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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미국 정착기 (3)

2019년 12월호(122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1. 2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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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속의 한국인]

 

좌충우돌 미국 정착기 (3)

20년 전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하기까지의 삶의 이야기를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에 사는‘캐빈 리’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에 보내왔습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여러 개인적 상황 속에서 이민행을 결정했을 텐데,‘캐빈 리’의 삶을 통해 실제 이민자의 삶이 어떠한지, 어떻게 난관들을 극복해갔는지를 독자들에게 들려주려 합니다. 이 글은 3회에 걸쳐 연재되어 이번 12월호가 마지막회입니다.

길이 열리다!
이직을 결심하고 지원한 회사는 ‘Rescue Rooter’라는 미국 전역에 지점을 가진 큰 회사였습니다. 급료 및 직원 처우가 아주 양호하다고 소문난 회사였죠. 입사지원 서류를 받아 집으로 돌아와 조심스럽게 살펴보니, 아뿔싸! 여기도 최소 5년 이상의 경력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이런 기회가 온다는 보장도 없기에, ‘에라 모르겠다’하고 경력란에 5년이라고 썼습니다. 한 3일 지나서 드디어 전화가 왔습니다. 면접일이 잡혔다고 오라하지 뭡니까.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미국회사에 정식으로 취직하려면 H1비자로는 안되고, 정당한 신분 자격이 필요했습니다. 면접 시 신분증(운전면허증)과 쇼셜카드를 가져가야 하는데, 붉은 글씨로‘이 쇼셜번호는 특수 목적으로만 사용된다’라고 기재되어 있는 H1 비자카드로는 절대 면접을 통과 할 수가 없었던거죠. 포토샵으로 카드의 붉은 글씨만 지워보는 방법도 생각했지만, 걸리면 공문서 위조로 형무소감이니 못하겠더라고요. 
결국 아무런 대책 없이 면접을 보러가야 했습니다.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데, 젊은 백인 남자가 플러밍(배관)에 대해 몇 가지를 묻더군요. 다행히 이전에 들어 본 얘기라 명쾌하게 답을 했지요. 면접관은 웃으면서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데, 이 일을 할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면접관이 절대 나이를 물을 수 없습니다. 나이를 물었다가 탈락시키면 법에 걸리거든요. 아무튼 저는 “아주 튼튼하다”고 자신 있게 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순진하게 웃으며 자기는 통과 됐다고 하면서, general manager와 다시 한 번 인터뷰를 해야 하니 날짜를 잡아 연락을 준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신분증과 쇼셜카드를 복사해야하니까 달라고 했습니다. 그 중요한 순간, 저는 운전면허증을 내주면서 아주 당당하고 태연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쇼셜카드를 깜빡 잊어먹고 집에 놔두고 왔어요. 나중에 드릴께요.” 그랬더니 백인 매니저가 또 순진하게 웃으면서 됐다고 하더군요. 역시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더라고요.
며칠 후, 마음씨 좋게 보이는 흑인아저씨와 두 번째 인터뷰를 했습니다. 매니저는 이것저것 묻더니 갑자기 자기 앞에 있는 재털이를 내 앞에 놓으면서 한 번 팔아 보라지 뭡니까? ‘갑자기 재떨이를 어떻게 팔아.’ 궁리 끝에 “이 재떨이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서 팔기는 어렵지만, 플러밍 일을 하게 되면 손님이 좀 비싸다면 깎아서라도 꼭 일을 성사시켜 맨손으로 오는 일은 없게끔 하겠다.”하고 영어로 “better than nothing”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흑인 아저씨가 빙그레 웃더니, 5년 경력은 어디에서 했냐고 물었습니다. 또 한 차례의 위기였죠. 그래도 집에서 미리 생각해둔 대로 그럴듯하게 둘러대니 그 매니저는 기분이 좋았는지 꼬치꼬치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내일부터 출근할 수 있냐고 하더군요. “Of course, yes sir.” 속으로 ‘미국 사람들은 참 순진하네’하며 쾌재를 불렀습니다. 

