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 김미경이 만난 사람]
연극은
작가가 쏜 화살이
배우의 투명한 연기를 통해
정확하게 관객에게 꽂혀야 한다
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작년 연말 초, 지방에서 촬영을 마치고 새벽에 올라온 연극인 예수정씨를 만나러 압구정동으로 향했습니다. 은회색 머리카락과 또렷한 말투, 투명한 눈의 그녀 앞에서는 어느 것도 속일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더군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진지한 연극의 바다 속을 헤엄치는 듯한 인터뷰였습니다.
독문학과 연극과의 연결은?
대학시절 독문학을 전공하며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를 만났습니다.
‘극장은 시민 계몽공간이다’라고 한 브레히트의 극장에 대한 정의가 제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지요. 독일의 극작가이며 연출가인 브레히트, 그의 땅으로 날아가야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에 대해 아는 게 없던 전 불행하게도 가장 보수적인 시 뮌헨으로 가게 되었어요. 그 곳 대학(Ludwig Maximilian Uni.)에서는 괴테, 실러 등 고전주의 작가들에 대한 경외심이 너무나 커 브레히트에 대한 강의는 들을 기회가 없었어요. 드물게 젊은이들이 하는 소극장 공연을 통해 브레히트의 작품을 만나는 게 전부였죠. 다행인 것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명강의’를 체험한 것이었어요. 괴테의 ‘파우스트’ 1부를 한 번에 세 시간씩 세 번 즉, 일주일에 9시간을 1학기에, 똑같은 방법으로 2부를 2학기에 들었어요. 놀라웠던 것은 한 작품에 대해 얼마나 하실 말씀이 많으신지 교수님께선 숨도 안 쉬고 (제 마음에) 몰아치면서 그 작품을 열정적으로 학생들 앞에 펼쳐놓으시는 거였어요. 독일어라 잘 알아듣지 못했는데도 내용은 다 머리와 마음에 들어오는 것 같았죠. 와~ 방언도 아니고 하하, 정말 놀랍고 고마웠습니다.
1991년 독일에서 돌아온 후 바로 연극 연출을 했나요?
공부는 역부족으로 마치지 못하고 돌아야 했지만, 때마침 연극 연출을 할 기회가 주어졌어요. 행운이었죠. 하지만 채 열 살이 안 된 아이들을 떼어놓고 다니기가 부담스러웠어요. 어머니께서 늘 그러셨거든요. “열 살까진 무조건 부모 책임이다. 일을 하더라도 그 이후에 해라” 그래서 연출 작업할 땐 가끔이라도 살짝 데리고 와 한 쪽 옆에서 조용히 놀게 하기도 했어요.
‘배우는 나무 한 그루를 자세히 보지만, 연출은 전체 숲을 본다.’많이 들었던 이 말을 실제로 경험하게 된 좋은 기회였습니다. 연극배우인 저에게 고마운 배움의 기회였어요. 배우가 연기를 할 때에도 한 장면, 장면들을 전체적인 구조 속에서 이해하는 게 꼭 필요하니까요. 연극작업에서 배우인 우리의 역할이란 작품과 관객의 ‘매개자’라고나 할까요? 우리는 장인이 되어야하는 거죠. 해석의 장인, 해석대로 이행할 수 있어야 하는 장인!
배우가 자신이 연기한 인물에 푹 빠져, 작품이 끝났을 때 무척 힘들다고들 하던데, 현실과의 괴리는 어떻게 극복하는지?
