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대륙과 해양의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는 것 이상은 할 수 없을까? (1)

2018년 6월호(제104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6. 10. 19:15

본문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한국동란을 생각하며]


대륙과 해양의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는 것 이상은 할 수 없을까? (1)






 우리는 특이하게도 섬도 아니고 대륙도 아니고 반도, 반쯤이 섬인 곳에 삽니다. 그런데 그 크기가 밖으로 진출할 역량이 될 만큼 크지도 않고, 또 너무 작아서 아예 대륙이나 해양세력에 부속되어버릴 수도 없는, 작은 독립국 하나 딱 이루고 살 정도일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구 어느 곳에 가도 우리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가운데 단 하나의 독자적 문화를 이루고 삽니다. 이런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면 좋겠지만, 지리적으로 대륙이나 해양에서 발원한 세력들이 끊임없이 집적거리면서 자기의 세력아래에 두려는 욕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문제입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가 열심히 배타는 기술을 익혀서 바다로 진출해 본 경우라고는 잠깐 신라의 청해진(장보고)이나 중국에 백제방을 두었던 수 천 년 전의 옛일에 불과할 정도로, 우리 몸뚱아리를 떨어지지 않는 아교로 이 땅에 바짝 붙이고 살아왔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남한에 사는 우리들은 1945년 이후 지금까지 73년간 아예 대륙을 향한 길까지 닫혀서 반도가 아니라 사방이 꽉 막힌 섬에 사는 사람과 같아서, 대부분은 ‘세상 사람들은 다 우리처럼 살 거야’라고 여기면서 밖에 나갈 생각조차 않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산다는 겁니다. 짧은 해외여행을 제외하고 장기간의 사업차 혹은 유학으로 80억 세계인의 엄청나게 다양한 문화를 경험한 사람들이 아주 드물 뿐 아니라,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그 경험들을 단지 배우는 정도가 아니라 새롭게 재창조할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이런 속에 남북정상회담, 북미회담이 진행되고 있는데 강대국들은 본격적으로 자신들만의 손익계산서를 두드리면서 이 땅에서 이익을 뽑아내려합니다. 과거 일본에서 메이지유신이 성공하자마자 즉각 한국을 정복하자는 ‘정한론’논쟁이 일어난 것을 그들의 입장에서 바라보아준다면, 한반도가 외부인들이 군침을 뚝뚝 흘릴만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반대로 우리만 생각한다면, ‘너희들, 우리 좀 그만 내버려둬!’라는 외침이 매우 정당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보기에는 그 외침은 너무 순진무구하며 역사의 냉혹한 현실을 살 줄 모르는 어리석은 자의 것으로만 들릴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에도 그러했듯이 언제든지 우리가 대륙세력(중국과 러시아)과 해양세력(일본과 미국)이 충돌하는 정중앙의 위치에서 살 수밖에 없다면, 이 잔인한 현실과 고통스러운 역사를 눈 크게 뜨고 직시하며 매우 현명하고 창조적으로 대처하려고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이 속에 살아남을지 확신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 강대한 세력의 대리전쟁처럼 되어버린 잔인한 한국전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단지 멈추어버린 상태(‘휴전’)를 해결하는 것을 훌쩍 뛰어 넘어, 80억의 지구인이 서로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합력하여 진보한 AI의 능력을 빌려 우주개척의 첫 관문을 여는 일을 우리가 시작할 이상을 품는 것은 과연 꿈만 일까요? 이것을 위해서 네 가지를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1. 대륙세력(중국, 러시아)과 해양세력(일본, 미국)이라는 밖으로 눈 돌리기 2. 내부로 눈 돌려 비판해 보기(6월호) 3. 다시 우리와 비슷한 외부(네델란드, 로마, 이스라엘)로 눈 돌리기 4. 우리에게 찾아온 놓쳐서는 안 될 절호의 기회(7월호)



 1. 밖으로 눈 돌리기 중국(대륙), 일본(해양), 미국(해양), 러시아(대륙) 

