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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 장인의 자개 스토리

2019년 12월호(122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1. 20.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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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 장인의 자개 스토리

인쇄의 막다른 골목에서 자개를 만나다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컴퓨터가 보급되기 전인 80년대 중반부터 충무로에서 인쇄 일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인쇄의 사통팔달 요지는 충무로였지요. 종이인쇄를 비롯한 어떤 인쇄든 충무로에 가면 모든 게 가능했습니다. 저는 어떤 주문이 들어와도‘안 되는 일은 없다’는 신념으로 용인 에버랜드(그 당시에는 자연농원), 제주중문관광단지, 천안독립기념관 등 굵직한 일들을 하면서 황금 같은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침에 일찍 출근하면 업체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고, 늦게까지 야근을 밥 먹 듯하고, 쉴새 없는 거래처 전화에 평일 휴일도 없이, 최소한의 여유시간도 가지지 못한 채, 수년의 세월동안 체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 칠 때까지 일을 했습니다. 
이리 일은 원 없이 했건만 일한 만큼 보람도 없고 수입도 적고… 죽어라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주인만 버는 것 같아 제가 사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90년대 초에 개인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불어 닥친 혹독한 IMF를 겪으면서 생존을 위해 정말 난해한 일도, 불가능 하다고 다른 업체가 포기한 일도 완성했습니다. 제게 맡겨진 일은 인맥을 총동원해서 어떻게든 해결했더니 업계에는‘박석호에게 맡기면 안 되는 게 없다’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고객들이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거래처란 인식이 심어졌습니다. 기업의 담당자들은 맡긴 인쇄물이 잘못 나오면 사내에서 큰 낭패를 보기 때문에 고객들이 요구한대로 정확하게 디자인과 인쇄물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저를 신뢰하며 계속 찾아왔습니다. 
업체들의 납기일을 맞추며 정신없이 살다보니 여유라곤 찾기 어려운 삶이 반복되었습니다. 그 즈음에 소문을 듣고 찾아온 공예품 자개업체에서 공예디자인을 의뢰해왔습니다. 이것이 자개와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었습니다. 


새로운 도전, 자개 디자인
자개 도안은 전통도안을 사실처럼 표현하는 작업이라 세밀한 집중력과 끈기가 필요한 굉장히 난해한 작업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소나무의 솔잎을 표현하려면 그 하나하나를 다 디자인 해야 할 정도로 자잘한 선들이 많고, 색상도 전통 자개 공예에 어울리게 잘 넣어야 했습니다. 일반 상업 도안들은 보통 1~2시간, 아무리 복잡해도 길어야 반나절이면 끝나던 것에 반해, 자개 디자인은 난이도에 따라 몰입하여 작업해도 며칠이 걸릴 수 있는 디자인도 있습니다. 그만큼 노력과 수고가 많이 들어가는 일이다보니 끈기는 필수조건이었지요. 
우리 회사 디자이너들에게 조금 난이도 있는 도안을 맡겼었는데 처음에는 10~15일이 걸리더군요. 경력이 5년 정도 있던 사람이었음에도 새롭게 자개디자인 도안을 해내는 것이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사람을 키워야한다는 생각에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려도 편하게 작업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습니다. 누구나 작업이 익숙해지고 실력이 늘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디자이너들이 스스로 버티지 못하고 모두 그만두면서 결국 디자인 작업도 다 제가 해야만 했습니다. 저보다 더 나이가 드신 디자이너 분도 자신의 일을 찾아 도전하기에 4년 정도를 디자인과 자개하는 방법을 다 가르쳐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잘 배워서 독립하셨지요. 