이상한 나라, 미친 나라 미국
우여곡절 끝에 입사한 회사에서 4년을 다니면서 드디어 플러밍 자격증을 딸 수 있는 경력이 생겼습니다. 새벽 2시부터 5시까지 대략 3시간씩 공부하며 준비한 시험에 합격을 하고 회사에 알렸습니다. 플러밍 라이센스가 있으면 우선 급료가 2%정도 인상되고 지위도 master plumber로 급상승하며 field manager급으로 대우를 받습니다. 전에는 고참 사원들이 즐비하고 동양인에 영어도 서툴러서 직원들이 나를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정식 매니저와는 급도 다르고 월급도 차이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회사에서 매니저를 구한다고 하니, 은근히 기대가 되었습니다.
‘라이센스를 가진 사람은 나밖에 없잖아.’그러나 막상 뚜껑을 여니 멕시코계 미국인이 매니저로 뽑혔습니다. 동양인에 대한 보이지 않는 유리벽 같은 것이 느껴졌죠. 이제는 떠날 때가 되었나 보다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우연치 않게 집을 사게 되었는데, 미국이 정말 미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미국은 한 직장에 2년 이상 연속 근무경력이 있고 신용점수가 700점 이상이며 무주택 소유주이면 집사는데 무제한 융자를 해 줍니다. 실리콘밸리라서 집값이 62만불로 비쌌는데 은행에서 65만불을 빌려주면서 나머지는 복덕방비와 취득세를 내라고 합니다. 62만불짜리 집을 싸인 만으로 현금 한 푼 없이 구매하다니… 더 웃긴 건 은행에서 비싼 이자를 반만 지불하라고 합니다. 나머지 반은 자동적으로 대출액이 늘어나는 방식이니, 집을 사고도 계속 추가 융자를 해주는 셈이었죠. 은행에서는 집 값이 계속 오르니 걱정이 없다고 합니다. 하여간 외상이면 양잿물도 먹는다는데…, 덕분에 할부로 트럭 한 대 뽑고, 거실에 중고 책상하나 구입해서 플러밍 사업에 도전을 했습니다.

불황 끝에 찾아온 기회
2007년, 미국 발 경제부도로 세계가 난리가 났습니다. 나 같은 빈털털이 사람에게까지 무제한 대출을 해 주더니 결국 문제가 터져 버린 겁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도리어 저에게는 재미있는 일이 생겼습니다. 62만불에 산 집값이 40만불 깡통주택이 되었는데, 은행에서는 내가 집을 버리고 도망갈까 봐 이자를 제로로 만들어 줬습니다. 덕분에 생활비에 약간씩 여유가 생겨 원금을 조금씩 상환하는 저력까지 생긴 겁니다. 금융위기가 오면서 문을 닫는 플러밍 회사가 많아졌는데, 운 좋게 한 회사를 그냥 인수할 기회도 잡게 되었습니다. 이 직업은 기술자를 구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데, 회사를 인수하니 숙련된 기술자도 얻고 여기에 광고를 열심히 하니 주문이 자연히 늘어나 매출액도 증가했습니다. 와이프가 더 이상 식당에서 일을 안 해도 될 만큼 생활이 가능해졌습니다, 드디어 미국으로 온지 10년 만에 영주권을 얻고 어엿한 중산층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후기 
미국에 온지도 벌써 20년이 되었습니다. 처음 미국에 와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서로 다른 문화의 차이였습니다. 미국이 완전한 자유 시장경제라면, 한국은 비교적 많이 정제된 시장경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한 품목을 같은 지역 내에서는 거의 동일한 가격으로 판매합니다. 만일 가격이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되면 소비자가 속았다는 느낌이 들어 항의를 하거나 환불을 요구하며 강력하게 불만을 표출 할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바로 옆집에서 같은 물건을 절반 가격으로 팔아도 전혀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아니 못합니다. 최선은 물건을 가급적 환불하는 것인데 어떤 집은 가격이 비싸다는 이유만으로는 환불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사업에 있어 미국은 빨리빨리를 원하는 한국과는 큰 차이를 가집니다. 예를 들어 공사의 견적을 준비하는데 한국에서는 이틀 만에 견적을 준비해도 경우에 따라서는 기회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견적을 이틀 만에 준비하면 견적 받는 사람이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다시 차분히 검토해 천천히 준비하라고 부탁합니다. 한국 스타일로 빨리빨리 진행하려고 하다간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됩니다. 
한국에서 사업하는 것과 비교하면 미국에서 사업하는 것은 마치 땅 짚고 헤엄치는 것처럼 쉽습니다. 한국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국제 사회의 역학 관계나 정부의 정책 변경에 따라 사업의 흥망이 발생되는 경우가 제법 많지만, 미국에서는 이러한 일이 거의 없습니다. 다만 본인이 얼마만큼 성실하냐에 따라서 사업의 성패가 결정될 뿐이죠. 또한 한국에서는 직원의 채용과 해고가 만만치 않습니다. 채용은 비교적 쉽지만 잘못 해고하면 어려움을 겪게 되죠. 그러나 미국은 워낙 사람이 없어 고용이 쉽지가 않지만, 해고는 간단합니다. 종업원도 자기가 잘못했거나, 이 회사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면 언제든 해고를 당당하게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장점들이 있다하더라도, 미국에서 산다는 것은 녹녹치 않습니다. 우선 언어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동양인이기에 최고의 대우는 아예 포기해야 합니다. 표면상으로는 인종차별이 없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차별이 많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국에는 친한 친구가 있지만 미국에서는 좀처럼 친구를 사귀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일을 혼자 스스로 결정해야하는 외로움과 계속해서 싸워야 합니다.  

한국의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독자들을 위해 ‘좌충우돌 미국 정착기’를 3회에 걸쳐 성실히 기고해주신 ‘캐빈 리’님께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합니다. 현재하고 계신 플러밍(배관)사업이 미국에서 더욱 견실히 발전해나가길 바랍니다.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22>에 실려 있습니다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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