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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문화(명)와 서양문화(명)가 유사하지만 다르게 중심(종교)에서 파생해 나간 역사(4)

2019년 7월호(117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9. 8. 21.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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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문화의 황혼에서 새 문화의 여명으로 24]

  동양문화(명)와 서양문화(명)가 유사하지만

다르게 중심(종교)에서 

파생해 나간 역사(4)

 

영어, 수학, 국어가 왜 그렇게 중요해야 했을까?

영어, 수학, 국어 세 과목만 잘 하면 좋은 미래가 보장되었던 시절은 이미 지나간 과거입니다. 21세기의 아침이 환하게 밝아버린 지금도 그 추세는 여전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 세 과목이 내 생애에서 그렇게 중요했던가를 질문한다면, 다들 어떻게 대답하실는지요. 초등, 중등 교육과정의 긴 기간(12년)동안, 즉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고 가장 교육하기에 좋은 말랑말랑한 시절에 말입니다. 그것들이 과연 내가 평생을 지내면서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과목이었나요? 아마 이런 질문에 이 세 과목을 전공하고 그것으로 평생을 먹고 사는 정말 얼마 안 되는 분들 외에는 맞다고 대답하기 어려울 겁니다. 나머지 과목들은 적어도 중학교 졸업까지는 늘 들러리였으며, 겨우 고등학교 3년 과정에서 자기가 앞으로 전공할 것을 조금 배려하여 공부했을 뿐입니다. 인생에서 배워야 할 중요한 것들과 과목들이 정말 많았지만 그것을 배우지 못한 채 인생이 흘러가버린 것이 안타깝지 않나요? 인문적 영역(논리, 수사, 역사, 심리, 문학, 철학 등) 뿐 아니라, 사회적 영역(법, 사회, 정치, 경제 등)과 자연적 영역(물리, 화학, 생물, 지리, 지질, 천문, 우주 등)을 제대로 흥미를 가지고 배우도록 높은 배점으로 유도된 적이 있었던가요? 그렇지만 이런 과목들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이 있다는 것을 어른이 되어버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압니다. 즉 자신을 절제하고 훈련하며 도야하는 인격적 요소가 사회생활에서 너무나 중요한 것을 알지만 어디서 배워야 할까요? 한국 최고 직장의 사장들에게 전공실력이 좋지만 충성되지 못한 자와 실력은 좀 못하지만 충성된 자 중에서 누구를 뽑을 것인가를 물으면 거의 대부분 후자를 택할 것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 인격적 요소를 배우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한국에서의 세대 간의 대화와 관계단절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에 출생한 세대가 자녀들이 도무지 듣기 싫어함에도 똑같이 하는 잔소리가 있습니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도시락에 계란 하나 싸가는 것을 감지덕지 해가며 공부했는데, 모든 공부할 환경이 다 준비된 너는 왜 그렇게 집중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대화와 세대 단절의 1차 원인은 어른 세대에 있다는 것을 자신들이 더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선 말기의 실패한 유교 이데올로기의 오랜 학정, 일제 36년의 수탈, 그리고 바로 이어진 한국전쟁이라는, 150여 년간의 죽음의 덫을 빠져나와 겨우 태어나고 살아남은, 어른 세대들의 주 관심은 그야말로 잡초처럼 억척같이 살아남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온 평화 시기의 교육도 결국 그런 절박한 생존문제 자체를 해결하기 위한 교육이었고, 그런 생존목표를 잘 따르는 것이 그 전 세대인 부모를 향한 효도로 생각했지요. 그렇지만 한반도에서 지난 오천 년 동안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66년이라는 최장의 평화기간 동안 태어나고 살아가는 다음 세대의 관심은 이와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게 부모들처럼 악다구니를 쓰며 살아야하지?”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사실, 사람이 살아야할 근본 이유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은 진지하게 질문할 수밖에 없고, 이 질문에 답을 얻어야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다음 세대가 이런 질문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어른 세대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하지도, 답을 제대로 찾지도 않았기 때문에, 자녀들과 마주 앉아 대화하면서 해줄 말도 없으니 단지 공부 잘하라는 말만 할 뿐입니다. 물론 세태에 잘 적응하며 살아가는 꾀 많은 약아빠진 자녀들이라면, 이런 질문들은 아예 하지도 않고 부모세대들처럼 물질적, 사회적으로 살아남는 데 악착같이 몰입하여 좋은 대학, 직장에 들어가서 겉으로 성공한 것처럼 위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사실상 부모와 자녀간의 세대문제이기 이전에 우리 모두가 처하였던 역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일본과 미국을 통해 서양을 베끼려고 했던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우리의 역사 서양을 베낀 일본을 다시 베낀 우리

