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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의 앞머리를 잡을 때까지...

2018년 4월호(제 102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4. 10.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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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trospective & Prospective 11]

기회의 앞머리를 잡을 때까지...


  뮤지컬 배역을 가리키는 용어 중 스윙(swing), 언더스터디(understudy)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윙은 뮤지컬 내 모든 배역을 숙지하고 있다가 비상시 배역에 투입될 수 있도록 훈련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평상시엔 아예 공연에 출연을 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지요. 이에 반해 언더스터디는 평상시엔 앙상블이나 합창 등을 하다가 비상시 메인 배우로 투입됩니다. 이러한 배역들을 소재로 만든 뮤지컬 중 하나가 ‘브로드웨이 42번가’라는 작품입니다. 뮤지컬 배우들과 창작자들에게 꿈의 무대인 ‘뉴욕’에서 ‘스타’가 탄생하는 과정을 현란한 탭댄스와 노래로 보여줍니다. 내용은 진부하지만 그만큼 사실적이기도 합니다. 재능은 있지만 이미 자리 잡은 대스타들에 치여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 작은 소녀가 불의의 사고로 무대에 서지 못한 스타 대신 출연해 새로운 스타가 된다는 내용입니다.
  스타의 대타로 무대에 서서 새로운 스타가 된 인생역전 드라마는 생각보다 꽤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파바로티, 레너드 번스타인도 다 대타로 무대에 섰다가 스타가 된 인물들입니다. 뛰어난 음악성과 함께 무대 위 카리스마, 더불어 이국적인 매력과 친근함을 겸비한 ‘21세기형 디바’라고 불리는 ‘다니엘 드 니스’는 2005년 영국 ‘글라인드본’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헨델의 <줄리오 체사레>에 클레오파트라 역으로 뒤늦게 대타 투입되어 글라인드본에 데뷔했습니다. 데이비드 맥비커 연출의 클레오파트라는 단순히 노래하고 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춤을 춰야 하는 어려운 배역임에도 ‘드 니스’는 이를 짧은 시간 내에 능숙하게 소화해 냈습니다. 게다가 이국적인 외모까지 더해져 리허설에선 연출가를 단박에 만족시켰을 뿐 아니라, 그녀가 시종일관 뿜어내는 에너지와 아름다움에 관객들은 완전히 넋이 나갔습니다. 그리고 ‘드 니스’는 이 출연을 계기로 만나게 된 글라인드본 오페라 페스티벌 창립자의 손자이자, 가족 사업을 물려받은 대표인 ‘거스 크리스티’와 러브 스토리를 만들어 2009년 결혼하게 되면서 ‘미세스 글라인드본’, 즉 글라인드본 오페라 페스티벌의 안주인이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다니엘 드 니스’는 억세게 운이 좋은 신데렐라라 생각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어릴 때부터의 행보를 살펴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음악, 연기와 춤 등을 일찍이 익히며 무대와 친근해진 그녀는 불과 9세에 호주의 한 TV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휘트니 휴스턴’ 노래 메들리를 불러 최연소 우승을 차지합니다. 그 후 오페라 가수의 꿈을 꾸기 시작했고 10세 때 가족 모두가 미국 LA로 이주한 후 디즈니 광고 뿐 아니라 LA Kids라는 시리즈물의 사회자로 출연하였고, 15세 때는 뮤지컬 레미제라블 출연, 16세에는 에미상을 수상합니다. 19세에는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으로 ‘메트’에 데뷔까지 하게 되는데, 그 후 드 니스는 바로크에서 모차르트, 도니제티, 로시니 등에 이르는 다양한 레퍼토리에서 주역을 맡아 활동하고 있으며, 타고난 음색과 성량으로 뮤지컬계에서 러브콜도 함께 받는 전천후 가수가 되었습니다.