 우리는 지리적으로 매우 인접한 중국과 일본을 아주 잘 안다 혹은 알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가 오히려 중국과 일본 사이를 더 자연스럽게 오갈 수 있었던 시절이라는 점은 매우 역설적인 사실입니다. 동아시아 삼국은 1945년 이후의 거의 단절된 상태로 지금까지 지내왔으며, 개방된 지금이라도 우리 사이의 교류는 유럽인들이 서로 오가는 정도에 훨씬 못 미칩니다. 그만큼 우리 서로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이의 유사성이라고는 한자문화권과 같은 주로 과거에 대한 것에 불과하며, 그 과거사조차도 제대로 공통으로 정리되지 못한 가운데 아웅다웅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이 왜 그렇게 과거사를 부인하려고 하는지, 중국도 왜 그렇게 동북공정이니 뭐니 하는 것으로 역사를 조작하려고 하는지를 아시나요? 단적으로 말하자면, 절대신/절대종교가 없이 오래 지냈던 동양에서의 법과 역사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절대적 어떤 실체가 아니라 정권을 장악하는 누구든지 또 언제든지 조작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것 이상이 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해양세력인 일본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는 과거의 나쁜 기억(임진왜란/일제강점기)에서 나오는 너무 많은 악감정이 오히려 그들을 냉철하게 인식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또 우리는 15세기에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일본은 신라시대의 이두를 차용한 것이 분명한 그들의 문자인 가나를 8세기부터 사용하여 중국문화에 압도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쓰고 있다는 점을 자랑합니다. 그 자랑이 맞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동양을 뒤흔들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나로 정부인의 눈치를 보면서 사사로운 편지를 정말 맛깔스럽게 쓴 것에 저는 감탄하고 말았습니다. 또 중국의 새 정권들은 언제나 상대종교인 유교를 단지 통치의 도구로만 여겼으나, 우리는 유교 중에서도 일부인 송나라 시절에 만들어진 주자학을 절대적이고 이데올로기적 기준으로 삼아 조선왕조 5백 여 년 내내 논쟁하며 나라를 내리막길로 내달리게 했습니다. 그러나 매사를 실용적으로 이해하고 해결한 일본은 전 역사를 통해서 대체로 중국 이상으로 상대종교에 불과한 유교, 불교를 거기에 걸맞게 상대적으로 다룰 뿐 아니라 아예 일본을 위한 도구로만 여겼습니다. 우리는 과거 불경이나 유교경전을 파고 들며 논쟁하며 허송세월하는 동안, 일본에서 스키타 겐파쿠는 네델란드어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는 가운데 문법을 이해하는 난관을 돌파해가며 18세기 말 유럽 당시의 최고해부학 책을 4~5년 만에 번역해 내어(‘해체신서’) 일본 내에서 ‘난학’(네델란드학)을 유행시켰습니다. 물론 우리는 (철학적, 종교적) 근본을 찾는다는 명목을 드높였지만, 정작 그 철학, 종교는 모조리 상대적인 것이었기에 거기에 역사진행의 절대적 기초를 놓는 노력 자체가 어리석었을 뿐입니다. 


 정반대로 오래된 대륙세력인 중국은 또 어떤가요? 역사로 말할 것 같으면 ‘중국은 없다’라는 말이 옳다라는 명제에 동의하시나요? 즉 한족 지배의 중국은 수 천 년 중국 역사에서 예외적 시기인, 한-송-명나라 정도일 뿐입니다.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도 사실 당시 중간의 나라(中國)이 아니라 그 서쪽 변방의 이족(異族)일 뿐입니다. 또 고구려, 백제, 신라와 역사를 주고받았던 수-당나라는 모두 북위로 시작된 5호(오랑캐)16국 시대의 마지막 주자들로서 중국을 통합적으로 경영했던, 그 근원이 북쪽에서 연원한 ‘오랑캐’일 뿐입니다. 그 후 현대까지 중국의 역사를 한족보다 더 장기간을 형성한 주요 세력인 요-금-원-청나라 역시 모두 한족의 입장에서는 오랑캐 출신입니다. 우리가 한 때 지배했고 다스리며 무시했던 만주족이 중국에 몽땅 들어가서 만주족 1명당 한족 300명을 268년 동안 지배했던 역사(1644~1911)를 솔직하게 위대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을까요? 이렇게 ‘중국은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만약에 한국인 1명이 중국인 20명을 다스릴 능력을 가진다면, 지금도 남북 합쳐서 7천만의 우리가 14억의 중국을 지배할 수도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의 진리인 셈입니다. 그런 중국을, 그 중에서도 기껏해서 송나라 시대에 발원한 주자학을 우리 조상들은 신주단지처럼 5백 년 동안 절대적으로 섬기며 당쟁을 해대며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고 종살이에 익숙하게 만들었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요? 우리는 지난 2천년동안 그렇게 중국 섬기기에 열을 올린 것을 일본인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한반도가 중국과 너무 가까웠기 때문에 항상 중국이 기준점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다행히 자신들은 중국과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독자적 역사를 만들 수 있었다는 주장인데, 부끄럽지만 설득력 있지 않나요? 21세기의 중국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합해서 나라를 진행하려고 하는 것, 즉 서로 반대되는 두 제도를 하나로 만들려는 이 동양적 사고방식을 서양인들은 과연 제대로 이해할까요? 그런 중국에 대해 무언가 기준점을 마련해 놓고 평가하려는 조선시대의 사고방식을 이어가는 우리에게 이런 중국이 얼마나 불편한가요?


