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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을 쏴라, 겉모습만 스님이다!

2022년 5월호(151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2. 6. 21.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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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철의 한국사칼럼 30]

활을 쏴라, 겉모습만 스님이다!

 

고려시대 일연 스님이 편찬한《삼국유사》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진성여왕(?)의 막내아들 양패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바다의 해적들이 걱정거리였다. 그래서 활을 잘 쏘는 궁사 50명을 데리고 갔다. 그런데 배가 곡도(백령도)에 이르렀을 때 풍랑이 며칠간 크게 일어 꼼짝달싹 할 수 없었다. 사람을 시켜 점을 쳐보았더니 이 섬의 신령스런 못에 제사를 드리라고 하였다. 그날 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활 잘 쏘는 한 사람을 남겨놓고 가면 풍랑이 멈추고 순풍이 불 거라고 하였다.
50명의 궁사들은 제비로 남을 사람을 정하기로 했다. 나무에 자기 이름을 써서 물에 띄어서 가라앉는 사람이 남기로 했다. 당연히 모두 물 위에 뜨겠지 생각했는데 신기하게 ‘거타지’란 이름을 적은 나무만이 물속에 가라앉았다. 사람들은 거타지를 남겨놓고 떠나니 바람이 순풍으로 바뀌었다.

거타지는 앞으로 이 섬에서 어떻게 지낼까 근신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한 노인이 나타나 말했다. “나는 서쪽 바다의 신, 해약이요. 그런데 매일 어떤 중이 해가 뜰 때면 하늘에서 내려와 다라니(주문)를 외운다오. 그럼 우리 부부와 우리 자손들이 물속에서 떠오르고 그때 우리 자손들의 간을 빼먹는다네. 이제 다 죽고 우리 부부와 딸만 남았는데 내일 아침에 우리 차례가 될 것 같소. 그러니 자네가 그 중이 내려오거든 활로 쏘아 죽여주시게.”

거타지는 “내가 어떻게 스님을 쏠 수가 있습니까?” 머뭇거렸지만 그 노인은 스님이 아니고 늙은 여우가 변신한 것이라고 하였다. 다음날 아침, 그 중이 나타나 주문을 외우고 간을 빼먹으려고 하자 거타지는 활을 당겼다. 죽이고 보니 과연 늙은 여우였다. 노인은 자기 딸을 거타지의 아내로 맞이하게 했다. 거타지가 배를 타고 다닐 때는 항상 용들이 호위해 주었다고 한다.

진성여대왕 거타지. 삼국유사(파른본)


《고려사》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보이는데 좀 세다. 작제건(왕건의 할아버지)이 배를 타고 가다 어떤 섬에 남게 되었는데 어떤 노인이 나타나 이번에는 여우로 변신한 부처 ‘치성광여래’를 활로 쏘아달라고 하였다. 작제건은 머뭇거렸지만 활을 쏘고 보니 역시 늙은 여우였다.

신라는 불교로 흥한 나라다. 부처님이 보호해 주는 나라다. 신라가 세운 불국사는 말 그대로 신라가 ‘부처님 나라’라는 의미다. 그런데 스님 중에는 요망한 늙은 여우처럼 바다 신들을 못살게 구는 스님도 있었던 것 같다. 겉모습만 스님인 셈이다. 설화와 같은 이야기라 스님 가운데 정말 그런 스님이 있을까? 의심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일연 스님은 거타지 이야기를《삼국유사》에 떡하니 실어놓았다. 일연 스님이 생각하기에도 스님으로서의 본분을 잊고 늙은 여우처럼 처신하는 승려가 있었고 이를 징계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 이야기를 실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타지가 활동했던 신라 말, 굶주림에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해인사로 쳐들어갔다. 절에 훔칠게 많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당연히 절에 있던 승려들과 백성들이 부딪쳤을 것이다. 스님도 죽고 백성도 죽었다. 누구 잘못일까. 스님 가운데 늙은 여우와 같은 스님들이 넘쳐나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

우리 주변에는 겉모습만 스님이고 정체는 늙은 여우인 경우가 많다. 늙은 여우가 변신한 건 스님만은 아닐 것이다. 주변에 그런 늙은 여우가 있다면 과감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정말 스님이나 부처인 줄 잘못 알고 활시위를 접으면 안 된다. 이제 5월이면 새로운 정부가 시작된다. 모두 활시위를 팽팽히 하고 주변에 늙은 여우가 횡행하고 다니는 건 아닌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 볼 일이다.

 

명협 조경철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
나라이름역사연구소 소장
naraname2014@naver.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51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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