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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을 통한 소통의 달인! 금난새 지휘자를 만나다!

2018년 4월호(제 102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4. 12.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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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김미경이 만난 사람]

클래식을 통한 소통의 달인! 

금난새 지휘자를 만나다!


  2월 26일 오후 3시, 금난새 지휘자님을 만나기 위해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 3층 시립교향악단 연습실에 도착했습니다. 연습실 복도에서 앉아 기다리는데 2월 28일 150회 정기연주회를 위해 연습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귓전을 울립니다. 인터뷰의 기다림을 잠시 멀리하고 무대에 올리기 전의 음악을 먼저 들을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에 빠져들 즈음, 문이 열리더니 우르르 단원들이 나오더군요. 정신을 차리고, 연습실에 발을 들여놓으니, 연주자들이 방금 남기고 간 음악의 열정이 느껴졌습니다. 안내를 받고 지휘자실에 들어서자 금난새 지휘자님이 밝은 얼굴에 환한 미소로 우리를 반겨주셨습니다.



   금난새 지휘자 프로필
■ 서울대 졸업 후 베를린음대에서 ‘라벤슈타인’ 사사
■ 1977년 최고 명성의 카라얀 콩쿠르 입상 뒤 유러피안 마스터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를 거쳐
   모스크바 필하모닉, 독일 캄머 오케스트라 등을 지휘
■ KBS교향악단 전임지휘자와 수원시향, 경기필하모닉, 인천시향 상임 지휘자를 역임
■ 1998년부터 ‘벤처 오케스트라’인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현, 뉴월드 필하모닉)를 창단해 왕성한 활동 중
■ 2013년부터 서울예술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 2015년부터 현 성남시립예술단의 총감독이자 상임지휘자

몇 년 전인지 ‘예술의전당’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를 연주하시고 “여러분 아름답지 않나요?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아무런 감흥을 못 느끼신다면 본인의 감성을 한번 의심해 보셔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웃으셨는데 음악도 음악이지만, 기억에 오래 남았습니다. 다른 분들보다도 클래식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기술이 탁월하신 것 같아요.
  제가 청소년 때 꿈이 많았습니다. 외교관이 될까? 그림에 소질이 있으니 화가가 될까? 하지만, 1960년대 텔레비전을 통해 ‘레너드 번스타인’이 뉴욕 필에서 청소년을 위한 콘서트를 지휘하는 모습을 보며 음악도 좋아했던 저는 ‘아! 지휘자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 청중에게 클래식을 전달하는 부분에 있어 그분의 영향을 받았죠. 그 당시 미국은 문화적으로 수준이 높은 차원은 아니어서 유럽 사람들이 거의 지휘자였습니다. 이런 속에서 미국 출신의 밝은 지휘자 ‘레나드 번스타인’이 나온 것이죠. 사실 인생을 살다보면 기회가 오기 마련인데 번스타인도 원래 지휘하기로 되어 있던 ‘브루너 윌터’가 갑자기 아픈 바람에 교체되었죠. 물론 브루너 윌터의 조수로 있으면서 옆에서 다 보고 배우고 했겠지만, 번스타인 자신도 지휘자로서의 재능이 있었고, 상황에 대처 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던 것이죠. 이렇게 저는 번스타인의 영향을 받아 클래식에 있어서 청중의 중요성과 청중과의 교감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12년 정도 KBS에 있으면서 개인적으로 1년에 두 번 4박 5일 지방공연을 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지방공연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고의 변화가 필요한 것이죠. 외국으로 공연을 가는 것 뿐 아니라, 국내 지방공연도 중요한 이유는 그만큼 정기적으로 가게 될 때 저와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통해 클래식이 알려지기 때문입니다. 
  또, 예술의전당에서 청소년 프로젝트로 음악회 의뢰가 들어왔을 때 이것을 준비하는 분들 입장에서는 그리 중요한 프로젝트가 아니었습니다. 외국 오케스트라가 오는 것, 세계적인 음악가가 오는 것이 필요한 것이죠. 하지만 저는 미래의 청중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 않나 생각해 그것을 덥석하겠다고 했습니다. 1년 정도를 재밌게 공연을 하면서 히트를 쳤죠. 청소년 음악회를 진행하면서 단순히 음악 해설을 잘한 것이 아니라, 이벤트적인 것도 넣어 보기도 하고, 표도 공짜표를 돌리는 게 아니라 티켓 값 2,000원을 본인들이 구입하게 해서 표를 사는 연습도 하게 했죠. 총 9회를 했는데 100% 매진이었어요. 공연 제목도 ‘청소년 음악회 정기연주회’가 아니라 ‘금난새와 함께하는 세계음악여행’으로 바꾸는 아이디어도 냈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영국, 체코, 스칸디나비아 등 나라별로 작곡가들을 택했죠. 예를 들어 1994년도 ‘릴레 함메르 동계올림픽’때 이태리와 브라질의 경기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연주복을 입고 연주를 하고, 나중에는 이태리 국기의 레드, 화이트, 그린 색깔로 옷을 바꿔 연주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진행을 하는데 밖에서 노랫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연주하다가 스톱하고 “뭐죠?”하며 노랫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니 거기에 이태리 사람이 노래를 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태리 사람은 “여기서 이태리를 위한 밤을 한다고 해서 왔다.” 오~ 그래? 그럼 오라고! 물론 각본을 짰죠. (제가 이태리 대사관에 노래 잘하는 이태리 사람을 보내 달라 주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군인 중에 노래 잘하는 이태리 사람을 추천해줬죠) “무슨 노래?” “오솔레미오”하며 이렇게 진행도 했어요.

