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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복)합, 통섭이라고요? 꿈 깨시지요! 2편

인문학/황혼과 여명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7. 7. 1.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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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명)의 황혼에서 새로운 문화(명)의 여명으로 19]

 

융(복)합, 통섭이라고요? 꿈 깨시지요! 2편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89호 < 융(복)합, 통섭이라고요? 꿈 깨시지요! 1편 >을 이은 글입니다. 

 

  먼저 첫째 글(2017년 3월호)에서 다룬 주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분리, 분석’부터 하고 본 성급하고 교만한 서양문화(명) / 먼저 ‘분리, 분석’하고 나중에 융(복)합한다고요? / 전체부터 먼저 보아야, 그러나 어떻게? 행동중지! 
  이번 5월호에는 예고한대로 두 가지 주제인 ‘포기해서는 안 되는 질문, 인간, 너는 누구인가?’, ‘분리, 분석’후 종합이라는 허상의 대가인 인공지능의 시대에 ‘너 인간 두려워 떨지 않니?’를 다루겠습니다.

 

‘포기해서는 안 되는 질문, 인간, 너는 누구인가?’
  인간이 자기를 중심으로 무엇이든 해서 이제는 70억 전 지구 자체의 멸망을 단번에 결정지을 수 있는 위태로운 위치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럴 때에 인간은 드디어 내가 그동안 ‘무엇’을, 어떤 짓을 했나를 되돌아보면서 일단 ‘행동중지’에 들어가는 것이, 더 근본적으로는 그런 짓을 하는 ‘인간,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 정상인 것을 지난번에 말씀드렸습니다. 즉 육하원칙 중에 가장 중요하지만 포기해 버렸던 질문인, 그 행동을 하는 ‘인간,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마주설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에 가장 먼저 마주선 사람들은 바로 고대의 그리스 사람들이며 이들이 그런 질문을 하게 된 역사적 상황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철학적 대답이 지금까지 서양문화(명)에 결정적으로 중요했으므로, 조금 어렵게 여겨질 수 있으나 약간이라도 집중해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현대 서양문화(명)의 뿌리로서의 그리스 철학의 시작 
  그 때는 그리스 본토에서 철기를 소유한 강력한 유목적인 침략기상을 가진 도리스인들이 북쪽에서 계속 남하를 하는 중이었고 이에 밀려서 미케네인들은 서쪽인 로마나 동쪽인 에게해의 섬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에게해의 동쪽인 현재의 터키 지역까지 그 당시 페르시아가 전세계를 석권하며 서진 중이었고 남진하여 이집트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시점에 에게해 동쪽의 도시들(밀레토스, 에베소 등지)에서는 그동안 그리스인들에게 강력하게 영향을 미쳤던 동양의 종교와 역사와 전통에서 독립적인 ‘우주론’을 필두로 한 서양철학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 세력이 이 지역 모두를 장악하자 이들은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수 없었으며 서쪽의 이태리 혹은 지중해 다른 지역 등을 거쳐서 다시 그리스 본토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 유명한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와 같은 학파들이 생겨납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태리 남부인 엘레아에서 시작된 파르메니데스 학파의 ‘인식론’입니다. 이들은 선배들이 우주의 형성을 논하여 물과 불로 되었다고 판단한 것을 의심하여 그런 인식을 하는 인간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지요. 내가 하는 말이 옳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는 질문에 도달한 겁니다. 그래서 파르메니데스는 전체를 모두 다 파악하는 ‘여신의 길’도 있지만, 대부분 인간들은 부분적으로 파악해 경험에서 얻는 작은 이치를 마치 진리인양 따라가는 어리석은 ‘여론의 길’을 간다고 주장했습니다. 파르메니데스 본인은 어떻게 여신의 길을 찾을 수 있는가를 말하지 않았지만, 이것은 틀림없이 동양에서 있던 절대종교적인 전통에 기초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절대종교를 받아들이지도 주장하지도 않았지만 전체를 파악하고 시작과 끝을 모두 다 아는 존재로서의 여신을 생각했으니 그럴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벌써 그는 절대자를 떠난 인간들이 끊임없이 자신의 얕은 생각과 좁은 경험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해버리는 ‘여론의 길’과 그 결과로서 사실상 신이 된 인간 각자들끼리의 심각한 충돌의 역사를 경험한 가운데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역사가 지나면서 이런 심각한 교훈들은 잊어버리고 그리스는 마라톤 전투(BC 490년), 살라미스 해전(BC 480년)을 통해 그리스로 침략한 강력한 페르시아를 물리쳤으며, 이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아테네는 약 50여 년 동안 에게해 주변의 모든 도시국가들을 호령하는 제국으로 변모해갑니다. 이때에 인간은 진정으로 자기를 성찰하기보다 화려한 제국 속에서의 출세가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되고,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과목인 현란한 언어의 수사학을 가르치는 ‘소피스트들’이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고 외치며, 마치 철학자인양 활동하게 됩니다. 그 결과 아테네의 타락은 다른 도시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유목민적인 무력의 전통을 도리스인들이 터전으로 잡은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소위 30년간 벌어진 펠로포네소스 전쟁에 돌입합니다. 이런 가운데 파르메니데스의 전통을 계승한 소크라테스는 다시 ‘인간아 너는 누구냐’는 원천적인 질문을 했고, 스파르타에 패한 아테네가 독립한 이후 자신들을 괴롭게 하고 자신들의 길을 따르지 않은 소크라테스를 독살한 것입니다.

