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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거리’

2023년 3월호(161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3. 11. 12.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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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거리’

 

 가르치고 배우는 자! 쫓고 쫓기는 자? 아닙니다. 아름답게 배우며 가르치는 자의 모습이 있기에 함께 담아보았습니다. 당연 선생님과 학생이냐고요? 아니죠! 둘 다 선생님이고요. 같다면 언어를 가르치는 분들이죠. 국어와 영어! 그런데 이 두 분이 어떻게 영어로 된 ‘대지’원서를 365일 읽었는지, 매일 20분을 통해 서로 무엇을 주고받았는지 입장이 다른 두 사람의 스토리를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어 같이 싣게 되었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더 미약하리라.’ 새로운 영어책을 고를 때마다 나를 움츠리게 하는 말이다. ‘개꼬리 3년 묻어 소꼬리 안 된다’는 말처럼 영어 공부에 관심을 기울인 지 수 년이 흘렀어도 나의 영어 실력은 일천하다. 배낭 여행지에서 현지인들과 소통하고 싶어 시작한 전화영어, 화상영어는 문법이 파괴된 돌고래식 문장이었다. 언감생심 유머를 섞어 말하는 그들만의 화법을 이해할 수 없어서 소외되길 반복하다가 아웃사이더의 심정이 이런 거구나! 자조 속에 자주 빠졌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3년 전 별실에서 영어 선생님과 단둘이 근무하는 기회를 얻었다. 선생님은〈결혼이야기〉시나리오를 출력해 오더니 매일 한 쪽씩 외워보자고 한다. 어눌하게 더듬거리며 따라가 보았지만 나의 영어실력이 달라지는 것을 체감하기는 어려웠다. 해가 바뀌고 아쉬운 마음으로 학교를 떠났다. 


 어느 날 선생님이《대지》원서 두 권을 갖고 왔다. 357쪽 분량이니 매일 한 쪽씩 전화로 해석해보라는 제안이었다. 나야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자신의 피 같은 시간을 기꺼이 내주는 일에 염치없이 덜컥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이성적인 생각이 솟아났지만, 이번 기회에 영어를 배우고 싶다는 욕심에 반색하고 말았다. 5살배기 아이를 돌보느라 쪽잠을 자면서도 우리의 전화영어는 매일매일 진행되었다. 감기가 들어 콜록대면서도, 학교 행정으로 바빠서 눈코 뜰 새 없을 때에도, 심지어 여행지에서도 시간을 내서 공부했다. 


  어느 날은 진지하게 물었다. 왜 이렇게 진심으로 나의 영어 강독에 정성을 쏟느냐고? 그러자 ‘도레미파솔라시도’로 목소리 톤을 나눈다면 ‘솔’의 소리로 답한다. 나에게서 생의 에너지가 전해져 온다고. 그 열렬한 의지 앞에 자신의 삶도 팽팽해진다고. 더불어 자신은 나에게 영어를 가르쳐준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혼자 읽는다면 그냥 해석이 안 되어도 넘어갈 텐데, 나랑 같이 읽으면 마치 음식을 꼭꼭 씹어 먹듯 곱씹으며 해석을 하게 되어 너무나 큰 도움이 된다고 답한다. 내가 미안해하지 않게 하려고 둘러댄 말일 수도 있으나, 우리는 드디어 책거리를 하게 되었다. 


 《대지》를 강독하면서 배움의 주체인 사람은 ‘개꼬리’,‘소꼬리’로 비유할 존재가 아님을, 그 당연한 진리를 불현듯 깨달았다. 매일매일 자라나는 생명체로 줄기에 새겨진 나이테처럼 겨울에는 성장을 멈춘 듯 보이지만 봄이 되면 다시 물이 오르고 새순을 뻗는 존재란 것을.《대지》는 바로 그런 책이었다. 나에게도 드디어 도약이란 시기가 온 것이다. 고질적으로 건너뛰던 조동사, 전치사, 가정법 과거 해석을 주의 깊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속도도 빨라졌다. 책거리를 하는 날 나의 개인교습 선생님이자, 사랑하는 동생과 같은 동료 도반 선생님이 책을 후루룩 펼쳐 보이면서 절반까지 읽을 때만 해도 몰랐는데, 중후반을 넘기면서 달라지기 시작하더니 후반부는 정말이지 깜짝 놀랄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면서 눈을 반짝인다.


 왕룽이 결혼식을 위해 오란을 데리러 가던 순간부터 이제는 자신의 관을 미리 준비해놓고 죽음을 기다리면서 두 아들의 부축을 받는 순간까지 우리는 책과 동행했다. 땅을 팔아 높은 이자를 받게 되면 그 몫을 형에게 주겠다는 둘째의 말을 듣고 왕룽이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화를 내자 아버지에게는 땅을 팔지 않겠다고 달래는 한편, 둘은 빙글빙글 웃으면서 땅을 팔자고 눈짓을 주고받는다. 왕룽은 끝까지 중얼거린다. 땅을 팔면 우리의 삶은 끝이라고. 땅은 누구도 훔쳐 가지 않는다고. 그러나 왕룽의 말은 허공에 흩어진다.


 내게 땅과 같은 것은 무엇일까? 누구도 훔쳐갈 수 없는 것! 그것은 내 마음 속에 사라지지 않는 열정이 아닐까? 하루하루 충실히 살고 싶다는 열정, 약속한 일은 완수하고 싶다는 열정, 책과 영화를 다른 사람의 눈이 아닌 나의 눈으로 해석해 내는 열정, 상대에 비친 내 모습도 중요하지만 내가 나 자신에게 비친 모습도 아름다웠으면 좋겠다는 열정, 그것은 내게 땅처럼 소중한 가치다. 그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오늘 책씻이를 하면서 그러한 열정을 지킨 것이 사랑스럽다.《달과 6펜스》,《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물망에 올렸다가《빨간 머리 앤》(루시 몽고메리)을 낙점했다. 책이 주는 전염은 강력하다. 왕룽 일가가 기근에 빠졌을 때, 오란이 품에 지니고 있던 진주마저 빼앗겼을 때, 우리의 생활까지 바닥에 떨어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앤’의 명랑성이 우리를 즐겁게 해줄 거라 기대하면서 이 책을 선택했다.
 부푼 마음으로 눈을 뜨는 내일이 있다는 것이 아찔할 정도로 행복하다. 일 년 동안 앤이 되어서 살 일은. 

 

 

의정부 효자고 국어교사 박희정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61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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