우리가 키 작은 왜놈이라고 하시했던 일본이 자신과 세계를 향해 이룬 삼대 업적(‘메이지유신’1868, ‘청일전쟁 승리’1894, ‘러일전쟁 승리’1905)을 아주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한반도인은 이를 경탄하면서도 시샘했습니다. 그런데 이에 더해 이어진 36년 동안의 일제에 강점당했던 수치스러운 역사는 또 다른 감정인 열등감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한반도인들에게 일본에 반발하면서도 그들이 서양을 베꼈던 것을 따라 하자고 나서게 한 동력이 되었습니다. 메이지유신 직후 일본에 엄청난 종류와 양의 영어사전이 출판된 것과 같은 현상에 비하면 우리는 한참을 늦었지만 그래도 노력한 겁니다. 그런 일본 베끼기 현상의 하나가 박정희가 일본을 따라잡으려는 본심을 드러내며 ‘유신’이라는 단어를 베껴가면서까지 시도했던 독재입니다.
그렇지만 일본이 서양 베끼기에 열중하면서도 자신을 지키는 방식으로 제창했던, 동양 삼국에 일반화된 표현인 ‘동도서기’(東道西器 동양의 도와 서양의 기술)나 그것의 일본식 표현인 ‘화혼양재’(和魂洋才)는 사실 헛된 구호에 불과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되고 말았습니다. 즉, 동양적 ‘도’(道)나, 일본적 ‘혼(魂)’은 빈 것이기 때문에 물질주의적인 서양을 극복하지도, 이기지도 못하여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연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부터 지금까지 서양을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받아들이고 극복했을까요? 그것에 비해 중국과 한국의 사정은 어떨까요? 동양 삼국 중에서 어느 누구도 자신 있게 극복했다고 대답할 수 있는 나라가 없을 겁니다. 지금 대륙을 차지한 14억의 거대한 21세기의 중국이 하고 있는 기가 막힐 정도의 어린아이 짓거리(?)들에 우리는 한탄하지만, 그렇다고 한반도인인 우리는 나을까요? 허황되게 서양을 이해하며 베낀 일본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서양을 베낀 이차적 베낌이기에 복사를 복사한 꼴인 셈이니, 얼마나 왜곡이 심했겠습니까? 예를 들어, 고등학교 때에 배운 청마 유치환의 ‘깃발’이 일제 당시에 서양에 들어온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을 압니다. 하지만 청마가, 그리고 당시의 일본이 과연 서양의 모더니즘과 그 이후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했을까요? 제대로 이해하려면, 서양이 오랫동안 기준점으로 이해했던 모든 그리스-로마적 문화(명)의 기준이 너무 혐오스러워서 떠나고 싶을 정도로, 그 안에서 쩔어서 살아보아야 할 것이지만, 일본은 19세기말 20세기 초 당대에 유행하던 것을 그냥 따라한 것에 불과한 겁니다. 또 진화론이 발표되고 곧 이어서 그것을 사회적으로 적용한 허버드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이 나오자, ‘옳거니!’하고 일본은 그것을 동양의 다른 유서 깊은 나라인 한반도와 중국에 적용시켜서 자신의 우월성을 나타내려 했습니다. 이것은 히틀러가 본격적으로 아리안우월주의를 적용시키기 50여 년 전의 일이니 얼마나 일본인들이 발 빠르게 베꼈던가요? 다시 교육에 돌아가자면, 우리가 영, 수, 국을 강조하던 교육체제는 순전히 일본적 서양 베끼기를 다시 베낀 것에 불과한 겁니다. 그렇다보니 모든 인류에게 공통되는 질문인 ‘내가 왜 살아야 하는가?, 인생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역사와 문화를 초월하는 질문에 대해서, 중국식으로는 ‘효도를 위해서’, 일본식으로 ‘천황을 위하여’라는 무의미한 답변만 할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유럽을 베낀 미국을 다시 베낀 우리