 


  이 후에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이어가기는 하지만 스승의 입을 빌려서 자신의 주장을 하는 수많은 책을 남겼습니다. 어떤 말이 그의 말이고 어떤 내용이 자신의 말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소크라테스는 파르메니데스의 말대로 자신들의 욕망을 성취하게 만드는 ‘여론의 길’을 가는 수많은 어리석은 인간들을 스스로 회의하게 하기 위해서 대화적 ‘산파술’을 사용했습니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인간은 스스로를 잘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즉 진실로 겸손할 때 진실된 철학이 시작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렇지만 그의 제자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에 앞선 파르메니데스가 주장한 ‘여론의 길’을 따르지 않고 ‘여신의 길’을 따르는 원리를 알았다고 선언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데아(의 세계)’이고 여기서 반대되는 것이 ‘현상(의 세계)’인 겁니다. 즉 파르메니데스의 ‘여신의 길’은 ‘이데아’이며, ‘여론의 길’은 ‘현상’으로 바뀐 셈이고 자신은 이데아를 안다고 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의 대화록의 가장 마지막인 정치학에서 통치는 ‘철학자’가 해야 하고, 통치체제는 어리석은 우중정치로 떨어지는 민주정치보다 독재정치로 갈 수 있는 스파르타의 과두정치를 선호했습니다. 여기서 이데아의 세계를 파악한 ‘철학자’는 바로 플라톤 자신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시 역사는 흘러서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는데, 사실 여기서 서양문화(명)의 불행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스승의 ‘이데아’와 ‘현상’의 구조 대신에 ‘형상’과 ‘질료’라는 이원적 구조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예를 들면, 책상이라는 것이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 속에 책상이라는 형상을 먼저 만들고 그 형상에 목재라는 재료로 채워진 것이 책상일 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만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었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해서 우주 만물의 모든 것에 대한 백과전서적인 연구에 돌입했고 수많은 관찰들과 실험들의 결과들을 남겼습니다. 결국 그가 걸어간 길은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여신의 길’과 ‘여론의 길’의 구조를 택하는 것 같지만, 파르메니데스가 가장 혐오하였으며 경험적이고 감각적이며 실험적인 어리석은 ‘여론의 길’만을 주장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고, ‘여신의 길’이란 결국 인간의 생각 속으로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육하원칙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을 잊게 만들었으며 무엇을, 어떻게 라는, 낮은 차원에 필요한 질문만을 해대는 인간들이 되게 하고 말았습니다.  다음과 같이 그리스 철학이 타락해간 것을 도식적으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파르메니데스 → 소피스트 → 소크라테스 →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치면서 그리스 철학은 ‘철학’의 본래적인 뜻인 ‘지혜의 사랑’을 추구하는 겸손한 인간에서 훨씬 타락하고 멀어진 가운데 독주하며 독재적인 개별 인간상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 융(복)합, 통섭이라고요? 꿈 깨시지요! 3편 >에서 이어집니다.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segensong@gmail.com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91호 >에 실려 있습니다.

 

< 서양문명의 황혼에서 새로운 문명의 여명으로 - 바로가기 >

[서양문명의 황혼에서 새로운 문명의 여명으로 18]

제 89호 융(복)합, 통섭이라고요? 꿈 깨시지요! 1편


[서양문명의 황혼에서 새로운 문명의 여명으로 19]

제 91호 융(복)합, 통섭이라고요? 꿈 깨시지요! 3편


[서양문명의 황혼에서 새로운 문명의 여명으로 17]

제 88호 ‘나’도 아니고 ‘우리’도 아닌, 곤혹스러운 한국인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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