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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근육을 단련하는 필사

문학/김단혜 에세이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7. 9. 20.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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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단혜 에세이]

글쓰기 근육을 단련하는 필사

 

  - 얼어붙은 거리를 휩쓸며 부는 차가운 바람이 펄럭거리게 하는 포장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서면

    카바이드 불의 길쭉한 불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고, 염색한 군용잠바를 입고 있는 중년의 사내가 술을 따르고

    안주를 구워 주고 있는 그런 선술집에서 그날 밤 우리 세 사람은 우연히 만났다.-

 

  ‘김승옥’의「서울, 1964년 겨울」을 필사하는 중입니다. 제게 필사의 경력은 조금 오래됩니다.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시가 맛있어서 혹은 시인이 좋아 한번 쓰고 싶어서 필사한 시가 100편에서 다시 1,000편으로 늘었습니다. 작가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보다 ‘인내심’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처럼 괭이를 쥐고, 암반을 깨고, 구멍을 깊이 뚫어야 합니다. 그가 달리기하면서 거르지 않는 이유는 근육은 이틀 이상 쉬면 긴장이 풀어지기 때문입니다.「카레 온 더 보더」로 황순원 문학상을 받은 작가 ‘하성란’은 이렇게 말합니다. ‘소설 쓰기는 줄타기 광대처럼 늘 줄 위에 서 있어야지 땅을 탐하면 무너진다.’ 그래서 해외여행 중에도 새벽 4시면 일어나 노트북을 켜고 앉아 있답니다.

 

  어쩌면 글을 쓰는 일은 재능이 아니라 ‘태도’입니다. 좋은 작품을 쓰는 작가를 보면 필사를 한 경우가 많습니다. 산업체 고등학교에 다니며 수업이 무료해진 작가 ‘신경숙’은 생이 지루해 필사를 시작한「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무슨 말인지 몰라 계속 베껴 쓰다 보니 소설 한 권을 다 썼다고 고백합니다. 책 읽는 여자, PD ‘정혜윤’은 괴테의「이탈리아 기행」을 필사합니다. 그래서 그녀가 내놓은 책들은 여행기 같은 북 리뷰 혹은 북 리뷰 같은 여행기로 만날 수 있습니다. 팟 캐스트 ‘빨간책방’을 운영하는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중2 때 김승옥의「무진기행」을 필사했습니다. 그 인생에 매료된 최초의 작가를 만나고, 소설이 너무 좋아 옮겨 적었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손으로 필사한 ‘무진기행’이 갖고 싶었다고 합니다. 옮겨 적으며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딛는 발판이 되어 주었다고 표현한 이동진의 글에서는 범접하지 못할 자신만의 색과 감성의 깊이가 느껴집니다. 시인 ‘안도현’도 백석의 시를 필사했다고 하지요. 안도현은 시를 쓰려면 손끝으로 쓰라고 합니다. 백석의 시를 건드린 그의 손끝의 감각은 그대로 시에 녹아납니다. 작가 ‘조정래’가 예비 며느리에게「태백산맥」을 필사시킨 일은 문학인들에게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작가 지망생 며느리도 아닌데 필사를 시킨 이유는 인생이란 한 자 한 자 쓰면서 한 걸음씩 나가는 것이다라는 것을 알려주려 했다지요. 신춘문예 당선작가인 K는 이동하의「잠든 도시와 산하」를 노트에 베끼고, 지난 10년 동안 슬픔, 외로움, 고독에 닿아야 할 분위기가 필요하면 필사 노트를 펼쳤다고 고백합니다.

 

  시를 쓰고 싶으면 시를 물고 늘어져야 합니다. 좋은 수필을 쓰고 싶으면 최소한 수필 10편 정도는 필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을 잘 쓰려면 좋은 소설을 필사해 봐야 그 치밀한 구성을 알게 됩니다. 올 한해 필사할 작품들이 스치듯 떠오릅니다. ‘와! 이런 수필 쓰고 싶어’라고 외치면서, 읽었던 이민자의「눈 오는 날의 에필로그」, 이동하의「매운 눈꽃」, 이우환의「곰팡이 핀 사과」, 천승세의「혜자의 눈꽃」, 천운영의「명랑」, 박완서의「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


  올해는 한 편 한 편 손으로 꾹꾹 눌러서 쓰려고요. 손끝으로도 쓰고 마음으로도 쓰려고요.

 

시를 사랑하고 영화를 즐겨보며
책과 바람난 여자 수필가 김단혜
삶의 향기를 찾아서 blog.naver.com/vipapple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95호 >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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