일제 해체와 한국동란과 함께 이 땅에 물밀 듯이 밀려온 미국의 영향은 한반도인의 거의 모든 면에서 절대적이었습니다. 한반도인은 이제야 일본을 통해서 이차적으로 서양을 베끼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통해서 일차적으로 서양을 베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교육에 열을 올렸으며, 우리 교육의 최종 목적지는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에의 유학이었습니다. 형님이 유학시험(당시에는 그런 것이 있었습니다!)에 합격한 것에 그렇게 감격하던 어머님의 모습이 생각나는군요. 그런데 ‘미국이 과연 서양인가?’ 혹은 더 정확하게‘ 서양의 본질인가?’하는 근본 질문을 해보아야 하는데, 미국인 자신들이, 그리고 미국이 자신들에게서 파생해 나갔다고 생각하는 유럽 본토인들이 과연 긍정적으로 답할까요? 물론 미국이 압도적인 물리력으로 2차 대전을 치러 자유 유럽을 승리로 이끌었고, 그 이후의 세계의 안정과 번영을 주도한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인정합니다. 하지만 더 크고 근본적인 문화(명) 전체의 관점에서 과연 미국이 서양문화(명)의 본질을 대변할 수 있느냐를 묻는다면, 유럽인은 물론 그리고 미국인 자신들도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할 겁니다. 그 이유는 미국이란 나라와 미국문화 자체의 정체성 자체가 아직까지 형성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서구 중에서도 물질위주의 서양문화(명)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경향을 가장 많이 가진 나라가 미국이기 때문입니다. 유럽에서 출발해서 정착한 미국인들이 미국을 주도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려고 기대는 언덕은 자신들이 떠나왔던 유럽적 전통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내세우는‘독수리’깃발은 로마제국 이후부터 계속 이어진 로마적 전통을 상기시키며, 정치, 경제, 사회, 법 등의 거의 대부분의 제도들은 근현대의 영국-프랑스-독일을 한 다리씩을 건너서 이해한 그리스-로마적 전통에 근거한 것일 뿐입니다.
심지어 미국의 ‘종교’조차도 유럽을 흉내 낸 것에 불과합니다. 많은 미국인들이 속한 근본주의적 기독교나 거기서 파생되어 발생한 많은 기독교 이단들은 세상의 배꼽에서 발생한 기독교의 본질이 가진 ‘두 가지 특징’을 잃어버린 결과로 생긴 현상입니다. 즉 기독교의 본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서양적 물질위주적 이원론적 기독교’라는 왜곡된 특징을 가질 뿐입니다.
세상의 배꼽에서 발생한 본질적 기독교가 가진 ‘첫째 특징’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누구나 동의하고 놀라고 칭찬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으로 순교하며 무려 250년 동안 로마의 극심한 핍박을 이겨내 종교공인을 받아내었고, 심지어 국교화까지 이루었던 능력입니다. 칼과 창이라는 물리적 힘이 없이 순전히 정신(영)으로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들을 이긴 겁니다.
그렇지만 본질적 기독교에는 더 중요한‘둘째 특징’이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의 종교로서의 기독교 공인 이후에 즉각 실패로 이어졌던, 정신(영)과 물질의 이원론에 빠져버린 기독교 역사와는 정반대되는 특징입니다. 그것은 바로 구약성경의 정신(영)과 물질의 일원론적 본질과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그 안에서 이미 약속된 경천동지할 전혀 새로운 차원의 종교로 완전히 창조적인 문화(명)의 기초를 이루었다는 사실입니다. 