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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이 짧은 사람들

2018년 4월호(제 102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4. 16.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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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통신 노익호의 지휘자이야기 1]

팔이 짧은 사람들


  올해 4월호부터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칠레통신 노익호님의 지휘자와 기타 등 음악과 관련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그의 맛깔스런 필치로 싣게 되었습니다.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의 독자들을 위해 흔쾌히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는 팔이 짧았을 뿐만 아니라 다리도 짧고, 모두가 짤뚱했음에도 축구사에 찬연히 빛나는 인물로 남아 있습니다. 이에 질세라 팔도 짧고, 손가락도 짧은 저도 명색은 기타리스트랍니다. 베를린에서 공부를 준비할 때 가뜩이나 키가 작은 저보다 몇 cm 더 작은 키타리스트 ‘이판식’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제 앞에서 기타로 ‘아벨 깔레바로’의 ‘깜뽀’(Campo-대초원)를 기막히게 연주해주어서 몹시 감명 깊었더랬습니다. ‘어떻게 저리 짧은 손가락으로 칠 수 있단 말인가!...’ 하면서요. 기회가 되어 이런 넋두리식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바흐의 곡을 치고 싶은데, 손가락이 짧아 바흐의 곡은 운지가 불가능합니다. 어쩌죠?”

  빙긋이 듣고 있던 이판식씨는 단박에 “안치면 되죠!”라고 답을 해 주었습니다. 지금 회상해 보더라도 기막힌 명답이었습니다. 사실,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치더라도 다 못 칠 명곡들이 서고에 가득 차 있는데 말입니다. 왠지 바흐를 쳐야 행세할 수 있는 거 아니냐는 대세가 두려웠던 겁니다. 이쯤에서, 짧은 팔의 소유자이면서 자신의 길을 걷는데 어떤 환경이나 난관에도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은 ‘개천에서 용 난’ 인물을 소개하겠습니다. 구스타보 두다멜(GUSTAVO DUDAMEL)이 바로 그입니다. 스페인어 현지발음으로는 새는 발음 ‘쓰’를 포함하여 ‘구쓰따보 두다멜’입니다. 이미 초중량급 지휘자가 되어 알려진 많은 얘기들이 있으니 다시 소개할 필요가 없을 정도가 되었군요. 



  아무튼, 그래도 몇 가지를 소개해볼까요? 그의 아버지는 트롬본 연주자였습니다. 어린 구쓰따보는 아버지가 아들 앞에서 연주해주는 흥에 겨운 살사(쿠바 등지에서 추는 춤)곡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구쓰따보는 아버지처럼 트롬본을 불고 싶었는데 팔이 짧아 포기하고 말았죠. 

  그래서 간편한 리코더를 불다가 바이올린으로 갈아탑니다. 할아버지는 다소 궁색하게 그럭저럭 사는 아들이 음악가인게 못마땅해 손자가 음악가가 되는 것, 그것도 바이올린만큼은 절대 반대했습니다. 집안에서 연습할 때 마다 앵겨주는 소음을 견딜 수 없어서였다죠. 

  허나, 인생은 다 그런 것. 구쓰따보에 대한 사랑이 소음을 견디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되려 온갖 사랑으로 보듬어 줍니다. 이렇게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구쓰따보는 오늘날 위대한 지휘자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지난 3월 8일, 베네수엘라가 낳은 가장 유명한 인물 ‘구쓰따보 두다멜’이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이하 빈필)를 이끌고 ‘칠레 산티아고 시립극장’에 나타났습니다. 청중들은 기꺼이 이 젊은 거장을 기립박수로 맞이했습니다. 산티아고의 클래식 팬들이 이리도 열광하는 건 처음 보았습니다. 몹시도 점잖은 양반의 나라 칠레인데 말입니다. 이날 브람스의 ‘대학축전 서곡’,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 ‘브람스 교향곡 1번’을 연주했습니다. 아담하지만 결코 작지 않은 고색창연한 산티아고 시립극장의 무대를 88인의 총주로 꽉 채우며 연주한 ‘대학축전 서곡’은 빈필의 공으로 돌리고 싶군요. 부드러우면서도 극강의 소리를 들려주었으니까요. 물론 이렇게 된 데는 구쓰따보 두다멜의 겸허한, 정말 제대로 겸허한 자세 덕분이며, 이런 자세로 단원들과 호흡을 맞춰 얻어진 결과물입니다. 


