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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듣는 말, 수어

2020년 12월호(134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1. 1. 13.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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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듣는 말, 수어

고등학교 때, 우연히 길을 묻는 청각장애인을 만났습니다. 그때에는 수어가 무엇인지도 모를 때라 바디랭귀지에 손바닥 글씨까지 총동원했음에도 길을 제대로 알려주지 못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었죠. ‘수어’를 배우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하긴 했었지만 그와는 전혀 무관한 영양사라는 직업으로 열심히 14년을 지냈습니다. 30대 중반, 잠시 삶의 브레이크를 걸어보고자 퇴사를 한 후, 우연히 ‘수어교실’ 광고를 보고 기초반 3개월을 수료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다시 수어와는 무관한 직장에 취업하느라 저의 수어실력은 기초반에 머물러 있었죠. 그러다가 ‘수어교실’을 운영하던 수어통역센터 사무국장님의 추천으로 ‘비버데프예술단’의 ‘수어보이미’ 봉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수어보이미로 시작한 수어통역사의 꿈
‘비버데프예술단’은 농인들이 모여 예술활동을 하는 모임으로, 주로 수어를 이용한 노래 공연을 하는데, 음악을 들을 수 없기에 그들은 ‘수어보이미’가 노래 가사와 박자를 수신호로 알려주면 그것에 맞춰 수어노래 공연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래 한 곡을 공연하기 위해 연습을 하려면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수어보이미와 농인들의 호흡이 중요하지요.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음악을 잘 들어야 하는 일인데, 제가 박치였던 것입니다. 이걸 극복해보고자 제 인생에서 ‘열심’이라는걸 처음 내본 것 같습니다. 음악을 들으며 박자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음악을 외우려 했으니까요. 남들은 3번만 들으면 되는데 저는 10번을 넘게, 아니 100번을 들어도 처음 박자를 늘 틀려서 너무 힘들었습니다. 


