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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지마出島, 두 세계의 어긋난 만남

여행/일본 규슈 공동체여행기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7. 6. 15.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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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지마 탐방]

 데지마出島, 두 세계의 어긋난 만남

 

  혹시 엔도 슈샤큐의 ‘침묵’이란 소설을 읽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제목 ‘silence’으로 영화화되기도 한 이 작품은 일본 도쿠가와 막부시절 카톨릭에 대한 탄압을 다룬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의 상흔을 추스르기도 전에 만주에서 흩어진 부족들을 통합한 누르하치의 위협을 받고 있을 무렵, 일본에서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그리고 네덜란드의 서양세력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있었지요.

 

  저는 2017년 5월 초, 먼 시간이 지난 그곳 나가사키의‘데지마’出島에 발을 디디게 되었습니다. 영화에서도 나오는 네덜란드 상인들이 막부로부터 무역을 위해 유일하게 거주 허가를 받은 곳이지요. 같은 공간에서 여러 시간대가 교차하는 것을 자유롭게 상상하는 것은 여행자가 가진 놀라운 특권이겠지요? 저는‘데지마’를 통해 본 일본과 네덜란드 두 이질적인 세계의 만남에 대해서 짧은 이야기를 풀어놓아 보려 합니다.


  나가사키에서 만난 할머니 후미요상은 과거보다 현재가 중요하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계속하여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를 끄집어내는 한국에 대해 일본인들이 보통 가지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오로지 현재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본인들에게는 이런 과거를 회상하는 역사여행은 무의미한 일일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사란 단지 할머니가 손자에게 들려주는 재미난 이야기에 불과할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시간이 겹겹이 쌓인 ‘과거’들은 지금 ‘현재’의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주고, 또 지금의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결국 우리가 만들어 가는‘미래’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 사이를 특별한 섭리로 들어오는 신적인 개입이 없는 한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이런 의문이 듭니다. 이렇게 데지마의 시간을 헤집고 다니는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조선인일까요? 아니면 21세기의 아시아인이 되어가는 한국인일까요? 그런 점에서는 우리 역사도 재 비평, 재 평가되어져야할 것입니다.


[데지마 축소모형]



  보통‘트램’tram이라 불리우는 나가사키의 시내의 작은 전철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보이는 ‘데지마’는 작고 낡은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그만 공간 자체에서 나가사키 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세계를 향한 일본의 통로라는 자부심’이 그것이죠.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그 당시 일본인의 세상 밖을 향한 태도는 어떠했을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전국시대를 종결하고 통일의 기초를 놓은 오다 노부나가, 통일을 마무리 짓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도요토미 세력과의 분쟁을 마무리 짓고(세키가하라 전투) 일본을 재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쓰라는 일본역사에 매우 중요한 세 인물들을 연속적으로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서양문물인 조총을 대대적으로 도입하여 당시 가장 강력한 적이었던 다케다 신겐의 부대를 격파했습니다. 또한 무역을 장려하여 실제적 힘을 갖추었고 이를 통해 일본통일의 기초를 마련하였지요.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당시 조선을 침략할 때의 선봉장 중 한 사람으로 카톨릭 교도였던 고니시 유키나카를 임명합니다. 그러다 도쿠가와 막부가 시작되고 일본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자 막부는 로마교의 사상이 일본을 위협한다고 판단하여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하지요. 그런 역사가 나가사키의 운젠지역에 있는 시마바라성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16세기 동아시아의 바다는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국제적인 모습을 띄고 있었습니다. 해금정책 이후 명조 때에 닦아둔 무역로를 통해서 중국과 일본의 ‘정크선’을 비롯한 스페인, 포르투갈 및 영국, 네덜란드의 배들이 활발히 오고갔지요. 그런데 이들 서양세력 중 일본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나라는 네덜란드였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네덜란드 상인들이 종교적 활동은 일절 배제하고 오로지 무역에만 전념하겠다고 막부를 설득했기 때문이지요. 나아가 이들 네덜란드 상인들은 경쟁자였던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을 배제하기 위해서 막부에게 이들에 대한 모략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식민지건설의 경제적 목적뿐 아니라 로마교 세력의 확장도 중요했던 이들 나라와 달리 네덜란드는 종교에 대해 철저히 중립적 태도를 취했던 것이죠. 이 역시 참 아이러니인 것이 당시 네덜란드는 종교개혁가 칼빈을 받아들이고 이를 철저히 따랐다고 하는데, 이렇게 통상과 종교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은 총체적으로 사고하는 칼빈주의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떻게든 돈만 벌면 된다는 것이 그 당시 네덜란드의 모습이었습니다.

 

  일본, 도쿠가와 막부가 서양에 대해서 문을 완전히 닫아 걸지 않은 것은 이런 네덜란드라는 조그만 통로를 통하여 서양의 소식을 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미 한 번 서양문물의 위력을 경험한 섬나라 일본으로서는 문을 완전히 닫을 수 없었겠지요. 그래서 체제에 위협이 되는 종교는 철저히 배제하고 자신들이 필요한 것만 받아들이려고 한 겁니다.


[재현된 16세기 네덜란드 상관 식탁]


  이와 같은 일본의 서양과의 만남은 시간이 흘러 일본이 본격적으로 문을 열고 근대화를 추구하는‘메이지유신’으로 이어집니다. 나가사키에 있는 미쓰비시 조선소는 동양에서는 누구보다 빨리 스코틀랜드의 기술을 받아들여 근대적 조선소로 시작한 곳이지요. 여기서 수입하고 만든 배로 조선을 넘본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길을 따라서 일본은 아시아 전체에 커다란 고통과 엄청난 상처를 남기는 군국주의 국가로 뻗어나가게 됩니다.

 

  아마 일본 입장에서는 서양세력이 우월한 문물을 가지고 세계 곳곳을 식민지로 삼는 것을 보면서 이들을 따라할 뿐이었다고 변명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이런 일본의 주장에 대해서 칼빈의 후예를 자처하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뭐라 말할지도 궁금합니다. 철저히 경제적인 목적으로 동양을 착취했던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네덜란드도 2차대전의 피해국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시 조선은 어떠했나요? 물론 우리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식민지로 삼은 적은 없으니 이런 면에서 적어도 도덕적으로 떳떳한 부분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옆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항상 칼을 차고 물리적인 무武를 연마하며 어떻게든 한반도를 통해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사람들인 것을 눈감고 무시한 어리석음은 없었을까요? 중국에만 목매어 있지 않고 앞선 항해기술로 먼저 다른 나라를 찾아가고 관계를 맺었다면, 그렇게 우리의 실력을 키웠다면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요? 역설적으로 21세기에 이제라도 일본을 찾아가 먼저 손 내밀고 대화를 청해도 너무 늦지는 않을 겁니다. 일본 곳곳에는 우리가 모르지만 이러한 민간차원에서의 방문과 교류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테니까요.


황경태

joyful.hwang@gmail.com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92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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