< 칠레에서 연주한 몇일 뒤에 부에노스아이레스 테아트론 클론에서 연주한

구쓰따보 두다멜이 지휘한 브람스의 대학축제서곡 >


  이날 구쓰따보 두다멜에게서 과연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살사의 느낌이 거룩한 브람스의 음악에도 배어나올지 아주 궁금했습니다. 계속 되어지는 최상의 소리의 향연으로 인하여 그만 잊고 있다가 브람스의 교향곡 1번 3악장 중간쯤에서 그가 갑자기 무릎을 굽혀 잔뜩 웅크린 모습으로 지휘를 하여 예의 경쾌한 리듬감을 보여주었습니다. 워낙 전통에 빛나는 빈필을 의식했는지, 아님 브람스 음악의 정통성 때문이었는지 이날 공연은 전체적으로 무난한 연주를 들려주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거의 제일 뒤쪽 편, 정중앙에서 살짝 오른쪽에 3명의 트롬본주자들이 자리하고 있던 것입니다. 트롬본 주자였던 아버지를 염두에 두었던 것일까요? 아무튼 4악장에서 트롬본 소리가 대단히 육중하고 멋지게 들리는 기막힌 감흥을 주었습니다. 더욱 감동을 준 것은 그의 인사법입니다. 연주가 끝날 때마다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다보니 지휘자의 동선을 놓쳤는데 한참을 두리번거려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단상에 올라가 환호하는 군중에게 답하는 법이 없더군요. 단원 사이에 서서 단원들에게 공을 돌립디다. 게다가 같이 대동한 빈필 단원들의 복장은 구쓰따보 두다멜이 입고 있는 연미복과 똑같기에 더욱 구별이 안 되었고요. 같은 양복점에서 맞췄는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의 경력을 아주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세상에서 지휘자가 호령하기 가장 까다롭다는(사실은 고약스러운) 교향악단인 빈필이 매년 새해 첫날 갖는 신년음악회에 2017년, 구쓰따보 두다멜을 초청하였습니다. 구쓰따보 두다멜은 역대 최연소 신년음악회에 서는 지휘자로 이름을 내며 빈필과 함께 ‘요한 시트라우스’의 ‘라데츠키 행진곡’을 연주하였고요. 또한 2009년부터 지금까지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있습니다. 그를 세상에 알리게 한 자국의 시몬 볼리바르 교향악단의 상임도 겸하고 있습니다.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교향악단의 단원들이 성인이 되다보니 시몬 볼리바르 교향악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10살 때 구쓰따보는 빈민 청소년을 위한 음악교육프로그램 엘시스테마(영어로 바꿔보자면 The System)를 통해 음악을 접했고, 엘시스테마의 창시자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에게 지휘도 배우게 됩니다. 지금의 모습이 어찌된 영문인지 짐작할 수 없으리만치 순전히 베네수엘라 안에서 배우고 발현했으니 놀라움을 금치 못할 밖에요. 지면의 제한을 감사히 여길만치 이쯤에서 여운을 남겨야 젊은 거장, 영웅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습니까!


< Gustavo Dudamel and the Teresa Carreño Youth Orchestra’s TED talk >


  누구나 아니, 거의 모두가 잘 닦여진 기성 연주자들로 구성된 교향악단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지휘하고 싶지 않을까요? 그러나 여기 구쓰따보 두다멜은 빈곤층에 가까운 아이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 주며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를 이끌어, 당당히 도이췌 그라모폰의 라벨로 2008년 Fiesta라는 앨범음반을 제작하기에 이릅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구쓰따보 두다멜이 칠레 산티아고에 방문하여 준 덕분에 그동안 잊고 지냈던 지휘자 열전에 불을 댕겼을 뿐만 아니라, 그의 행보를 지켜보는 기쁨으로 한동안 들떠 지낼 것이 분명합니다. 비바 구쓰따보!


칠레에서 노익호
melquisedec.puentealt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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