수어보이미 봉사를 한지 3년 쯤 지났을 때, 단장님에게 수어를 배우는 학생 한 명이 공연을 돕기 위해서 왔었습니다. 그런데 연습 도중 아무도 저를 쳐다보지 않고 모두가 그 학생을 보고 박자를 맞추더군요. 정말 만감이 교차 했습니다. 내가 도움이 안 되는 것도 능력이 안 되는 것도 부끄러웠고, 나를 믿지 못하는 농인들에게 섭섭하기도 했지요. 그래서 일을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수어보이미를 1년 정도 쉬었는데 어느 날 지방공연에 같이 갈 수어보이미가 없다며 연락이 왔습니다. 너무 멀어서 갈 사람이 없다는 말에 저는 다시 수어보이미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보통 공연을 가면 농인들과 저만 가다보니 건청인들과 농인들 사이의 의사소통은 제가 맡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수어를 잘 못하는데 주최측에서는 당연히 제가 수어를 잘 하는 줄 알고 대부분의 이야기를 저에게 하십니다. 간혹 다른 통역을 부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3세 아동이 말하는 정도의 수어를 하고 있었기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 다시 보이미 활동을 시작했을 때에는 ‘수어통역사’의 꿈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칠전팔기 수어통역사 자격증
수어통역사가 되지 않더라도 농인들이 하는 말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수어를 잘 하는 것보다 농인들을 이해하고 싶은 것이 저의 시작이었지요. 그런데 남 앞에 나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 수어통역사가 되는 길에 제 발목을 잡았습니다. 어릴 때 굉장히 엄한 가정에서, 아버님의 가르침에 늘 눈을 내리고 들어야했기에 성인이 되어서도 상대방을 잘 쳐다보지 못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음성 언어를 할 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수어는 시각 언어이다 보니 상대방과 눈을 맞추며 대화하는 것에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1년에 한 차례밖에 기회가 없는 수어통역사 자격증 시험. 이런 저의 성격도 극복해야 했고, 직장일과 병행하다 보니 번번이 시험에 낙방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나는 능력이 안 되는 걸까? 이제는 새로운 것을 도전하기엔 너무 나이가 들어버렸나?’별 생각을 다 하다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응시한 시험에 천운으로 합격을 했습니다. 이제 딱 1년이 지났네요. 지금은‘도봉구수어통역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수어는 부족해도 열심히 일하던 모습이 좋으셨는지 능력도 안되는 저를 직원으로 뽑아주셔서 많이 부족한 햇병아리이지만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수어를 통해 알게 된 또 다른 세상
수어를 배우고 사용하면서 농인도 장애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장애 중에 가장 덜 불편한 사람이 농인일거라 생각했었습니다.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못할 뿐, 스스로 활동할 수 있으니 다 될 것 같았지요. 그런데 건청인의 사회는 음성 언어가 지배하고 있더군요. 듣지 못하는 것만으로 얼마나 많은 제약이 있는지 알게 되었을 때 놀라웠습니다. 우리는 쉽게 안내방송을 듣고 따라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안내방송은 음성으로 나오지요. 농인은 알 수가 없습니다. 병원에 가면 환자 이름을 불러 진료를 받게 합니다. 농인은 자신의 이름이 불렸는지 알 방법이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사물과의 단절이지만 들리지 않는 것은 사람과의 단절이라는 말을 몸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농인의 친구가 되다
‘비버데프예술단’을 하며 저보다 수어를 잘 하는 사람을 마다하고 저에게 먼저 수어통역을 요청하는 농인을 보면 제가 이렇게 믿음을 주면서 잘 하고 있는 것인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심지어 저에게 신용카드까지 맡기는 농인도 있으니까요.
한번은 기차역에서 말이 불분명해 보이는 젊은 여자 분이 기차표를 예매하는 것 같았습니다. 농인도 연습하면 말을 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들리지 않으니 발음은 약간 불분명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은 혼자서 창구 직원과 필담을 동원해가며 대화를 하고 있었지만 주변의 소음과 직원의 입모양이 잘 보이지 않아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요. 간단한 내용이었기에 “가려는 곳이 어디냐? 언제 갈거냐? 몇 명이 가냐?”이런 질문을 대신 해줬고 예매를 도와주었습니다. 그 분은 제게 고마워하셨지만 저는 완벽하지 못한 제 수어 때문에 미안했고, 도리어 제 수어가 뭔가를 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웠습니다. 이렇게 한 걸음 농인과 가까워진 것 같았습니다.

수어의 허들
수어는 시각언어라는 점이 참 생소합니다. 예를 들어 ‘경찰에게 쫓기던 A는 산으로 도망갔다.’는 문장을 표현하려면 왼쪽에 경찰, 그리고 오른쪽에 A를 표현한 후 A가 더 오른쪽으로 도망가야 하지요. 이런 설명은 건청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아 대부분의 수어 공부하시는 분들이 어려워합니다. 그리고 제게 더 어려운 점은 표정입니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표정 변화가 많지 않은데, 특히 저는 어려서부터 표정 변화 없이 대화하는 것을 예의라고 배우고 자랐습니다. 하지만 수어는 똑같은 동작이지만 표정만 달라도 뜻이 전혀 달라지기에 표정이 아주 중요하답니다. 이건 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참 쉽지 않습니다. 


또 다른 어려운 점은 수어통역을 할 때 화자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통 외국어 동시통역에도 화자가 통역 시간을 기다려 주거나 시나리오를 주는데, 한국에서 수어통역은 시나리오나 기다림이 없습니다. 화자의 말하는 속도에 맞춰서 해야 하기에 쉽지 않은 일이지요.

수어, 도전해보세요!
외국에 나가 한국말을 한 두 마디 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고 힘이 되는 것 같이, 수어를 조금이라도 할 줄 아는 것, 그리고 수어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농인에게는 힘이 됩니다. 유창하게 수어를 구사하지 않아도 같은 언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농인을 이해하고 함께하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농인을 도와주고 싶어서 수어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농인은 불쌍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농인에게 불편한 ‘듣기’를 제가 대신 할 뿐이죠.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잘 함께하기 위해서 수어를 합니다. 수어나 수어통역사에 관심이 있으세요? 수어교실을 찾아가시면 새로운 세상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도봉구수어통역센터’ 김진숙

cellcm@naver.com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34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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