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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 Aspera Ad Astra (역경을 넘어 별에 이르도록)’ 겨울 요트 여행기 (5)

2022년 11월호(157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3. 3. 19.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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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문법이야기 20]

‘Per Aspera Ad Astra (역경을 넘어 별에 이르도록)’
겨울 요트 여행기 (5)

 

새벽 5시, 배를 묶어둔 낚싯배에 인기척이 들려 잠을 깼다. 항구 안에는 아직 12월의 어둠이 가득, 미명도 느껴지지 않는다. 옆 낚싯배가 곧 출항을 할 것 같아 황급히 크루들을 깨우고 줄을 풀러 후진으로 요트를 뺐다. 깨자마자 잠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두꺼운 파카 하나만 걸치고 작은 항 안에서 출항하는 새벽 배들을 이리저리 피하며 요트를 조종했다. 안크루는 서둘러 기름을 넣고 조크루는 출항 준비와 함께 간단한 아침을 준비한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동이 트고 앞이 보여 드디어 출발이 가능하다. 모항항 입구 쪽에 암초가 있어서 암초를 피해 우회전 한 뒤 거리를 줄이려 섬에 붙어 전진한다. 파도는 어제보다 많이 줄어 마음이 편한데 물때가 문제다. 엔진을 3천 RPM까지 밀었는데 속도가 3.8노트. 2노트 가량의 조류가 배 전진 방향의 반대로 빠져나가고 있다. 이 속도로 가다가는 해가 질 때까지 목표하는 서해 갑문에 도착하기는 글렀다. 바람마저 정면에서 불어 세일도 쓸 수 없다. 이럴 땐 물때가 바뀔 때까지 인내하는 수밖에. 예측을 보니 정오쯤 되어야 조류가 바뀔 것 같다. 그 사이에 0.1노트라도 어떻게든 빨리 가보려고 배를 이리 틀고 저리 틀며 세일이 바람을 최대한 머금을 수 있도록 온갖 짓을 다 한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대사리 물살을 이길 순 없다. 속도는 전진 방향으로 4노트를 넘지 않고 세일에 바람을 받으려 옆으로 트는 만큼 거리는 늘어난다. 방향을 틀어 세일을 써서 5노트로 돌아가는 게 빠를까, 아니면 엔진으로만 밀어서 3.8노트의 최단 거리로 가는 게 빠를까. 지도를 보며 정확한 수학계산까지 할 겨를은 없다. 다만 진행 방향 왼쪽으로 울도, 선갑도 등 덕적군도의 익숙한 섬 군락들이 눈에 들어오며 곧 집에 도착한다는 희망이 긴 지루함을 달래준다. ‘물때가 바뀌면 속도가 얼마나 날까? 시간 안에 거리를 줄여 목표대로 도착이 가능할까?’생각이 많아진다. 

세일링을 하다보면 섬 지형을 잘 익힐 수 있다. 멀리 눈에 들어온 섬에 도달하는 시간이 적어도 3~4시간씩 걸리다보니 한 장면을 3~4시간 동안 지켜보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한 번 세일링한 장소나 섬들은 기억 속에 잘 잊혀지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속도가 느릴 땐 그만큼 봤던 장소를 또 오래 지켜봐야 하는 지루함이 있다. 크루들과 레토르트 식품으로 허기를 달래고 있자니 시간이 정오에 다가선다. 수면 곳곳에 앞뒷 물들이 부딪히며 삼각파도와 소용돌이가 생기는 것을 보니 물때가 곧 바뀔 것 같다는 희망이 생긴다. 이내 정조가 오고 배의 속도가 서서히 빨라진다. 3.8.. 4.0.. 5.0.. 6.0.. 속도계의 속도가 빨라지며 7.0.. 8.0까지 속도가 쑤욱 올라가더니 네비게이션의 예상 도착 시간이 큰 폭으로 줄어든다. 좁은 두 섬 사이의 해로를 지날 땐 순간 9.2노트를 찍는다. 6시간 동안 고생시킨 조류가 이번엔 돕는 쪽으로 바뀌어 배의 진행 속도가 눈에 띄게 달라진다. 속도가 빨라지니 기분도 함께 좋아진다. 9노트를 넘으니 쾌속정을 타는 느낌, 풍경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바람 방향이 맞아 잠깐 세일까지 펴니 속도가 10노트에 육박한다. 


섬 군락 사이로 들어오자 자연 방파제에 남은 파도는 마저 사그라들고, 지난 4일간 겨울바람과 추위, 파도와 조류로 고생했던 항해의 기억들과 함께 ‘Per Aspera Ad Astra(역경을 넘어 별에 이르도록)’의 라틴어 문구가 문득 떠올랐다. 그렇게 잔잔한 인천 바다 위를 노니고 있자니 추위와 파도, 멀미, 바람과의 긴 전투를 이겨내고 개선문을 지나 퍼레이드를 하는 기분이다. 크루들도 선상에서 따뜻한 겨울 햇볕에 마음을 누이고 여유롭게 수다를 떨고 있다. 부러 거친 12월 대사리 겨울 항해를 선택하며, 더 많이, 더 많은 바다를 겪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장 위험한 선장은 20년간 무사고 운항을 한 선장이라는 말이 있다. 위기를 겪어보지 못한 선장은 급작스런 위기들에 대처할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바다와 세일링 크루징은 직접 겪지 않고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여전히 많이 있기에 노련한 선장이 되려면 직접 고생을 계획하며 바다에 나서는 수밖에 없다. 이번 항해를 통해 나는 서해 세일링의 가장 큰 변수는 바람도, 엔진 상태도 아닌 조류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뼈져리게 느꼈다. 그리고 12월 대륙풍이 바다 위에 변덕스런 돌풍들로 무섭게 불어오는 것을 경험하며 까탈스러운 겨울 바다를 제대로 익혀둘 수 있었다.

그렇게 8~9노트의 속도로 서해 갑문에 도착했을 땐 겨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마리나에 배를 묶고 집에 돌아와 등을 누인 후,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 밤엔 나도 사자 꿈을 꾸었던 것 같다.

 

세일링서울요트클럽, 모아나호 선장 임대균
keaton70@naver.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57>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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