저의 삶이야 원하든 원치 않든 제 존재의 근간이죠. 다만 작업이 방해받지 않도록 거리두기를 하려고 애쓸 뿐입니다. 제게 있어서, 연기해야 하는 인물은 저의 멘토입니다. 초등학교 졸업 후엔 또 중학교에 들어가는 것처럼, 여지껏 몰입했던 인물과의 이별은 당연하죠. 다음의 멘토(역할)를 만나기 위해 심호흡 하며 텅 비어지는 시간을 오히려 즐깁니다. 대학 때 ‘고대극회’에서 활동했는데 요즘말로 군기가 빡세었죠. 마지막 공연을 끝내고 뒷풀이에 가지 못했어요. 도리어 나의 역들과 차가운 이별을 선택했었어요. 내일이 마지막 공연이면 책상을 깨끗이 치우고, 그 위에 내일 밤부터 읽기 시작할 책 한 권을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마지막 공연을 갑니다. 겁쟁이여서 그랬을거에요.
작품의 주제는 어떻게 정하나요?
배우란 직업은 수동적이어서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선택당하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는 없더라도 하기 싫은 것을 안 할 자유가 있어요. 강력한 권리죠. 복이 많아 다양한 주제의 작품을 만났어요. 젊었을 때는 사회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을 좋아했어요. 막스프리쉬의 ‘만리장성’, 까뮈의 ‘정의의 사람들’,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 이런 작품들은 아직도 절 설레게 해요.
점점 나이가 들면서는 인간의 모순, 약점, 선한 의지 이런 것들을 주제로 다루는 작품을 하게 되었죠.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 마쯔다의 ‘바다와 양산’,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 이런 작품들은 삶처럼 참 사랑스러워요. 이런 표현이 맞진 않겠지만 ^^
< 예술의전당 The Art - '세일즈맨의 죽음' 예수정 배우 >
혹시 연출한 작품들은?
학교에서 학생들과 작품을 할 때 연출 쪽을 담당했죠. 제가 무대에 서지 않았으니까요. 학생들과 고전 작품을 많이 했습니다. 고전이야말로 인류의 유산임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죠. 고전은 비루하다 할 만한 인생 속에도 영웅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줘요. 여기서 영웅이란 남과 싸워 자기가 대장이 된다는 게 아니에요. 예를 들어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숨어버리지 않아요. 죽음으로 내딛게 되는 길인 줄 알면서도 고백하고 상대에게 직접적인 용서를 구해요. 이들을 더듬으면서 우리 모두 재활치료 들어간 것처럼 생기가 돌고 행복했었습니다. 이런 동지이자 제자인 학생들을 만나면서 닫혔던 저 자신이 많이 열리게 되었어요. ‘온유’보다는 ‘충성’만을 향해 달렸었는데 학생들이 제게 사랑을 넘치도록 주어 닫혔던 온유의 꼭지를 뗄 수 있었어요. 학생이 선생의 스승이 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유대인들도 제일 좋은 선생은 제자에게 배우는 사람이다라고 했다지요)
연극, 영화, 드라마 등의 활동을 하면서 해가 갈수록 익어가는 게 본인에게는 어떤가요?
‘익어지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늘 ‘날 것’같아야 되는 부담이 있죠.
연극의 경우, 석 달 연습 동안 ‘배반’이라는 주제를 향해 가기 위해 연습하며 배반의 이미지인 ‘노란 바위’를 찾아냈다면, 그 무거운 돌덩이를 등에 얹고 내 일상이 그 바위를 굴러 떨어지게 할까봐 일상을 버립니다. 그 이유는 하하 호호 웃고, 혹은 다투고, 순도가 떨어지는 말들을 입에 올리고 하는 일들이 거의 방해가 되기 때문이지요. 부끄럽지만 조금은 고통스럽습니다. 내가 왜 이 작품을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어요. 물론 해방의 시간이 있습니다. 무대에 들어서서 그 인물로 살기 시작하다가 막이 내리는 순간까지는 억압이 없죠. 이 작업을 안 해보신 분들은 보통 거꾸로 생각하시죠? 무대에 올라가서 아주 긴장하는 것으로요. 사실 정반대에요. 막 오르기 전까진 제 정신이 아닌 것처럼 긴장하다가 막 오르면 제정신이 되요. 무대 위에서의 그 삶을 편안히 사는 거죠(무대에 있는 시간은 문학과 예술에 대한 거의 종교적인 열정으로 빠져드는 거네요). 아마도요! 마음가짐 자체는 아마...