  믿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제가 원래 말을 못했습니다. 음악학적으로 또릿또릿하게 말 잘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지요. 전 약간 어눌한데 사람들이 제가 말을 맛있게 한다고(절대공감)해요. 음...실토를 하면 그런거죠. 처음에는 무대에서 더듬고 그랬는데 이제는 실수하는 것을 도리어 즐긴다고 할까요? 그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는 것처럼 사람들은 제가 실수할 때에 더 친근하게 느껴지고 마음이 열린다고 합니다. 어떨 땐 일부러 실수도 하죠. “아하 영업비밀 다 나오네~”(지휘자님이 영업비밀이라는 재밌는 말을 쓰시더군요) 연도를 알면서도 “아~그게?”물론 어떨 땐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끌어가고자 합니다. 놀라웠던 것은 제가 1974년 독일 베를린에서 공부할 때 독일 사람들은 1년 전에 표를 예매하고, 베를린 필 연주나 다른 오페라 공연 등에 사람들이 꽉 차있는 것을 보면서, ‘문화가 생활화 되어 있구나!’를 뼈저리게 느꼈죠. 우린 공연 티켓이 다 팔리지도 않고, 공짜표도 많은데 말입니다. 그래서 소비자는 없는데 최고의 제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따라서 좋은 연주자도 필요하고 청중도 필요한 것이죠.

지난 성남시향 정기연주회 공연이 끝난 후, 관객들이 박수를 치는데 지휘자님이 단원들이 다 나갈 때까지 계속 박수를 치며 제일 나중에 나가신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치 제자들을 다 보내고 스승만 남아 있는 것 같은 감동이었죠. 
  보통 사람들은 ‘이중인격자다’하면 나쁘다 생각하잖아요? 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면 이중보다 더 카멜레온처럼 색깔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만약 청소년과 대화할 때에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서 대화를 해야 되는데 내가 그 위에서 이야기 한다면 접점이 없게 되잖아요. 동양에서는 위계질서가 있어 튀고, 반항적인 것을 싫어하는데 사실 저는 반항아였고, 젊었을 때 형식적인 게 싫었죠. 
  서양에서는 연주를 마친 후, 솔리스트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다 나갈 때까지 박수를 치는데 우리는 지휘자만 인사하고 나가면 청중들이 그냥 나가는 경우가 있어요. 심지어 지방에 가면 연주가 끝나자마자 불을 바로 끄죠. 저는 NO!! 단원들과 청중이 다 나간 다음에 불을 꺼야지, 3~4분정도의 시간인데 작은 거지만 이게 배려이지 않나요? 그냥 불 끄면 나가라 하는 것이죠. 그래서 공연이 끝나고 단원들이 다 나갈 때까지 제가 박수를 치면 우리 단원들도 기분이 좋고, 저 또한 얼마의 시간이지만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관객들과 마주하니 좋은 것이죠. 
     
