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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응’의 새로운 인생 후반전 “75세까지, 태국 싸하쌋 학교 아이들과 함께 하고 싶어요.” 

2023년 6월호(164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4. 3. 19.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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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김미경이 만난 사람]

‘이준응’의 새로운 인생 후반전 
“75세까지, 태국 싸하쌋 학교 아이들과 함께 하고 싶어요.” 

 

선생님이 되고 싶었으나…
학교 다닐 때 내성적이라 궁금한 게 있어도 선생님들에게 잘 물어보지도 못한 채 소원하게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선생님과 잘 지내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어요. 그 친구들은 선생님과 자주 만나 이야기하며 선생님이 조언해 주는 방향으로 진로를 정했는데, 저는 그러지 못 했던 거죠. 그래서 중·고등학교 시절 제 꿈은 선생님이 되어 저와 같은 아이들에게 먼저 다가가 필요한 것을 찾아 주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할 때 즈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홀로 2남 1녀를 키워야하는 상황에서, 장남인 저는 선생님이 되는 것보다 대학졸업 후 빨리 취직하는 것이 더 급했습니다. 

 

태국 싸하쌋 학교 학생들과 함께


포스코 대리점 ‘문배철강’에 첫 취직
그 당시 포항에는 포스코의 대리점격인 한일철강, 동성철강, 문배철강 등이 있었습니다. 포스코에 철판을 주문해 전산망을 통해 판매하는 회사였죠. 취직후 1년 정도를 다녔는데 직장분위기가 너무 거칠고 술, 담배 문화에 도저히 참기 힘들어 저 스스로 그만 두었습니다. 그러면서 소개받은 직장이 바로 ‘공증인가운현합동법률사무소’로, 지금은 ‘김앤장’으로 더 잘 알려진 법률사무소였죠.


법률의 ‘ㅂ’도 모르고 들어간 김앤장
저는 법 전공이 아닌 수학을 전공했기에 법률의 ‘ㅂ’도 모른 채 1987년 김앤장에 입사해, 총무부에서 직원들 연·월차 관리, 신입사원의 입사지원업무 등을 10년 정도했습니다. 그러다 IMF가 터졌는데, 알다시피 수많은 회사들이 쓰러지고 M&A 작업이 한창 진행되면서 저희 회사는 너무 바빠졌습니다. 많은 기업들과 국민들에게 힘든 상황이지만 이것을 법률적으로 해결하면서 회사는 점점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부동산의 ‘ㅂ’도 모르고 부동산 팀으로 부서 이동
회사가 커지니, 부동산 팀에서 M&A 작업을 하며 바삐 돌아가야 할 상황에 부동산 조사와 실사를 위해 자료들을 급히 찾아, 보고해줘야 하는데 직원이 부족했습니다. 직원을 뽑아 달라 아우성이니 총무부 직원 중 저를 부서이동 시키더군요. ‘등기부등본도 볼 줄 모르는데… 아! 그럼 나에게 그만두라는 건가?’하며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법률 사무소에 입사한지 10년정도 되었던 차라, 이 때부터 법을 본격적으로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경기대학교 평생교육원 법학과에 야간으로 다니며 부동산 팀에서 하는 민법, 세법, 공법, 건축법 등을 공부했죠. 회사에서 실무를 담당하다보니, 처음에는 공부한 내용이 바로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점차 구슬처럼 꿰어지더라고요. 이리 법률적인 부동산전문가가 되어가는 차에…


외국인 변호사들의 집 계약을 도맡다
그 당시 저희 회사엔 외국인 변호사만 150여 명이 있었습니다. 저는 부동산 팀에서 이 외국변호사들의 임대차 계약과 전세나 월세로 집을 구하는 업무를 도맡아 하게 되었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부동산 중개업자들과도 많이 친하게 되었는데, 오히려 부동산 중개업자 대표들이 법률적인 문제를 저에게 더 많이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직원들도 본인의 주택과 관련해 불편한 것들이 있으면 바쁜 변호사들 대신 저에게 질문하는 경우가 많았죠. 외국변호사들의 집 계약서는 분량이 대략 10장 이상이었는데, 부동산중개업자들 사이에서 우리가 만들어준 양식이 바로 표준이 될 정도였습니다. 또한 기업합병으로 전국에 있는 한국의 공장들을 안 가본 곳이 없었습니다. 보고서를 쓰기 위해선 실제 부동산을 방문해 확인하고 서류를 검토해야 했으니까요. 뒤돌아보면 그때 일과 공부를 가장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40대에 팀장이 되었죠. 