문학, 미술, 음악 등은 무언가를 표현하는 거잖아요.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왜 중요한가? 어찌 보면 조금은 철학적, 종교적 질문이기도 한데요. 내가 표현하는 것이 관객과 하나 되어서 회리바람처럼 올라가는 것은 본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나는 알면서도 스스로 고개 돌렸던 모두의 문제들, 그러나 통제되지 않는 나의 무의식은 억압 속에서 갑갑해하던 모두의 고통들을 가지고 이런 것들이 관객과 무대가 하나 되어 서로 숨통을 열어주는 것은 아닐까요?
평소 개인주의적인 삶을 살아온 것에 대한 세금을 내는 거죠. 십일조 한다고 면죄부를 얻을 수 없듯, 그렇다고 제 삶이 용서받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무언가는 해야 하는 거죠.
앞에서 언급한 ‘계몽’, ‘영웅’을 추구하는 데는 모종의 가족적 기질 같은 것이 있나요?
글쎄요... 저희 어머님도 배우셨어요. (‘전원일기’에서 할머니 역으로 나오신 ‘정애란’) 어머니는 제가 배우 하는 것을 엄청 반대하셨어요. 오히려 “넌 선생님을 했으면 좋겠다”하셨으니까요. 몰래 배우하려고 대학원에 들어갔고 새벽시간에 나가 연극 연습을 하곤 했지요. 나중에 딸이 이 길을 가는 것을 알고도 어머닌 공연을 보러 오지 않으셨어요. (섭섭하지 않으셨나요?) 저희 어머님과 함께 활동하셨던 선생님들께서 어머니는 왜 안 오시냐고도 물으시곤 했지요. 저는 제 일에 바빴고 몰두하는 일이 있어 사실 섭섭할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제 기억에 늘 소박하시지만 솔직하고 대범하신 분이었어요.
그리고 누구나 시대를 앞서가는 천재 외에는 계몽성(?)을 거부하진 않겠죠.
예수정 본인이 연극인으로 살아가는 ‘내적인 동인’이 무엇인가요?
문학을 통해 다양한 삶을 들여다보고, 또 많은 예술가들을 접하며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나는 누굴까? 삶이란 무엇일까?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계속 해나가는 방법이죠. 저기 보이는 문이 하나 있는데 저 문을 넘어서면 더 아름다운 길이 있을 것 같은 기쁨이 찾아 올 때 조금씩이나마 제 자신을 세척하고 감히 그 힘으로 무대에 섭니다.
기억에 남은 작품은?
작년 10월에 올린 ‘하얀 토끼 빨간 토끼’는 연기자로서의 자세를 시험하는 귀한 작품이었다고 생각해요. ‘내게 연극에 대한 진정성이 고스란히 살아있구나! 이것이 나를 살려주는 힘이구나’새삼 깨닫게 되었지요. 가장 좋아하고 기억에 남는 작품은 아리엘 도르프만(Ariel Dorfman)의 ‘과부들’(Widows)이란 작품입니다. 이문재 시인은 이 작품 제목이 과부들이 아니라 ‘광장의 어머니들’로 번역되어야 마땅하다 얘기했어요. 이 부분에 공감이에요.
“연극이나 연기 활동을 하지 않을 때는 침묵과 음악, 둘 다를 들어요. 귀한 글들을 읽으며 빵빵 얻어맞아야 머리가 깨끗해져요”라는 묘한 말을 하며 천진하게 웃으시는 예수정 씨. 딸 ‘김예나’도 연극 연출을 하고 있는데, 경제적으론 어려워도 젊었을 때 자신의 일에 몰두하면서 행복하면 좋은 거 아니냐고 하시더군요. 한편의 연극(연극명: 예수정)을 보는듯한 인터뷰는 끝나고서도 여운이 길게 남는 시간이었습니다.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편집부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99호 >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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