 1945년 이후 지금까지 우리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물 건너온 해양세력인 미국을 우리는 정말 잘 알까요? 미국인들은 틀림없이 유럽문화를 가지긴 했지만 그 끝물에 해당하는 들뜬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온 세계에서 쫓겨 다녀 이제는 갈 곳이 없는 유대인들, 사면이 강대국에 고통 받으며 살았던 동유럽인들, 영국의 지배를 벗어나려는 아일랜드와 스코트란드인들 외에 유럽적 문화와 삶에 익숙한 정통유럽인라면 드보르작과 같은 심정으로 유럽에 돌아갔습니다. 그는 신세계를 방문하여 신세계교향곡을 작곡하긴 했지만, 황량한 미국이 도무지 마음 두고 살 곳이 못된다고 여겨 향수병이 걸려서 고향에 돌아가 버린 거지요. 미국은 모든 민족이 서로 뒤섞이는 melting-pot이 아니라 각자가 절대 섞이지 않고 따로 노는 salad-ball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동의합니다. 또 미국을 실제로 지배하는 것은 결국 오갈 데 없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절박한 유대인들이며, 이들이 이스라엘과 합쳐서 장차 세계를 경영할 수도 있다는 전망을 실제로 고려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작은 예로 삼성과 현대를 먹을 뿐 아니라 우리같이 작은 나라(베네수엘라)를 뒤 흔들려고 달려드는 유대인기업 엘리엇과 전 세계 곡물시장의 90%를 장악하여 곡물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농업우주선까지 띄운 유대인기업을 얼마나 잘 아시나요? 또 아무리 미국이 기회의 땅인 것을 믿고 과감하게 이민 가서 엄청난 노력을 하며 자식들을 최고로 키워낸다 하더라도 결코 미국의 주류사회에 진입할 수 없는 유리장벽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미국을 움직이는 종교적 힘의 하나가 개신교였고 미국이 건강했을 때는 건강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청교도적인 영적, 정신적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지금, 미국의 개신교는 트럼프의 (윤리적)악행을 알지만 그것보다는 자신들의 왜곡된 종교적 신념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트럼프를 지지하고, 또 트럼프는 그런 여론을 믿고 큰 소리로 떠드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중국과는 또 다른 대륙세력인 러시아의 과거와 현재를 여러분은 잘 아시나요? 그들은 유럽인 혹은 아시아인 아니면 둘 다 일까요? 먼저 러시아는 지리적으로 유럽의 동쪽 끝에 위치했고, 유럽이 16세기 이후 흥기하면서 자신도 그 속에 포함되려고 문화적, 정치적으로 안달복달했지요. 그런데 점차로 서쪽으로 진출하는 것이 제한되는 동시에 동쪽인 아시아로 나가면서 청나라와 네르친스크조약(1689)을 맺으며 남북의 국경을 확정합니다. 이렇게 러시아는 정신적,문화적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정체성 모두를 조합할 수 있는 탁월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에 들어간 종교는 기독교 중에서 비잔틴 제국의 동방정교를 이은 것으로 러시아정교였습니다. 동방정교는 라틴교회에서 있었던 종교개혁(1517)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잔틴 제국의 기독교의 한계를 그대로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한계란 기독교가 (로마)황제를 보좌하는 역할을 하는 전통을 가졌기 때문에, 교황권과 제후권이 투쟁하는 가운데 교회와 정치 사이의 건강한 견제, 균형하는 역사가 없었습니다. 교회가 정치나 사회에 대하여 건강한 비판을 할 수 없어서 삶의 실제와는 괴리되었으며, 대부분의 종교적 삶은 신과의 교감과 일치라는 신비한 차원에 머물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 진리와 사회의 현실과의 괴리가 그렇게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 다른 나라의 문학작품 속에서는 도무지 볼 수 없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같은, 위대하지만 러시아인들의 종교적, 심리적인 엄청난 갈등과 괴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문학작품을 형성하게 된 배경이기도 합니다. 이런 전통이 지금도 여전하게 러시아에서 건강한 비판세력이 나올 수 없는 정치현실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우리는(서쪽 출신 중에서)그들이 피부가 정통서양인보다 희지만 그래도 서양인으로 여기지만 어째서 러시아인들은 절대군주를 오랫동안 섬겼던 동양인인 우리에게조차 이제는 도무지 통하지 않는 전제적 푸틴정권을 그렇게 장기집권 하도록 내버려둘까요? 미국의 지난번 대선뿐 아니라 온 세계의 나라들의 선거를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조작하려고 러시아가 마음을 먹고 실행하고 있는 것 같고 앞으로 성공할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러시아에는 러시아정교가 황제의 시녀가 된 오랜 전통 때문에 절대 권력을 제어하는 제동장치가 있었던 적이 없었던 나라인 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혁명이 유럽에서 러시아에서만 성공할 수 있었던 사실을 아시나요? 또 거기서 더 나가서 레닌-스탈린을 잇는 일인독제체제라는, 죽은 마르크스조차 미쳤다고 욕하면서 벌떡 일어날 체제를 만들었고, 또 그것이 연속적으로 곧 북한에 왕조식 절대공산주의라는 한술 더 뜬 체제가 생긴 배경이기도 한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2. 안으로 눈 돌려 비판해 보기 이제 우리의 눈을, 안으로, 우리 자신에게로 돌려볼까요?

