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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져야 답이 나온다 - 영화 ‘바이올린 플레이어’

인문학/영화 비평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7. 12. 8.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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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평]

깨어져야 답이 나온다 

영화 ‘바이올린 플레이어’


  저는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일을 합니다. 기술적인 부분을 가르치다보면 가끔 다음과 같은 아주 근본적 질문을 하곤 합니다. ‘연주자에게 악기는 어떤 의미가 있나?’, ‘연주자는 무엇을 위해 연주하는가?’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아무래도 이것이죠. ‘연주자란 과연 누구인가/어떤 존재인가?’ 물론 이론적인 대답은 간단하게 할 수 있겠지만, 상황에 맞고 현실적이면서 구체적인 대답을 시원하게 제시하지 못합니다. 혹시 여러분들도 자녀들에게 혹은 제자들에게, 아니면 함께 음악을 연주하거나 감상하시는 동료들과 제가 하는 이런 질문들을 나눠 보신 적이 있으세요? 좋아하는 음악을 수동적으로 감상하는 분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넘어서 음악의 본질에 대한 질문들을 해 본다면 음악과 함께 하는 인생이 매우 풍요로워 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질문들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기회를 저는 최근 ‘바이올린 플레이어’라는 영화를 보면서 가져 보았습니다. 이 영화는 지금부터 20년도 더 된 1994년에 개봉되었으나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화질도 좋지 않지만, 평론가들에게 아주 좋은 점수를 받은 프랑스 영화입니다. 제가 보통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소개하는 이유는 음악과 가까이 살든 그렇지 않든 관계없이 음악에 대한 아주 근본적 질문을 깊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줄거리를 따라 영화의 가치 찾아가기 

  먼저 이 영화의 줄거리를 간추려본다면 대략 이렇습니다. ‘아르몽’이라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자로서의 본질적 고뇌와 함께 자신만의 음악세계와 외부와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합니다. 그가 정의하는 진정한 음악이란 ‘바흐의 음악과 같이 형식과 균형 잡힌 고전주의 음악’이지요. 아르몽의 탁월한 연주 실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갈채와 환호를 주지만, 그는 그것에 결코 만족하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의 목표인 1)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연주하기 2) 연주자와 관객이 하나 되는 경험하기를 추구하기로 한 후에 기상천외한 결단을 내립니다. 즉 그가 찾은 새로운 무대는 바로 지하철 통로였습니다! 그곳은 화려한 무대도 엘리트 관객도 없는, 단지 오가는 사람들의 무질서와 형식과 균형이 깨어진 소음만이 있는 곳이 아닙니까? 아르몽은 본격적으로 노숙을 해가며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가운데 다양한 사건들을 겪으면서 깊은 차원의 마음의 변화들을 겪습니다. 이제 영화 속에서 제가 처음 질문했던 ‘음악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의 답을 찾아가 볼까요? 


연주자란 누구인가/어떤 존재인가? 

  많은 연주자들은 자신을 소개할 때 “저는 이런 음악을 전공했고, 이런 음악에 관심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지요. 물론 아르몽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나는 바이올린 독주자이고, 당신이 원하는 곡을 연주할 수는 있지만... 샤콘느(무반주 바이올린 독주곡)를 연주하고 싶어요!”라고 얘기하지요. 음악의 아버지 바흐를 자신의 음악으로 연주하려는 강한 의지가 담긴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신만의 음악의 색깔을 선명하게 드러내며 자신의 음악인생을 정의하는 것이 연주자의 진정한 모습일까요? 그는 이 영화에서 지하철역에서 하는 연주를 통해 ‘연주자란 어떤 존재인가?’를 완전히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늙은 첼리스트가 나타나 ‘바흐의 샤콘느(블라디미르 멘델스존) 변주곡’을 함께 연주할 것을 권했는데, 이 사람은 마치 아르몽의 생각을 완전히 깨버리기 위해 누군가가 보낸 것처럼 보이지요. 물론 이 합주는 늘 자신을 독주자로 정의했고 형식이 뚜렷하고 균형적인 고전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좋아했던 아르몽에게는 썩 내키지는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썩 내키지 않은 채로 머뭇거리던 아르몽은 늙은 거리의 악사(첼리스트)와 함께 연주를 해 나가면서 드디어 이상한 상황에서의 이상한 합주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갔지요. 이어서 그들 주위에 모인 많은 관객들도 함께 춤을 추며 각자가 들고 있던 모든 것을 악기로 삼았고, 지하철 통로는 어느새 모두를 위한 향연장으로 돌변합니다. 이런 신적계시와 같은 경험을 한 이후로 아르몽은 이전과 전혀 다른 연주자가 되었습니다. 협주곡 테이프를 틀어놓고 하나가 되어 협주를 하기도 하면서 모든 음악에 자유롭게 몰입하는 연주자로 바뀌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연주를 쉬지 않고 계속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연주자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음악세계만 주장하고 드러내기보다 음악을 통해 청중들과 무엇인가를 주고받는 가운데 서로 하나가 되어 악보에 그려진 음악이 아니라 더 풍성한 그 어떤 것을 창조해 가는 사람이 연주자가 아닌가 하는 겁니다.



