그 근원이 되는 고대 그리스 신화와 문화(명), 
3) 또 그 신화와 그리스 문명이 철저히 기초한 고대 서아시아와 이집트의 신화와 문화(명),
4) 무엇보다도 세상의 배꼽에서 고대서아시아와 이집트의 신화와 문화(명)와 공통기원을 가진 고대 이스라엘 종교와 문화(명)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장 우선적인 넷째 문제를 다루면서 우리가 가진 최우선 과제는 무엇일까요? 바로 고대서아시아, 고대이스라엘, 고대이집트의 공통기원과 차이점 찾기입니다. 
고대이스라엘의 종교,문화는 주위의 고대서아시아와 이집트의 그것들과 궤적을 같이 합니다. 다시 말하면 고대그리스의 철학,문화,신화는 선명하게 고대서아시아와 이집트의 것에서 온 것임이 분명하지만, 고대이스라엘, 고대서아시아, 고대이집트 이 셋 사이의 역사적 선후관계는 명확하게 선을 그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삼자 사이에는 지리적,역사적 인접성 때문에 모종의 ‘공통기원’(Common Origin)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런 공통요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고대서아시아 문화(명 [B])와 고대이집트의 문화(명 [C]) 사이에는 형식, 주제, 내용에서 유사성이 매우 많습니다. 하지만, 이 두 문명들과 고대이스라엘의 문화(명 [A])는 형식,주제는 동일한 것이 많으나, 내용은 본질적,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는 겁니다. 이전에 말씀드린 대로, ‘신의 형상, 모양’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 주제, 용례가 세 문화(명)에 모두 나옵니다. 그런데 [B]와 [C]에서는 모조리 왕을 향해서만 쓰였으나, [A]에서는 처음부터(창세기 1:26-27) 신 앞에 선 인간 일반을 지칭하는 용어였습니다. 그렇지만 왕을 중심으로 하는 전제주의에서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주의로 발전된 것이 고대이스라엘의 종교라는 근현대적 해석을 밀어붙이는 미련한 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민주화’democratization라고 억지를 부립니다. 오히려 이 셋은 모두 공통기원을 가지긴 하지만, 기원에 가장 가깝고 근본적인 어떤 문화(명)[A]에서, 공간적으로 흩어지고 역사적 시간이 흐를수록 왜곡, 변질된 문화(명)[B],[C]가 되어간 역사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수 있습니다. 우리 동양인이 20세기에 잔뜩 영향을 받은 세 가지 물질주의의 형태인 진화론, 공산(사회)주의, 성심리학이라는 서양인이 만든 헛된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지 않기로 작정한다면 말입니다. 2020년 1월호에 이 세 고대문화(명)의 상관관계를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010-6844-0609/segensong@gmail.com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22>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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