지휘를 공부하시면서 생각나는 스승과 영향 받은 지휘자
  저는 한국에서 작곡을 공부했고 독일로 갔는데, 그 이야기를 잠시 하자면 27세, 1974년 단수 여권을 가지고 유학을 가려고 간 게 아니라 스웨덴 스톡홀름에 회의 차 가게 되었죠. 회의를 마치고, 베를린에 도착해 대학에 가서 다짜고짜 여기 지휘과가 있느냐, 가르치는 교수님이 있느냐고 물어보니 두 사람이 있다고 하더군요. ‘알렌도르프’와 ‘라빈스타인’ 그러면서 집 전화번호를 받았습니다. 두 교수님의 전화번호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왠지 알렌도르프는 독일 장군 이름 같고, 루빈스타인? 라빈스타인! 이 이름이 음악가 같아 바로 전화를 드렸죠.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교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전 한국에서 온 금난새 학생인데 지휘를 공부하고 싶고... 교수님은 내일 2시에 시간되면 집으로 오라하시더군요. 드디어 다음날, 거실에서 우리나라는 어떻고, 아버지는... 지휘과가 없고... 교수님께서 “피아노 쳐 봐라!” 피아노를 치고, 음감도 테스트하시더니 바로 지휘를 해보라고! 음?? 속으로 ‘아~ 큰일났다’하며 이 시간을 피하려고 “여기 오케스트라가 없지 않느냐”고 하니 “네가 쳤던 곡을 내가 피아노로 칠 테니 지휘해봐라~” 어찌하겠습니까? 대가 앞에서 떨리는 가운데 했죠. 지휘를 마친 후, 교수님 말씀, “너, 27세 너무 늦게 왔다. 하지만 네가 공부하겠다고 하면 가르칠 생각은 있다. 나 같으면 한국에 안 간다. 내가 보아하니 한국에 가면 여권 나오는데 1년에서 1년 반 이상 걸릴 것 같은데 더 늦지 않겠냐. 그리고 내 생각에 너희 나라에서 여권을 바로 줄 것 같지도 않고...”하시더군요. 사실 그때 가져간 여권은 단수 여권으로 한 달 안에 들어와야 했습니다. 교수님 집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한국에 전화하며 “나 집에 못가”하니 집에서는 놀랬죠. 이렇게 해서 6년 동안 독일에서 공부하게 되었는데, 무엇보다 라빈스타인 교수님은 권위적인 분이 아니셨어요. 저 뿐 아니라 6~7명 학생들에게 친절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악수를 하셨죠.
  제가 학교 들어갈 때 처음에 실패했는데 교수님께서는 “걱정 하지마라. 누가 너의 74년도를 기억하겠느냐? 네가 훌륭한 음악가가 되었을 때를 생각하라” 이러한 교수님의 태도나 음악적인 면이 저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전 아무 것도 없고, 심지어 레슨비를 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열심히 가르치시나! 저에게만 그런 게 아닌데, 교수님은 학교에서 월급은 받는 것이고 자기 의무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전 그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고, 지휘자로서의 인품, 배려에 대한 실제적인 공부를 한 것이죠.
  아! 그리고 제가 어떤 지휘자에게 영향을 받았냐고요? 사실 누구 딱 한사람에게 영향을 받았다기보다 이 지휘자에게는 이런 점, 저 지휘자에게는 저런 점을 보며 영향도 받고, 배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베를린에 있을 때 줄리에니, 마젤, 카라얀 등 훌륭한 지휘자를 많이 봤습니다. 좋은 지휘자가 되는 좋은 방법은 선생님의 기본적인 대화와 토론도 필요하지만, 지휘자가 리허설 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공장 돌아가는 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바로 이게 현장 공부입니다. 책으로는 한계가 있거든요. 지휘자의 리허설 현장에서 연주도 보고, 감동도 받고, 울고 했던 시간이 저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재밌는 에피소드를 소개하면, 베를린 필은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젠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이야기를 해도 되겠죠. 하하... 제가 시간이 있어 카라얀의 지휘 리허설을 보고 싶어 찾아 갔습니다. 입구에 앉은 경비 아저씨가 때마침 신문을 보고 있었는데, 제가 ‘굿텐 모르겐’(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하니 경비아저씨가 묵뚝뚝한 말로 ‘모르겐’(안녕)하더군요. 물론 저를 보지도 않고 신문에 얼굴을 고정한 채로요. 신문기사에 뭐 재밌는 기사가 났는지 덕분에 저는 바로 프리 패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베를린 필의 ‘카라얀 유스 클래스’에 있던 15명 정도의 청소년들 중, 일본아이들이 2~3명 정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저를 일본 학생으로 착각한 것 같아요. 걔네들은 매번 왔다 갔다 하니까요. 독일 사람들은 동양인들을 잘 구별 못하거든요. 이렇게 리허설 현장에서 값진 지휘자들을 많이 보며 단원들과 다투는 것, 조율하는 것 등을 제가 다 흡수한 것이죠. 1977년 ‘카라얀 국제 음악콩쿠르’에 입상을 한 이후엔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었지요. 저에게 독일은 제2의 고향이자, 정말 고마운 곳이라 생각합니다. 