쉬운 예를 들 수 있습니다. G20을 하는 정치지도자들이 주로 경제 이야기나 하는 조잡한 모습에 비해서, 솔로몬을 찾아왔던 주위의 왕들은 그런 물질적 문제는 이미 해결했으므로, 대신에 모여서 지혜를 토론하는 경연대회를 연 것과 같은 현상 말입니다. 그런데 로마를 그렇게 극복했던 진정한 기독교가 (1) 7세기 이후에 중세기의 위선적 기독교, (2) 또 그 전통을 그대로 이어가며 세계적 재패를 노리는 위선적 로마교, (3) 제국주의의 수탈을 막지 않은 기독교국가라는 전통을 만들며 사실상 물질과 세상을 그렇게 좋아하면서 외적으로는 사랑을 외치는 위선적 개신교 기독교라는, 어이없는 타락한 현상을 보이는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입니다. 바로 이런 매우 복잡하고 왜곡되고 뒤틀린 종교적 전통을 가진 유럽을 그대로 베낀 것이 미국의 종교형태인 겁니다. 우리 한반도인은 일본을 베낀 것보다는 낫겠지 하고 이것을 베낀 겁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이런 미국의 근본주의적 교회의 영향을 받은 한국의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이 이스라엘이 독립한 것이 말세의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며, 이스라엘이 현재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을 지중해에 몰살시키려고 작정했지 않나는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지독하게 압박하는 현실을 모르쇠로 일관할 뿐입니다.   
앞으로 미국과 미국문화(명)을 본격적으로 다룰 때가 오겠지만, 이렇게 미국이 유럽을 베낀 것을 다시 베끼기에 열중한 지난 60여년의 우리의 세월을 이제는 단호하게 정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소위 진보라고 명칭을 살짝 바꾸어서 이제는 혐오스러운 단어가 된 좌파, 더욱 혐오스러운 단어가 된 공산주의/사회주의의 본질을 없는 척하며 위선하는 이들(좌파)을, 기껏해야 4백년이 채 안되며 아직도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는 미국인과 미국과 미국문화(명)을 근거해서 대적하려는 5천년의 역사를 가진 한반도인들의 태도(우파)는 너무나 허망한 것입니다. 정반대로 이런 특이한 미국현상에 기대어서 미국인들이 기초로 삼은 (개인적)자유민주주의(우파)를 저항하려고, 예를 들면 경희대를 중심으로 영향을 미치는 슬라보예 지젝(1949~)을 따라 수구주의적으로 레닌을 다시 되살리려 하며 기껏해야 지난 2~3백여 년 밖에 안 된 유럽 베끼기에 나선 한반도인들의 태도(좌파) 역시 헛발질에 불과한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더욱 더 3천년이 되어가는 유럽과 서구문화(명) 전체의 본질을 보며, 그 한계를 정확하게 지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후세대를 영, 수, 국 보다 더 나은 그 무엇을, 또 왜 가르쳐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근본적인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일본을 통해 서양 베끼기도, 미국을 통한 서양 베끼기도, 심지어 유럽을 통한 서양문화(명) 베끼기도, 더 이상 할 짓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겨우 지난 5백 여 년 동안 세계를 휩쓸었던 유럽이 스스로를 바라본 서양문화(명)은 십중팔구 자화자찬으로 도배되어 있기가 십상이라는 것을 그들의 문화(명)과 역사를 몰라도 누구나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과연 서구문화(명)에 대한 그들의 위선적 자신감이, 19세기에 매우 물질적, 육체적 존재로 인간을 정의하는 진화론, 공산주의, 성性심리학(프로이드)에 의해 무너지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 두 번의 세계대전을 일으켜서 인류 전체를 멸망하게 만들 뻔하게 함으로서, 까발려지고 와르르 주저앉게 된 겁니다. 

