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문화(명)의 황혼에서 새로운 문화(명)의 여명으로 18]
융(복)합, 통섭이라고요? 꿈 깨시지요! 1편
서양문화(명)가 주도하는 가운데 하나가 되어가는 21세기의 지구촌은 그 문화(명)가 황혼기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절감하지 않은 채 많이들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북극과 남극의 빙하가 급속하게 녹아내리는 것과 같은 충격적 환경재앙이 다가오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 앞에서 약간씩 고뇌하긴 하지만 대부분은 곧 ‘나몰라라’ 잊어버리고 이기적인 개인의 일상으로 돌아가곤 합니다. 그렇지만 점차로 이런 피할 수 없는 고뇌들이 쌓이면서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소망보다는 절망이 누적되어 전세계에 3억명이 넘는 사람들이 우울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최근의 보고가 점차 현실감있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전세계인의 삶의 근간이 되어버린 서양문화(명) 자체를 제대로 평가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임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우리는 원래 동양인이기 때문에 동양과 그 전통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의 관점을 따르자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동양과 서양이라는 지리적, 문화(명)적 구분 이전에 인간이 가진 가장 근본적 질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겁니다. 이런 서양문화(명)가 스스로의 한계를 자각하는 가운데 내놓은 최근의 대안 혹은 흐름들 중 한 가지이며, 정부나 학계에서 마구 이야기 하고 있는, 소위 ‘융(복)합’, ‘통섭’(E.윌슨, [통섭]Consilience, 1998)을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합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융(복)합, 통섭이라고요? 꿈 깨시지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어리석고 교만한 산물이 서양문화(명)라는 겁니다.
‘분리’, ‘분석’부터 하고 본 어리석고 성급하며 교만한 서양문화(명)
서양문화(명)의 가장 현저한 특징의 하나는 ‘분리’, ‘분석’입니다. 무엇이든지 전체(총체)를 잘게 쪼개는 전통이 서양문화(명)에서 거의 2천 5백년 이상이나 진행되어 왔습니다. 서양문화(명)의 여명을 형성한 그리스 철학이 시작된 것은 특이한 한 사건과 관계됩니다. 즉 서양철학은 B.C. 540년 경 페르시아가 지금의 터키 서부 해안지역인 서아시아 전역의 패권을 장악하자 그 지역에 있었던 그리스인들이 그곳을 떠나게 된 정치적, 문화적 역사와 깊이 관련된다는 겁니다. 즉 ‘탈레스’를 필두로 한 그리스 철학자들은 장악해 들어오는 페르시아의 통치를 벗어나기 위해 그 해안을 떠나 이탈리아 해안으로 이주해 가거나 그리스 본토로 돌아가면서 서양철학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을 아주 오래전부터 고대문명이 동방에서 시작된 것에 대해 서양인들이 ‘Ex Oriente Lux’(빛은 동방으로부터!)라는 라틴어 슬로건까지 만들며 동양을 향해 뼛속깊이 가졌던 열등감의 표출로서 서양철학이 시작된 것으로 볼 수는 없을까요? 바로 이 서양철학이 가장 먼저 종교와 ‘분리’된 철학들을 시도했습니다. 이어서 역사와 문화가 흘러 그리스의 패권이 로마로 넘어가면서 로마는 다시 철학에서 ‘분리’된 사회적이고 실용적인 법, 군사, 건축에 ‘분석’적으로 집중했습니다. 전체를 먼저 보는 관점을 가진 기독교가 서양에서 득세한 시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서양은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데아의 세계(구원)와 현실의 세계(돈)의 ‘분리’라는 위선적 이원론에 빠진 종교로 암흑기를 보냈습니다.
이런 종교적 위선을 벗어던지려는 서양인들은 다시 서양문화(명)의 근원이 되는 그리스 문화와 로마 문명을 다시 회복하려고 14~15세기부터 일어난 르네상스renaissance(직역하면 재탄생rebirth)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즉 그리스·로마문화(명)를 복고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 서양문화(명)가 지금까지 세계를 석권하게 된 5백여 년 동안 일어난 일들은 그리스와 로마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행위인 ‘분리’, ‘분석’이 거의 전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동안 종교에서 철학을 ‘분리’ 하기위해 노력할 뿐 아니라, 거기서 더 나아가 철학에서 과학을 ‘분리’했고, 지금 현재는 거의 모든 사회와 문화(명)가 실용적 과학만능주의로 빠지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철학은 종교를 영원한 의미를 추구하는 것으로가 아닌 단지 교리나 교회체계, 예배, 경전 등으로만 쉽게 판단하여 배척하고, 철학 스스로가 종교적 위치, 즉 모든 것을 판단하는 최고의 위치에 올랐던 교만한 길을 여태껏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철학도 곧 과학에 배척당하고, 심지어 그런 (순수)과학도 실용과학에 배척당하여, 이제 남은 것은 물질만능만이 전부가 되어버린 서양문화(명)의 황혼기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에서 지금까지 이르는 서양문화(명)에서 보이는 일관된 모습은 가장 중요한 전체적이고 영원한 가치에 대한 질문을 버리고, 스스로를 ‘분리’하여 다시 그 분리한 것에 집중하여 ‘분석’하는 형태를 취했습니다. 그러다가 20세기 말부터 이건 아닌데 하는 자각이 급격하게 일어나면서, 문화(명)의 패턴을 다시 살펴보려는 움직임이 바로 ‘융(복)합’, ‘통섭’인 겁니다.
먼저 ‘분리’, ‘분석’하고 나중에 융(복)합한다고요?