가장 먼저는 과거와의 절대단절입니다. 우리가 단절한 것이라면 차라리 낫겠지만 그것이 아니라 모조리 ‘수동적’으로 단절되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역사부터 말하자면 포츠담선언에 의하여 한반도의 허리가 반으로 쫙 쪼개도록 처리하였습니다. 큰 힘 가진 나라들이 아프리카의 국경선을 그 속에 사는 인간, 언어, 문화와 아무 상관이 없이 무식하고 무자비하게 일직선으로 죽 그어놓은 것처럼 말입니다. 깊은 문화와 역사를 가진 가운데 세계제국을 오랫동안 경영해 보았던 영국과는 달리 어설프게 키만 크고 팔뚝의 힘만 커진 미국, 그리고 기독교 이단인 마르크스, 그 마르크스의 이단인 무지막지한 스탈린의 소련에 의해서 말입니다. 아무리 흰옷 입은 조선 사람의 후예들이 종로거리를 나대면서 신탁통치반대를 외쳐봤자 소용없었지요. 또 무엇보다도 우리는 일본에 의해서 모든 과거가 압살되는 수모를 36년이나 겪었습니다. 자기들은 천황을 유지하면서 우리의 왕조를 비롯해서 문화도 성씨도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자기들 목적을 위한 도구적 존재에 불과했으니, 우리의 역사와 과거는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았던 거지요. 큰 힘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일본인의 삶의 자세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위안부, 징용, 징병으로 수탈하는 것에 어떤 양심의 가책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그들의 관점을 얼마나 이해하시나요? 우리 선조들의 무능 때문에 그들의 불행에 우리도 그대로 빨려 들어가서 희생될 뿐이었습니다. 정상적으로는 200-250년 정도면 바뀌어질 때가 된 조선의 광해군-인조 시절에 명나라 편 들다가 우리에게 오랑캐였던 만주족이 벌인 정묘호란(1627)-병자호란(1636)으로 온 나라가 피폐해졌습니다. 그 때의 만주족은 지금은 다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었지만, 그 때에 그들이 우리 쪽에서 스스로 황제의 공덕을 찬양하게 만들어서 지금도 잠실에 세워져서 우리를 매우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삼전도비(‘대청황제공덕비’) 앞에 서 보신 적이 있나요? 힘의 논리에 의해서 인조가 9번이나 머리를 땅에 찧어서 피가 나는 가운데 청태종에게 절하면서 중국 섬김(과거)에서 만주족 섬김(현재)으로 강제로 전환해야 했던 과거의 아픔을 지금 정말 모른 척 해도 될까요?