오전엔 ‘공익활동연구소’, 오후엔 ‘부동산 팀’
2013년, 김앤장에 ‘사회공헌위원회’가 생겨 올해로 딱 10년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 전신으로 2007년 ‘공익활동연구소’가 있어서 내부적으로 노인정, 고아원 방문, 장애인 시설 등을 돌보는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실무적으로 일할 사람이 필요했던지 저를 찾아왔더군요. 제가 직장 내 연말 행사인 일일 찻집, 바자회 등을 하며 수익금 전부를 장애인시설에 기부하는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었거든요. 저는 부서 이동 제안에 너무 좋았는데, 부동산 팀에서는 안 된다고 했죠. 그래서 제가 지혜로운 안을 내었습니다. “그럼 반반씩 하면 안 될까요?”그렇게 해서 저는 공익활동연구소에서 오전, 부동산 팀에서 오후를 근무하는 아주 희한한 직원이 되었죠. 책상과 전화가 2개인 가운데,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하니, 지루하지 않고 시간도 조율하며 괜찮더라고요.(웃음) 이렇게 3~4년 정도를 즐겁게 근무했는데, 2013년 목영준 헌법재판소 재판관님이 퇴직 후, 저희 회사 사회공헌위원회 위원장으로 오게 되면서 공식적인 실무진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 부서에서 제 업무를 끝까지 마무리하고 김앤장에서만 34년 6개월 근무하다, 2021년 6월 퇴직하게 되었죠.


한결같은 10년 된 출퇴근 카풀  
저희 사무실에 변호사들이 많다 보니 종이 서류를 전달할 메신저 아르바이트가 많이 필요했습니다. 청년들을 이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연결시켜 주었는데 대략 200명 정도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직장을 다니면서 거의 30년 동안 차로 움직이며 광명시 하안동에 사는 여직원과는 평직원 입사부터 애 둘 낳고 과장이 될 때까지 10년 동안 출퇴근 카풀을 했습니다. 거리상 좀 돌아가 불편하더라도 시간을 맞춰 같이 출근하도록 도왔습니다. 여직원이 늦잠을 자서 늦게 내려와 “아! 죄송합니다.”를 연발해도 사고 없이 제가 퇴직할 때까지 카풀을 할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고 도와주는 것은 어릴 적부터 어머님을 보며 배웠던 것 같습니다. 


진정성 있는 봉사
퇴직 후 가장 보람 있었던 것은, 제가 없어도 후임자들이 사회공원위원회 업무를 지속적으로 할 수 있도록 연결할 수 있는 다리를 놓고 왔다는 겁니다. 저는 처음부터 이벤트성 봉사는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진정성 있는 봉사를 하되,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봉사를 하고 돌아올 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또 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져야지, 돈 몇 푼 주고 시간 때우러 왔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봉사는 아예 처음부터 하지 말자고 했었거든요. 예를 들어 어르신들 경복궁 투어를 할 때도 봉사자가 휠체어를 끌고, 해설가를 붙여드리고, 식사대접 할 때도 버스를 대절할 뿐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실 때 호두과자 한 봉지라도 손에 들고 가게 하는 거죠. 이런 마음을 진정성 있게 담아서 하는 게 저희 봉사모토였습니다. 재밌는 것은 연탄 봉사활동을 가면 20대 비서들은 “연탄이 왜 이리 무거워요?!”합니다. 당연하죠. 연탄을 처음 보고, 처음 만져보는 거니까요. 그런 직원들에게 3.65kg 연탄으로 겨울 난방을 위해 하루에 몇 장이 필요하고, 구멍을 잘 맞춰야하고,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을 뻔했던 스토리 등을 들려주면, 좋아하며 더 즐겁게 봉사를 할 수 있었죠. 사회공헌위원회 위원이었던 변호사님 한 분은 세상에서 제가 제일 부럽다고 했습니다. 봉사활동 할 것을 찾아다니며 월급도 받는다고요.(정말 그렇네요~)

 

김앤장 직원들의 연탄 봉사


은퇴 전, 2라운드 인생에 대한 마음의 준비
은퇴 후의 삶에 허무해 하는 선배들을 보며 나름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은퇴 전, 제 스스로 내려놓는 연습을 해서인지, 심리적으로 무너지는 느낌은 별로 없었습니다. 제 주변에선 은퇴 후 전원생활을 꿈꾸는 분이 많았어요. 물론 밭 갈고, 농사지으며, 자연을 보며 사는 것도 좋겠죠. 그동안 고생을 많이 해서 주어지는 보상처럼 한가로운 전원주택 생활이 가장 편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다르게 방향을 정해 놓았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시골에 들어가 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고 무엇보다 사람을 만나 어울리고, 지금도 꿈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게 좋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준비한 것이 바로 태국으로의 봉사활동입니다.