인쇄경험으로 자개공정의 혁신을 완성하다
초기에는 자개공예품 디자인만으로 회사를 운영할 수 있을 정도의 수익이 나지 않아 다른 인쇄업을 계속 병행했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다른 일을 동시에 한다는 것 또한 쉽지 않더군요. 그래서 자개 공예품 업체들과 제품 물량을 합의하여 자개로 올인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개관련 일을 조금씩 할 때와 달리 대량으로 진행하려고 보니 이것은 또 새로운 세계였습니다. 
지금도 전통방식을 고수하며 자개에 색을 입히는 작업을 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수작업으로 만든 자개공예품들은 가치가 있지만 그만큼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고객들이 제한적이어서 자개 대중화를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공정개선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다양한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실크스크린 인쇄 방식에 변화를 주어보려고 인쇄기자재 전시회도 방문해 자개 인쇄에 적합한 기계를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자개작품을 하나 만드는데 일반적으로 10회 정도의 공정이 들어가는데 그 중 하나라도 제대로 되지 않으면 작품의 완성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제게 작업을 의뢰하였던 공예 공방 사장님은 보석함 전문가였는데 장인정신이 투철해서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폐기처분하는 분이었지요. 제품 1,000개를 작업해서 납품하려는데, 아뿔사! 제품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겠습니까? 문제의 원인은 마지막 코팅 작업. 자개제품은 인쇄를 한 후에 코팅처리를 해야 하는데 이 부분이 잘못되었던 거지요. 관건은 코팅에 아주 적합한 잉크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 사용하던 잉크라 해도, 누가 추천을 해준 잉크라 해도, 내 제품에 제대로 맞지 않으면 그만이었습니다. 밤을 새며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가운데 집에도 제대로 못 들어갔지요. 
공방 사장님의 실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전에 다른 곳에서의 작업 퀄리티보다는 높았지만 최고의 품질을 기대하던 터라 그 실망을 돌이키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한동안은 저를 찾지 않으시더군요. 저도 자존심이 무척 상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후가공에 적합한 잉크를 찾아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었던 것은 자개 분야에 뛰어들기 전에 했던 실크스크린 인쇄에서 다양한 잉크들을 사용해본 바로 그 경험이었습니다. 그게 없었다면 아마 적합한 잉크를 찾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코팅작업 후에 에폭시를 바르고 굽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이 과정 역시 굽는 온도와 시간에 따라 퀄리티가 결정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마지막 굽는 과정에서 제품에 열이 가해질때 코팅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적색이 분홍색으로 변할만큼 색상이 날아가 버리는 일이 자주 생기기 때문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런 공정 하나하나를 경험하고 혁신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자개 디자인을 도안하고, 자개를 잘라 붙이고, 색칠하고, 코팅을 한 후에 에폭시를 바르고 구워내는 전 과정을 거쳐 제품이 완성되어 내 품에 들어오기 전까지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과정들을 체득하고 제대로 되기까지 한 달에 보름은 집에도 못 들어가고 사무실에서 지내며 스스로 방법들을 터득했습니다. 


자개 대중화를 꿈꾸며
우리가 사용하는 제품들의 소재 중에 보는 각도와 빛의 정도에 따라 이처럼 오묘하게 보여지고 표현할 수 있는 소재는 자개 밖에 없을 듯 합니다. 어떤 보석이라 할지라도 자개의 오묘함에 비길 수 없을 것입니다. 중국의 인조자개도 있지만 천연자개를 대신하지는 못하지요. 지금도 호텔이나 관광지, 공항 등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곳에는 자개제품들을 흔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인에게 대중화되기까지는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자개를 일반에 널리 알리기 위해 인사동 등에서 자개 체험도 많이 하고, 방학 때에는 아이들 대상 체험 프로그램들도 다양하게 열리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저도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자개를 소개하기도 했지요. 
먼저는 우리의 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는 자개 = 오래된 것, 장롱이란 생각을 불식하려 합니다. 요즘은 그나마 손거울, 보석함, 넥타이핀, 볼펜, 텀블러, 핸드폰 고리와 케이스 등 다양한 자개로 된 제품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스티커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자개로 다 할 수 있을 만큼 적용 범위가 대단히 넓어졌습니다. 하지만, 가격을 낮추는 것 또한 급선무입니다. 그래야 일반인도 부담 없는 가격으로 자개를 만날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우아한 자개를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다니는 그날을 기대하며 저는 오늘도 자개를 적용할만한 좋은 제품을 찾고 있답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자개제품 선물 어떠신가요?

서울시 성북구 보국문로 32길 38, 
다원 대표 박석호
010-5478-7435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22>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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