지휘자로서 가지는 삶의 가치
  늘 새로운 것, 배우고 싶은 것, 감사하고 싶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제가 작곡을 배워서 연주하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이미 작품이 만들어져 있고 우리는 그 곡을 잘 연주하면 되는데, 곡이 있다는 것이 감사한 거죠. “모차르트, 베토벤이 없었다면 난 못살아!” 하하... 물론 청중이 있다는 것도 감사하고요. 무엇보다 같은 곡을 연주해도 똑같을 수가 없어 늘 새롭고, 때론 단원들에게 배우기도 합니다. 제가 돈키호테처럼 엉뚱하다 해도 무슨 일이든 감사하다는데 의미를 두려고 합니다. 

지휘의 창조성을 어떻게 발휘하시나요?
  예를 들어 악보를 보면 작곡가가 해놓은 악상기호가 없는 곳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느낌으로 볼 때 청중이 못 느낄 정도로 악첼란도(accelando-점점 빠르게)를 해야할 경우 악첼란도를 넣습니다. 이건 제 해석이죠. 그리고 단원들에게 “나 어제 요하네스 브람스하고 통화 했어”하면 막 웃죠. 이렇게 지휘자와 단원들 간의 조율하는 것도 재밌습니다. 연주되는 리듬에 대해 서로 왔다 갔다 하며 맞춰가는 것이죠.

그렇다면 ‘쇤베르크’라든지 현대음악을 어떻게 접근하고 계신가요?
  현대음악을 잘 연주하는 사람과 지휘자가 있습니다. 제가 좀 더 나이가 젊었다면 도전해볼만 하지만, 그건 후배들의 몫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에서는 ‘슈트니케’나 ‘쇤베르크’ 등 현대 음악가를 소개하고 흡수할 수 있는 중간과정이 없었습니다. 제가 볼 때 말러 정도인데, 물론 그의 음악 세계를 더 깊이 알고 하길 바라는 거죠. 결국 클래식은 서양음악인데 이것을 이해하는데 있어 우리가 독일, 오스트리아인이 아니기에, 이해할 능력을 차근차근 길러야 하는 것이죠.

기업하는 사람에게 배우는 마케팅
  실제로 지휘자는 음악가이자, 경영자여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고, 큰 오케스트라를 이끌어 가려면 경영자적인 마인드가 있어야 하기에 아이디어를 많이 냈죠. 예를 들어 우리나라가 철을 다루는 기술에 있어 처음에는 배워서 하느라 잘 하지 못했지만, 이젠 기술이 좋아져 역수출을 하고 있습니다. 수입하는 나라가 자기네가 만드는 것보다 한국에서 수입하는 게 더 좋다면 수입을 하지 않겠습니까? 역수출을 못한다는 것은 앞선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창조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젠 우리도 서양음악을 받아들여 이렇게 달려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작곡가, 연주자도 역으로 다른 나라에서 더 많이 활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뮤지컬의 경우, 하나의 작품을 3개월, 6개월 동안 공연을 하며 스케일도 커졌을 뿐 아니라 연출, 기술, 조명, 의상 등도 발전했습니다. 왜냐하면 살아남기 위해서죠. 오케스트라의 경우 안정적으로 국가에서 지원하기도 하지만, 오케스트라는 시민의 것이니 우리도 무엇보다 오케스트라의 발전과 자립을 생각하며 열심히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5년 전만 해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인천 시향’이 가서 연주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평창 동계 올림픽 때는 IT가 주를 이루었죠. 우리의 역할이 없어진 것도 있지만, 시대의 변화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의 변화에 어떤 우리가 되어야하고, 어떻게 사회에 참여해야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오늘도 단원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인터뷰 분위기가 좋아 이야기를 잘 하게 되었다며 새하얀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띄우고 “이젠 젊은 지휘자들을 도우려고 합니다. 한국 지휘자 3~4명과 더 젊은 연주자를 발굴도 하고요”하며 말씀을 마치셨습니다. 연이어 스케줄이 있음에도 저희에게 1시간 30분의 시간을 내주신 금난새 지휘자님께 이 지면을 통해 독자들을 대신해서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102호 >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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