은퇴 후, 실제적 준비 
5년 전부터 육체적으로 잘 견디기 위해 생활 속 하체 근육운동을 해왔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운동을 꾸준히 했는데, 직장을 다니며 헬스장에 등록을 해도 빠지기 일쑤였거든요. 그리고 2020년 초반부터 2급 교원자격증을 받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원자격증인데, 코로나 시기에 인터넷으로 공부해 가는 과정이 만만치 않더군요. 48학점을 이수해야 하는데 3학점짜리 16과목을 공부하고 그에 따른 과제, 중간고사, 기말고사까지 봐야 학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2021년 11월에 과정을 마치고, 2022년 4월에 드디어 교육부에서 발급한 2급 교원자격증을 받았습니다. 이런 준비를 꾸준히 하니 태국 치앙라이 싸하쌋 학교에서 직접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는 선생님 비자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2022년 3월 태국에 가서 아이들도 만났고, 1년이 지나 올해 4월 다시 태국으로 왔습니다.

 

한국어 수업후 학생들이 좋아하는 한국 이름을 만들어 주고 찰칵!


태국 치앙라이 싸하쌋 학교
태국은 불교나라입니다. 90% 정도인 타이족이 우월적인 신분, 직위를 가지고 있고 나머지 10%가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반면 제가 있는 ‘치앙라이 싸하쌋’학교는 주로 산속에 살고 있는 12개의 소수부족 아이들이 다니는 사립 기독교학교로 아이들에게 학비를 전혀 받지 않습니다. 이곳에서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12개 소수부족의 아이들에게 태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태국에서는 소수부족들에게 교육의 문이 열려있지 않습니다. 소수부족은 가난하고, 학비도 없는 어려운 형편이라 공부하기 위해 멀리서도 옵니다. 유치원, 초중고가 다 있는 2,500명이 다니는 학교라(헉, 그렇게 많군요) 아침이면 바글바글 합니다. 이 학교는 유치원에 있는 아이들부터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 몽족, 카렌족, 라우족, 아카족 등등 아이들이 모여 있으니 이곳에서 태국어를 배울 때까지는 서로 대화가 안 되는 거죠. 우리나라에선 상상이 잘 안 될 겁니다. 땅은 태국 땅인데 소수민족 부모가 물려준 언어로는 태국 땅에 정착 할 수도 없고, 더욱이 태국사회에 나갈 수도 없으니, 어린이들에게 태국어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일깨워줍니다. 그 다음 영어, 한국어 순으로 공부를 하죠.


“진짜 가냐?”, “진짜 갔어!”
태국에서 생활하며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연락하니, “너 진짜 거기 있냐?, 1년만 살다 오냐?, 언제까지 있을 거냐?” 등을 물어봅니다. 태국은 3~5월에도 온도가 40도를 육박하고, 체감온도는 50도 정도 올라갑니다. ‘송크란’ 축제가 4월 중순에 있는데, 너무 더워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아무나 물총을 쏴도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니까요. 그러다보니 주변에서 저를 걱정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겠죠. 태국에서는 요즘 한류가 요행하다보니 한국어 선생님이 최고라고 많이 이야기 합니다. 시골동네에 제가 한국인에 외국인이다 보니 인기가 제법 많아 아침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받습니다. 저는 아이들 하나하나 다 알아보지 못하지만, 아이들은 저를 시장, 운동장 등에서 알아보며 1년 동안 많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큰 의미는 아니지만 작은 행복인 것 같습니다. 제 인생의 전반전이 ‘김앤장’에서의 삶이었다면, 이제 후반전 시작인데 건강이 되는 한 저는 태국에 75세까지 있으려 합니다. 1~2년 있다 온다는 생각이 아니라, 꾸준히 아이들을 가르치며 함께 하려 합니다. 