그런데 문제는 21세기까지 이르는 동안 서양문화(명)의 주도 하에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행태는 개나 소도 웃을 일이라는 것입니다. 너무 심한 표현인가요? 그렇다면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질문해도 너무나 자명해서 어른들의 하는 일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로 해 볼까요? 개미가 코끼리를 알려고 할 때 모든 개미들이 다 달려들어서 코끼리를 잘게 ‘분리’하고 다시 그것을 철저하게 ‘분석’한 이후에 그 모든 정보를 융(복)합한다고 합시다. 그렇게 해서 모아진 것이 진짜 살아있는 코끼리가 되겠느냐는 겁니다. 당연히 아니고 단지 코끼리의 죽은 시체에 불과할 것이며 외적 형태조차도 뱀처럼 길게 늘여놓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물며 코끼리보다도 훨씬 더 복잡하고 영구히 풀 수 없는 경외롭고 놀라운 우주와 그 시공간, 물질, 생명, 역사 앞에 서 있는 너무나 미약한 존재로서 인간은 자신을 정상적으로 자각할 수 있을까요? 그런 것은 모르겠고 무조건 나 편하게 살고 보자고 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산 삶에 궁극적이고 영원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가 인간인지 모른다는, 정말 대면하기 싫은 진리 앞에 결코 서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이때까지 서양문화(명)는 정말 무식하고 교만하게도 ‘분리’, ‘분석’만 했었고, 환경문제 등과 당장에 내 입에 들어갈 먹거리가 걱정이 되니, 지금에서야 ‘융(복)합’, ‘통섭’을 하자고 떠들어 대는 편이 아닌가요? 역사상 수많이 있었던 문화(명)의 붕괴와 파멸(J.다아아몬드, [문명의 붕괴]Collapse, 2005)을 이번에는 극복할 수 있다고 장담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정말 불안하기만 합니다.
전체부터 먼저 보아야, 그러나 어떻게? 행동중지! 문화(적) (활동)중지!
그렇다면 이렇게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서양문화(명)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분리’, ‘분석’이 아니라 ‘전체’를 보는 일이라는 사실이 자명해집니다. 이렇게 먼저 ‘분리’, ‘분석’한 결과를 아무리 ‘융(복)합’, ‘통섭’해 봤자,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는 본래의 전체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괴물에 불과한 것일 것입니다. 이렇게 서양문화(명)에서 종교를 철학이 비웃고 그런 철학을 다시 과학이 비웃어가는 동안, 문화(명)는 욕망으로 난무한 것이 되었습니다. 또 그렇게 욕망을 채워봤자 무의미와 허무로 가득 차 시들해질 수밖에 없고 드디어는 문화(명)의 파멸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체를 먼저 보아야 한다고 작정하는 순간 즉각 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전체를 보는 일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은 부분을 쪼개어 보는 것을 먼저 하였다고 서양문화(명)를 변호하려는 태도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개미가 살아있는 코끼리의 전부를 통째로 보고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긴다면, 적어도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코끼리를 잘게 쪼개는 짓부터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살아있는 코끼리는 죽어버리고, 문화(명)는 썩어버리며, 환경은 파괴되며 모든 것이 끝장나기 때문입니다. 생각과 비판을 좋아하는 철학자들은 이런 경우를 당하면 ‘판단중지!’라고 말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문화(명)에 대해 동일한 표현을 쓰자면, ‘행동중지!’, ‘문화(적)활동(생산)중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문화(명)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려면, 모든 삶과 문화적 행위를 당장에 중지하라고 과격할 정도로 명령을 내리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솔직하게 접근할 때에 문화(명)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던 우리의 마음을 급습하는 것이 있을 것인데, 그것은 우리가 이룬 문화(명)에 대한 철저한 낭패감, 패배감, 절망감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가 이 절망감의 바닥에 정말 도달한다면 진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생깁니다. 즉 이렇게 우리가 문화(명)적 절망감에 심도깊게 도달했다면, 그 다음에 더 근본적 질문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가 ‘분리’, ‘분석’이라는 어떤 행위를 하느냐가 관건이 아니라 그런 행위를 하는 ‘나, 인간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바로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목이 터져라 외친 것이지요. 이 질문을 그의 제자 플라톤과 바로 그 뒤를 이은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완전히 무시했기에 이 두 사람은 황혼기에 이르는 서양문화(명)의 불행한 씨앗을 뿌린 원조가 되고 만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분리’, ‘분석’하지 않고 ‘전체’를 보아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질문은 그런 행동을 하는 ‘나는 누군가’ 하는 질문인 셈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정직하고 겸손한 사람이라는 점은 그가 인간이 누구인지를 알았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인간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라고 주장한 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서양문화(명)는 이런 가장 중요한 질문을 뒤로 던져버리고, 인간인 나를 확정된 (신적)존재로 간주한 후에 즉각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해 들어가서 온 세상과 역사를 지금까지 쓰레기더미로 만들었습니다. 육하원칙 중에서 첫째 질문이 ‘누구’인데, 나는 누구인가를 제대로 답하지 않은 채 둘째 질문인 ‘무엇’을 할 것인가에 몰입해 들어간 어리석음을 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양의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서양문화(명)의 약점이 생긴 것입니다. 서양문화(명)가 한결같이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이며, 물질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할 뿐 아니라, 그 결과에 대해서도 궁극적 책임을 지지 않는 매우 우매한 문화(명)라는 사실입니다.
다음 호(2017년 4월호)에는 ‘포기해서는 안되는 질문, 나 인간은 누구인가?’, ‘분리, 분석 후 종합이라는 허상의 대가인 인공지능의 시대에 너 인간 두려워 떨지 않니?’라는 주제를 다루겠습니다.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91호 < 융(복)합, 통섭이라고요? 꿈 깨시지요! 2편 > 으로 이어집니다.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segensong@gmail.com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89호 >에 실려 있습니다.
< 서양문명의 황혼에서 새로운 문명의 여명으로 - 바로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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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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