연주자에게 악기는 어떤 의미가 있나? 

  위에서 아르몽이 경험한 사건으로 말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질문은 과연 연주자에게 있어 악기는 필수도구인가?하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연주자에 자신의 악기는 자기음악을 표현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지하도의 폭력배들이 자릿세를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르몽이 자기 몸처럼 여기는 바이올린을 박살내버리지요. 바로 이 사건을 통해 산산조각 난 것은 아르몽이 사랑하는 악기가 아니라 사실 ‘악기는 음악을 연주하는 필수도구다’라는 아르몽의 마음속에 가졌던 전제였습니다. 이런 벼락과 같은 음악적 계시를 받은 후 아르몽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물론 연주하기 위해 여느 때와 똑같이 악보를 읽고 암기도 했습니다. 그 후에 이제는 녹음기를 틀어놓고 온 몸으로 바이올린 켜는 흉내를 내는 ‘몸 연주’를 했지요. 그런데 며칠 뒤 녹음기까지 고장이 나자, 이제는 입으로 바이올린 소리를 내는 ‘입 연주’를 단행합니다. 이런 모습을 멀리서 지켜본 아르몽의 친구(연주기획가)는 그의 행동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를 비참하게 여겨 자신의 바이올린을 아르몽에게 가져다주지요.


  그렇다면 ‘연주자에게 악기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악기는 물론 음악을 표현하는 도구입니다. 그렇지만 ‘악기로만 연주한다’는 전제를 깨버린다면 사실상 모든 것이 악기가 되는 세계가 확 열리지요. 또 연주자들 사이에 만연한‘비싼 악기가 좋은 연주자를 만든다!’라는 것이 정말 좁은 생각이 아닐까요? 


연주자는 무엇을 위해 연주하는가?

  마지막으로 ‘연주자는 무엇을 위해 연주할까?’라는 질문입니다. 이 영화가 말하는 대답은 결국 ‘하나 되기 위해 연주한다!’는 겁니다. ‘연주자와 음악이, 그리고 연주자와 작곡자가, 무엇보다도 그 둘과 함께 청중이 하나 되는 창조적인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얼마나 직관적이며 중요한가요! 이것은 비단 연주자 뿐 아니라 청중들에게도 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이지요. 만약 청중들이 이런 자세를 가진다면, 연주를 수동적으로 듣고 단순히 ‘저 피아니스트 정말 피아노 잘 친다!’, ‘지휘 잘 한다!’등의 피상적인 칭찬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감동의 물결에 휩싸일 수 있을 겁니다. 


  반면에 아르몽의 친구 미까엘은 열정적인 연주자로 오케스트라에서 잘 나가는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결국 자신이 무엇을 위해 연주하는지 몰랐지요. 나중에 그는 바이올린을 시작한 것을 후회하며 연주자로서 눈에 보이는 실력의 한계 앞에 무릎 꿇고 죽음으로 자신의 삶을 끝냅니다. 아르몽에게도 물론 연주자로서의 위기는 있었습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듣든, 듣지 않든 끊임없이 연주하는 행위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던 거지요. 그래서 바이올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또 한 번의 충격적인 경험을 통해 확실한 답을 얻습니다. 그것은 죽어가는 노인의 간절한 한마디 “제발...계속 연주를 해주시오.”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생의 마지막 부탁이었고, 연주자 아르몽이 자신의 음악을 간절히 듣길 원하는 관객과 최고의 호흡을 나눌 절호의 기회였지요. 아르몽이 ‘바흐의 샤콘느’에 몰입한 15분 동안은 그 어떤 소리도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아르몽이 신고전주의라는 음악 사조의 틀을 넘어 바흐와 하나 되어지는 최고의 순간을 경험하지요. 아르몽만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지하통로에 살았던 자들과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하는 자들이 깨어나 기쁨을 누리며 빛의 세계로 자유롭게 나간 겁니다.

  

< 죽어가는 노인의 간절한 한마디 이후 15분간의 바흐의 샤콘느 >


  저는 ‘바이올린 플레이어’를 감상한 후, 자신만의 음악세계와 일반적인 생각이 깨어짐으로 진실된 답을 찾아간 아르몽처럼 음악의 근본적인 질문 앞에 시원한 답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또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과 동료 음악인들과 함께 이런 진실함을 나누려는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흐 음악원 고명희

010-6480-3487

bachgen@naver.com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98호 >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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