유럽인들은 자신을 제대로 알까?

그러면 이제 서양인들은 과연 자신을 거울에 비쳐서 제대로 보려고 하며, 또 제대로 볼 수 있을까요? 21세기에 들어와서 가장 양심적이라고 여기는 여러 방면의 학자들의 글들 속에서 서구문화(명)에 대한 자신감이 아주 많이 없어지긴 했지만, 완전히 손을 놓지는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여기는, 정신적 근원(철학, 학문, 정치, 예술)으로서의 그리스, 그리고 물질적 근원(법, 건축, 군사)으로서의 로마라는, 찬란하게 보이지만 사실 허상에 불과한, 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더 가치중립적일 수 있는 학문에 속하는 인류학, 역사학, 철학 등에 종사하는 가장 양심적 학자들이라 할지라도, 꼭 마지막에는 그리스가 비록 동양의 영향을 받아서 출발했으나 그 독창성, 우월성, 심지어 후대에 동양에 영향을 역으로 주었다는 식의 설명으로 마무리하고 싶은 생각을 참지 못하니 말입니다. 즉 서양을 철저히, 근본적으로,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존재와 그 이유가 없어진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진정한 부활을 경험하려면,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철저히 근본적으로 완전히 부정해 보아야 합니다. 죽어야 살기 때문입니다(생즉필사生卽必死 필사생즉 必死生卽). 그런데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할 것 같지 않다면, 이제는 우리가 나서야 할 차례입니다.‘타인의 눈’을 가진 장점을 이용해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외부인이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편파적일 위험이 생길 수 있는데, 두 가지 토대를 확실하게 먼저 쌓는다면 피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한반도인 자체가 가진 근본적 속성 하나를 먼저 제거한 뒤에 말입니다. 그 속성이란 바로 밖에서 들어온 것을 그 밖의 사람보다도 더 신주단지처럼 섬기는 한반도인의 근성 말입니다. 불교가 들어왔을 때 우리에게 불교를 전해주었던 중국인보다 심지어 인도인보다 더 본질을 찾았습니다. 중국에서 유교가 들어왔을 때 조선시대 5백년 내내 중국인들보다 더 심하게 수구주의적으로 신유교(주자학)를 절대종교처럼 섬겼던 바로 그 근성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사회주의가 들어오나 기독교가 외부에서 들어오나, 전해준 것을 정말 신주단지처럼 모셨던 지난 백여 년의 그 태도 말입니다. 만약 마르크스, 레닌, 그리고 지독한 스탈린조차도 살아서 북한 공산주의의 실상을 살펴본다면 얼마나 어이없어할까요? 또 남한에서 독재자와 싸울 때에 마르크스의 [자본론] 원전을 읽고 레닌 사상을 대할 때에 눈물 흘리면서 거의 종교적 개심과 같은 것을 대학로에서 경험했던, 이 글을 쓰는 저의 동시대인들이, 유럽 공산주의가 무너진 지 벌써 30여년이 넘어가는 데도, 그런 과거를 쉬쉬하면서 버젓이 현정치계에 발을 담그고 있는 현실입니다. 원어와 원전강독을 중시하는 서울대의 특성을 독일어, 라틴어, 히브리어, 헬라어 등을 해독할 수 있다는 허망한 자부심을 가지고서 말입니다. 그런 자부심으로 이스라엘에까지 가서 신학을 공부한다고 했으나 사실은 그 유대인 스승들을 따라서 실제로는 유대교와 세속철학을 받아들인 것 밖에 되지 않은 현실 말입니다. 또 기독교의 우파나 좌파 할 것 없이 근본주의적인 한반도인의 근성이 드러난 전형적 사례가 아닌가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런 태도야 말로 우리 한반도인에게 상존하는 ‘사대하는 근성’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근성을 각 개인들이 정말 포기하려고 작정한다면, 인간의 진정한 본질에 대한 두 가지 기초를 확실하게 쌓을 수 있을 겁니다.

동양인인 우리가 세계화된 서양문화(명)을 제대로 평가하고 극복하려면?

