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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용마(龍馬)를 만나고 오다!

여행/일본 규슈 공동체여행기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7. 6. 15.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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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인물 2]

일본의 용마(龍馬)를 만나고 오다!

 

< 사카모토 료마 >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에 대해서 아시나요? 아마도 일본 메이지유신 역사를 잘 알거나「료마가 간다」라는 일본역사소설을 읽은 분들이 아니면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저에게도 나가사키를 방문하기 한 달 전, 일본 역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전까지는 매우 생소했지요. 하지만 이 사람은 일본인들에게는 마치 우리나라의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과 같은 인물입니다. 이제는 소설뿐만 아니라 수많은 만화, 드라마, 영화, 연극으로도 나오고 있죠. 심지어 2000년도에 지난 천 년간 일본 최고 정치지도자로 료마가 뽑힌 적이 있을 정도로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런 료마의 업적은 크게 세 가지인 것 같습니다.

  첫째로 메이지 정부를 수립하는데 기초를 형성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삿초동맹’薩長同盟(사쓰마번과 조슈번의 동맹)을 중재하여 성사시킨 것입니다. 둘째는 일본 최초의 무역주식회사인 ‘가메야마 샤추’龜山社中를 만든 것이며,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메이지 정부의 기본이념으로 발전하게 되는 ‘선중팔책’船中八策을 강구한 것입니다.

 

< 가메야마 샤추 터 >

 

  제가 여행했던 나가사키는 그가 수립했던 ‘가메야마 샤추’龜山社中의 터가 있습니다. ‘왜 이런 곳에 회사를 세우지?’ 처음 그곳을 오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습니다. 무역회사는 바다 바로 옆에 있을 것이라는 상상과는 달리 나가사키 안의 매우 높은 언덕 중턱에 터가 남아 있었죠. 마치 달동네 위에 회사를 차린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언덕 위에서 나가사키 시를 바라보니 단순히 왜 그가 이곳에 회사를 세웠는지를 넘어 그가 바라봤을 일본의 미래가 상상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무언가 ‘설렘’이며 동시에 생각을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가 제 마음에 선명히 있었지요. ‘설렘’은 이곳이 그가 본격적으로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한 곳이라서, 이후 그가 걸었던 행적들의 위대함 때문이었습니다. 반면 생각의 ‘복잡함’은 이곳이 일본 제국주의의 시작이었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지리적으로 이 언덕 꼭대기에서 나가사키시를 바라보면 왼쪽의 다른 높은 언덕 위에 ‘글로버 하우스’Glover House가 있습니다. 료마가 서양인들과 협상을 하거나 밀담을 나누었던 곳이죠. 또 언덕 밑 포구에는 서양인들과 무역을 담당했던 ‘데지마’出島가 있습니다. 이 두 곳에서 서양인들의 수발을 들었던 사람들은 그들이 노예로 잡아왔던 동남아시아인, 아프리카인들이었습니다. 그 모습에서 료마가 네델란드의 동인도회사VOC에서 단순히 경영방식들만을 배웠다고 생각되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더 나아가 세계열강들의 제국주의를 그대로 배웠지 않았을까요? 나가사키 포구 건너 쪽에 있는 땅을 보면 일본 근대화의 상징이자 제국주의의 상징인 ‘미쓰비시 조선소’가 보입니다. 이곳은 료마가 암살당하고, ‘가메야마 사츄’龜山社中가 붕괴된 이후에 본격적으로 미쓰비시 회사가 만들어진 곳입니다. 마치 이 회사는 료마의 회사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처럼 느껴졌지요.

 

  하지만 이런 사실들이 료마가 행했던 탁월한 일들에 대한 감탄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업적이 우리에게 불행의 시작이었을지 모르지만, 일본인에게는 영웅이었기 때문이죠. 그는 사무라이이자 상인이었으며, 일본 전체를 아우를 포부를 가진 정치가였습니다. 그가 했던 중요한 업적인  ‘삿초동맹’薩長同盟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쓰마번과 조슈번 사이의 연합이었습니다. 저는 그에 관한 소설을 보지 않았지만 그가 이 동맹을 중재하며 무슨 말을 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전율했고 여러 상념이 교차했습니다. 그가 상인기질로 양쪽 번 모두가 가질 이득으로 설득했을까요? 아니면 정치가로 그가 꿈꾸는 일본을 감동적으로 말하거나, 사무라이 기질로 서로 반목하는 양쪽 번을 단호하게 꾸짖었을까요? 이 사건은 마치 삼국지에서 오나라가 관우를 죽여서 촉나라와의 사이가 틀어진 가운데 한 사람이 그 두 나라를 중개하여 동맹을 맺도록 한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이 동맹이 중요한 이유는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피해없이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정권이 도쿠가와 막부에서 천황 중심으로 평화롭게 넘어갔습니다. 즉, 큰 피흘림 없이 근대화를 일으키려는 세력을 중심으로 일본의 통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 사카모토 료마의 상징물인 장화를 신고 나카사키시를 바라보는 모습 >

 

  이 한사람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친 걸까요? 료마는 현대 일본인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일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료마의 일대기를 읽으며 정신과 기백을 배우고, 경영철학을 확립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저도 료마가 세운 회사의 터 위에서 다시 생각해봅니다. 섬처럼 밖에 나갈 수 없는 정신상태로 살아온 한국 안에서 하루 먹고 사는 것에 아등바등하는 것은 어쩌면 조선시대 말기의 쇄국정책鎖國政策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전세계가 일일생활권으로 변해가는 21세기에 단순히 저 개인의 미래를 넘어 한국 그리고 세계의 메이지유신이 가능한지를 상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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