 그런데 더 크고 중요한 단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동양적인 것과의 단절입니다. 일본과 비교해보자면, 그들의 진정한 불행은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오랫동안 지속되어 1~2차대전으로 내리막길로 가는 막다른 골목에 이른 서양문명의 끝자락을 붙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제국주의를 시행하던 그 당시의 서양을 본받아 그것을 동양 전체에 시행해 보려한 시대착오적인 짓을 하다가 모든 아시아에 큰 불행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불행은 일본에 의한 과거와의 단절에 이어 동양으로부터의 단절과 함께 서양과의 과격한 접속이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우리는 일제강점을 통해서 일본에 투사된 서양을 부분적으로 만난 적이 있지만, 1945년 이후부터는 급격하게 서양을 수입하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 주위에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모조리 서양적인 것으로 채워져도 그 어떤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얼굴은 황색이며 행동하는 동기나 마음 자세 속에 동양적인 것이 여전히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적인 문명에서부터 서서히 우리의 내면을 형성해가는 서양적 문화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며, 더 나가서 우리의 정체성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큰 혼란을 겪는 중입니다. 우리는 동양인일까요 서양인일까요? 구체적으로 보면 누구나 다 아는 대표적인 혼란이 정치적 차원에서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입니다. 이 둘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는 것은 비단 왕조식 공산주의라는 유일한 체제를 만들어낸 북한 뿐 아니라, 남한 역시 그러합니다. 남한 내에서의 좌파와 우파의 투쟁은 어떤 이데올로기적 목표를 설정해 놓고 파당을 나누어서 싸우던 조선시대의 판박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을까요? 우파나 좌파나. 한반도가 처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이전에 중국을 늘 의식해야 했기에 중국보다도 더 중국적인 것, 즉 유교를 신봉하며 그 이데올로기 해석으로 싸우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과거와의 단절과 동양과의 단절, 서양을 수입함에는 공통요소가 있는 데 그것은 거의 대부분 수동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겁니다. 가장 안타깝고 정말 나쁜 사례가 바로 해방이 우리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대륙과 해양세력이 만들어서 준 것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독립투쟁을 했던 많은 분들이 있었지만, 민족 전체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기에, 해방은 누가 해서 준 것이라는 매우 수치스러운 진실 앞에 솔직히 서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방 이후에 우리 땅의 허리를 남이 잘라도 아무 말도 못한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좌파와 우파의 투쟁도 사실상 그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것에 불과하며, 서양의 사상투쟁을 흉내 낸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요?


 이런 속에 안타까운 현상은 우리 스스로 능동적으로 과거를 정리하는 능력을 배양하지 않은 것인데, 가장 현저한 것이 지금의 우리와 가장 가까우며, 우리 조상이 스스로 이루었던 지리하게 지속된 조선시대 500년 역사를 철저히 비판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늑대와 같이 호시탐탐우리를 노리는 주위에 대항해서 우리를 지켜야 하다 보니 어떻게 해서든 우리의 과거를 비호해야 하겠다는 심정이 된 것은 아닐까요? 그러다 보니 250년이면 끝나야 하는 역사의 공식이 무너진 가운데 곱빼기나 진행되어서 외부의 침입이 없었더라면 그 역사마저 우리 스스로 끝장낼 능력이 있었을까요? 우리를 정말 냉철하고도 무엇보다도 우리를 삼키려는 자들의 살벌한눈으로 우리의 과거를 낫낫이 재평가해보지 않는 한, 우리는 과거의 불행한 전철을 계속 밟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세계 역사에서 거의 예외적으로 장기 정권인 이씨조선의 가장 나쁜 점은 정치와 종교의 결합입니다. 모든 정치적 행위를 이데올로기적 전제로서 유교를 가지고 해석했으니 나라가 제대로 진행될 리가 없습니다. 그 종교는 절대적인 것을 주장할 수 없는 상대종교일 뿐이며, 상대적인 가치만 지니는 경험들이 쌓여서 만든 사회철학에 불과할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유교를 단지 정권의 통치를 돕는 도구로만 알며 사용했던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서, 늘 중국을 의식하면서 중국보다 더 중국적으로 이데올로기에 목숨을 걸면서 사색당쟁을 일으켰던 조선 중기 이후는 역사의 참담한 실패작인 것을 정말 우리는 솔직히 시인할 수 있을까요? 종교가 절대적 가치를 가진다면 그 초월적 차원의 진리가 역사 속에서 좋고 선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데, 유교는 정말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과거나 지금도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편집부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104호 >에 실려 있습니다.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는 

  • '지역적 동네'뿐 아니라 '영역적 동네'로 확장하여 각각의 영역 속에 모여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스토리와 그 속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문명, 문화현상들을 동정적이고 창조적 비평과 함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국내 유일한 동네신문입니다.
  • 일체의 광고를 싣지 않으며, 이 신문을 읽는 분들의 구좌제와 후원을 통해 발행되는 여러분의 동네신문입니다.
  • 정기구독을 신청하시면 매월 댁으로 발송해드립니다. 

    연락처 : 편집장 김미경 010-8781-6874

    1 구좌 : 2만원(1년동안 신문을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예금주 : 김미경(동네신문)

    계   좌 : 국민은행 639001-01-509699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