‘첫째’는 많은 동양인들과 심지어 서양인들이 그렇게 했듯이 마치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동양의 정신문화 같은 것을 되살리려는, 너무나 흔해 빠진 식상한 태도를 과감하게 버리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미 다룬 것처럼, 유럽보다도 매우 넓은 아시아에서, 상대적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동쪽으로 퍼져나간 그 오랜 기간 동안, 만들고 다루고 실험해 본 온갖 문화(명)들이 얼마나 한계가 있으며 무의미하고 허망한지도 뼈저리게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런 동양문화(명)에 호소하면서 현재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물질주의적 서양문화(명)을 도외시한다면 이는 매우 비현실적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하면 물질과 정신을 분리시키는, 무책임하고 심지어는 악한 이원론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 이미 말씀드린 더 중요한 ‘둘째’가 있습니다. 그것은 문화(명)를 동양과 서양이라는 둘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동양과 서양, 그리고 세상의 배꼽의 문화(명)(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문화(명))이라는 셋으로 구분하는 겁니다. 서양인들은 이 점에 대해 매우 애매한 입장을 취합니다. 즉 ‘기독교가 서양의 종교냐, 동양의 종교냐?’하는 질문 말입니다. 적어도 지난 2천년동안 서양과 관계하였으므로 기독교는 서양적 정체성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조금 더 성실하게 근본을 찾을 때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대번에 정반대로 동양적 종교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 기독교를 동양의 종교라고 여기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동양의 그 어떤 상대종교와도 근원적으로 다른 절대종교이며, 그것이 이룬 문화도 매우 특이하게 절대적 성격을 기독교가 지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개인(주의)’에 대한 자각은 철저하게 기독교의 산물입니다. 또 그 개인에서 파생된 ‘인권’과 ‘자유’란 개념은 인문주의자의 소산이 아니라, 그들 이전에 있었던 기독교적 전제에서 절대신만 쏙 빼어버린 가운데 남은 것임이 단박에 드러납니다. 모든 인간이 ‘신의 형상과 모양’이라는 선포는 구약성경의 시작인 창세기의 제1장에서부터 나타나는 매우 오래된 것입니다. 이어서 18세기에 나타나서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일반화된 정치의 ‘삼권분립’원칙은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장(입법)-왕(행정)-예언자(감찰)’에서 절대신을 빼버리고 남은 것의 판박이에 불과합니다. 또 어쩔 수 없이 현대사회의 근원으로 취하는 ‘계약사상’도 ‘고대 이스라엘이 절대신 야훼’와 맺은 계약에서 절대신을 쏙 빼버린 것에 빈 껍질에 불과합니다.    

이런 가운데서 서양문화를 근본적으로 이해하려는 우리 관심의 대상을 현대의 물질주의적 서양문화(명)의 본질이 되는 서양철학, 그 철학의 기원이 되는
  1)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그리고
  2) 소피스트와 그들에 대항했지만 자신도 역시 소피스트에 속했던 소크라테스, 그리고 
  3) 그를 이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마지막으로 
  4) 도시국가를 벗어나서 제국시대의 출현과 함께 무너진 이 모든 철학전통 뒤에 나타난 신플라톤주의, 회의주의, 에피큐러스주의, 스토아주의를 개인적, 개별적이 아닌, 전체적 문화(명)사적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1) 이들의 초기 철학이 그리스 신화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2) 그리스 신화는 바로 동쪽에 이웃한 서아시아의 신화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3) 다시 서아시아의 신화들은 세상의 배꼽의 종교적 전통과 유사하지만 무언가 근본적 차이가 나는데 이것을 살피려고 합니다.

  이런 차이가 흔히 피상적으로 해석하듯이 과연 종교의 진화로 설명될 수 있는지, 아니면 전혀 다른 해석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지 말입니다. 이렇게 해야 옛 문화(명)의 황혼기에 선 우리가 전혀 새로운 문화(명)의 여명을 진정으로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입적 요소가 많은 글인데, 다음 호는 본격적 주제를 다루겠습니다. 양해하시길 바랍니다)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010-6844-0609/segensong@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17>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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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역적 동네'뿐 아니라 '영역적 동네'로 확장하여 각각의 영역 속에 모여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스토리와 그 속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문명, 문화현상들을 동정적이고 창조적 비평과 함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국내 유일한 동네신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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