  몇 년 전 제가 기획했던 오페라 중에서도 대역으로 스타가 된 분이 있었습니다. 모 유명대학 성악과 L교수님이 맡은 역은 ‘기사장’(오페라 돈조바니의 심판관 역)으로 분량은 작으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임팩트가 강한 배역으로 풍부한 성량과 자연스런 연기력을 요하는 역할이었습니다. 공연은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4회였는데, 다른 배역은 더블 캐스팅이었으나 그 배역은 출연분량이 두 장면이라 그 분 혼자 4회 공연에 모두 출연하기로 하였습니다.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저녁 7시 30분에 공연이 시작되었지만, 일요일 저녁공연은 티켓 마케팅이 어려워서 공연을 낮 4시로 계획했습니다. 멋진 무대와 성악가들의 열연으로 거의 모든 회 차의 공연은 매진이었습니다. 행복한 마음으로 마지막 일요일을 준비하는데...

  공연 시작이 4시이므로 2시 반부터 장면에 등장하는 순서대로 분장실에 출연자들이 도착하여야합니다. 그런데 3시가 넘도록 기사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평소 약속시간을 잘 지키시는 분이니 곧 오시겠지 생각했지요. 3시 30분이 넘어도 오시지 않아 전화를 걸었습니다. 
  “선생님...오고 계시지요?”
  “아~ 손 과장, 뭘 벌써부터 전화하고 그래? 내가 6시까지 맞춰갈게.” 
  그 분은 공연시간을 7시 30분으로 잘못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빨리 대책을 강구해야 했습니다. 무대 뒤 분장실마다 SOS를 쳤습니다. 마지막 공연이라 전 출연자들이 공연을 보러 와 있었습니다. 
  “긴급 공지사항입니다. 기사장 역할을 한번이라도 해본 적 있는 분은 즉시 기획자에게 연락주시길 바랍니다. 긴급사항입니다.”

  그때 공연에서 단역을 맡은 성악가가 대학시절 기사장 역할을 한 적이 있다고 알려왔습니다. 마침 더블 캐스팅으로 어제 공연을 마쳐서 마지막 공연을 구경 왔던 참이었습니다. 서둘러 분장을 시키고 옷을 입혔지요. 원래 배역은 풍채가 넉넉하시고 체격이 큰 분인데 새로운 기사장은 호리호리하고 키가 컸습니다. 그러나 그런 건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의상 속에 솜을 잔뜩 넣어 좋은 풍채로 보이게 위장(?)했습니다. 공연이 시작되고 단역 성악가는 멋진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저분이 저렇게 노래를 잘했나 싶을 정도로 음악성도 훌륭했지요. 1막이 거의 끝나갈 때 원래 배역의 기사장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용인에서부터 오토바이 택배아저씨의 뒷자리에 타고 초고속으로 도착하셨습니다. 무사히 공연이 마쳐지고 긴급한 순간 우리를 구해준 단역 성악가에게 모두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 후 그분은 우리가 주최하는 오페라마다 주요배역을 따내며 오페라계에서 지금까지 승승장구하고 계십니다. 
  이태리 토리노 박물관에는 부조 형태의 조각 작품이 있는데 그 조각의 앞머리에는 머리카락이 풍성하고 반면 뒤통수는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는 대머리입니다. 그는 바로 제우스의 아들 카이로스, ‘기회의 신’입니다. 커다란 날개도 모자라 발에 작은 날개가 달려있고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한손에는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있습니다.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라 사람들이 웃음 짓곤 하는데 그 조각상에 새겨져 있는 글귀를 보고나면 사람들은 모두 숙연해진다고 합니다.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이 나를 보았을 때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고,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내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다시는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발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함이다. 나의 이름은... ‘기회’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기회가 없어서 운이 없어서 라고들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과연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자신의 능력을 100% 발휘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위에 나열된 사람들은 평소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아 언제든 무대에 오를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들입니다. 금수저가 아니라고, 운이 없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고 내 앞에 기회가 왔을 때 머뭇거리지 않고 확 낚아 챌 수 있도록 차근차근 자신의 능력을 갈고 닦아놓읍시다. 그렇다면 기회의 신 카이로스가 슬쩍 앞머리를 내어줄지도 모릅니다.

예술의전당 창의문화팀장 손미정
mirha@sac.or.kr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102호 >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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