7명 태국 아이들, 부채춤으로 일약 동네 스타! 
작년 학교 축제 때 한국을 소개할 수 있는 내용으로 발표를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한국어 선생님은 저를 포함해 3명이 더 있는데, 한국어 학과가 정식적으로 들어오면서 중3~고3까지는 자기가 선택해서 배우고, 한 반은 1주일에 8~10시간씩 집중적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이 반은 환경미화도 한국어로 해놓을 정도입니다. 저는 담임은 맡지 않고 1주일에 1시간씩 여러 반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는데, 한국을 알릴 수 있는 것으로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다 부채춤이 생각났습니다. 때마침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한 ‘라차팟’ 대학교에 한국어 학과가 있어 한복을 빌려 왔어요. 그리고 스스로 자원하는 아이들을 포함해 총 7명에게 유튜브를 보며 열심히 부채춤 연습을 시켰는데, 연습을 하며 모두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겁니다. 아이들은 BTS를 보고 한류를 경험하며 자기들이 마치 한류에 속해 있는 인물이 된 것처럼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무대화장을 하고 한복에, 족두리에, 부채를 가지고 공연을 했는데, 심지어 치앙라이 중심가 시내 관광지에서 공연을 한 적도 있습니다. 수 백 명의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외국인들이 사진을 찍는 가운데 부채춤을 선보인 것이죠. 아이들은 스스로 스타가 되고 우리들은 스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태국 싸하쌋 학교 7명 학생들의 부채춤 공연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무려 4시간을… 그래도 정감 있어
아이들의 한국어 교재로는 한국과 태국이 합작해 만든 교재를 사용하는데, 학교에서 지원을 못해주니 가난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교재를 가지지 못했어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교재를 PPT로 만들어 복사를 해서 나눠주었습니다. 그러다 자원봉사자에게 자석칠판을 받을 기회가 있어 모음, 자음을 붙여 글씨를 알려주니 집중도가 더 좋아지더라고요. 제 스스로도 시청각 자료들을 더 연구하고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글 단어를 가르치면서 아이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노래로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을 4시간이나 부르려니 힘들더라고요. (웃음, 하지만 이 노래를 한국에서 할 기회가 있겠어요?) 할 기회가 없죠. 싸하쌋 학교는 점심시간에 여자애들은 고무줄놀이, 남자애들은 축구나 구슬치기 하는 경우도 많아요. 제가 어렸을 때 놀았던 모습을 보니 아이들에게 더 정감이 가고 가까워지더라고요. 한국 아이들과 1~2시간 있으면 엄청 스트레스 받을 일이 많은데 이곳에서는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습니다. 애들이 먼저 인사하고, 교무실에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미리 준비한 서랍 속 사탕, 과자를 주기도 하죠. 제가 떠듬떠듬 태국어 한마디를 써주면 아이들에게 박수를 받기까지 하니까요.


 소수 부족의 이름도 모르는 아이와의 교감
동남아는 거의 모계사회로 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들은 돈도 벌지 않고, 엄마가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고 아이도 거의 돌봐야 합니다. 소수 부족의 어떤 여자 아이였는데 이름도 몰라요. 그런데 그 아이는 저에게 와서 매번 안겨요. 저는 그 아이를 그냥 안아주었는데 뭔가 다르더라고요. 제가 생각할 때 이 아이는 저에게 아빠 품을 느끼는 게 아닌가 합니다. 안아줄 때 안정감을 느끼는 거죠. 말을 하고 싶지만 아이의 부족 말을 모르니 아쉬워요. 하지만 눈빛, 포옹, 안을 때 전해지는 따뜻함만으로도 서로 교감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한국의 노래, 음식, 문화, 한국어 등 이런 내용들로 아이들과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게 굉장히 좋은 경험을 줄 수 있습니다. 더불어 저도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많이 받아요. 이것이 없으면 제가 거기 오래 못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앞으로 시간이 지나고 아이들이 성장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고, 사회에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더 큰 보람을 갖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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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는 이틀 후에 떠날 분이라 준비할 것도 많고 마음이 분주할 텐데 차분히 인터뷰나 할 수 있을까하는 마음이 앞섰답니다. 하지만 이준응 선생님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로 시작해서 2시간 가까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셨죠. 글을 쓰는 지금도 태국에서 만날 아이들 이야기만 나오면 은퇴할 정도의 나이인가 싶을 정도로 밝아지던 선생님의 얼굴이 선연하게 떠오르네요. 태국에 갈 때 새 한복 7벌을 가지고 가니 더 이상 라차팟 대학교에서 한복을 빌리지 않아도 된다고 좋아하시는 모습까지도요. 태국 아이들에게 한글은 물론 떡볶이로 아몬랏 교장선생님까지 반하게 한 이준응 선생님. 75세까지 건강하게 그곳에서 새로운 후반전 인생을 활기차게 펼치시길 바라는 마음을 한가득 품고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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