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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tGPT야, 무엇이 옳으냐

2023년 6월호(164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3. 11. 12.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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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tGPT야, 
무엇이 옳으냐

 

최근 두 달 사이 ChatGPT에 1억 명의 사용자가 모였다는 기절초풍할 뉴스가, 한 번이라도 ChatGPT를 경험해본 사용자에겐 그리 놀랄 일은 아니겠지요. 
 
처음에 반신반의했던 사람들조차도 ChatGPT의 대변자가 되기로 작정한 듯 자신의 경험을 친구나 동료들에게 설파하는 모습을 주변에서 흔하게 보게 됩니다. 지난 호에서 이런 놀라운 경험과 전문가스러운 답변을 제공하는 ChatGPT가 유독 윤리 문제에 있어서는 석연찮은 결과를 제공하며 은근슬쩍 판단을 미루는 부분에 대해 잠깐 지적했었습니다. 결국 이런 부분이 최근 ChatGPT의 핫이슈가 되고 있는 저작권 문제나 논문, 과제의 대리 작성 등과 같은 윤리적인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모두 사용자의 몫일까요? 

ChatGPT는 왜 이렇게 만들어졌을까요?
그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개발자의 무지와 기업의 무책임 때문입니다. 개발자들은 일반적으로 윤리는 본인들이 담당해야 할 분야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하게는 윤리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겠네요. 그리고 기업은 윤리적인 부분에 대해 윤리헌장이나, 윤리위원회처럼 외형적인 형식만 갖출 뿐 이익추구 만큼이나 관심을 가지고 실질적인 노력을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형식적 노력마저도 이익추구를 위해 과감하게 포기해버린 구글의 사례에서 우리는 아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구글은 ‘사악해 지지말자!(Don’t be evil!)’라는 북극성 같은 윤리적 기준을 사훈으로 삼고 시작했지만, 최근 인공지능 개발이 본격화되고 윤리적 이슈가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이것을 아예 없애버렸다고 합니다. Shame on you, Google!
또 다른 이유는 윤리가 인간의 결정, 행동, 책임과 관련된 중요한 이슈이기에 단순한 알고리즘으로 쌈빡한 정답을 제시하기에는 어려운 장벽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각 시대별, 사회별, 그리고 개인별로 추구하는 도덕적, 윤리적 수준도 다르고 이런 다양한 스펙트럼과 차원을 포괄하기 위해서 많은 고민과 연구, 그리고 그 기술을 수용하는 사회와의 충분한 합의가 필요합니다.

윤리는 가치 상대적이다? 
그럼, 윤리적 수준을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요? 미래학자이자 하버드 경영대 교수인 후안 엔리케(Juan Enriquez)는 최근 자신의 저서《무엇이 옳은가》에서 “윤리는 시대에 따라 변하고 기술이 이것을 가속화 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윤리적 판단을 절대화하기보다 겸손한 태도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한마디로 윤리는 가치 상대적이며 기술이 가속화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는 과거 로마교가 동성애에 대해 반대하는 태도를 보여왔지만,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소수자에 대해 포용적인 태도를 보여 왔기 때문에 종교조차도 시대에 따라 윤리적 기준이 변한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종교를 조금이라도 깊이 이해한다면 쉽게 이런 결론에 도달하지는 않았을 텐데요. 교황이라는 위치는 한 종교를 대표하는 자리이긴 하지만 그의 말과 행동이 그 종교가 추구하는 모든 진리를 대표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교황청과 일부 로마교파는 여전히 동성애를 반대하니까요. 얼마 전 러시아 정교회 수장인 총대주교가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략전쟁을 성전으로 미화했던 너무도 수치스런 사건을 잘 아시지요? 러시아 정교회의 종교적 진리가 바뀌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철저하게 종교가 정치에 복종하는 시녀 노릇의 러시아 정교회 구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다른 예로, “1000년이나 지속되어온 노예제도를 끝낸 것은 노예폐지론자의 목숨 건 투쟁도 있었지만, 결국 산업혁명이 경제적 부를 가져옴으로써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석유 한 배럴에 들어있는 에너지는 5~10명의 노동력에 해당하지만, 이것을 기계에 넣으면 수백만 명의 노동력에 달하는 힘을 사용할 수 있으니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는 것을 멈추게 하였다.”라고 합니다. 산업혁명의 결과로 급속히 부가 팽창하고, 인간 노동력이 획기적으로 줄었기 때문에 더 윤리적 역할을 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 과정은요? 산업혁명의 과정 속에서 어린 아이들까지 도심으로 끌려와 대량생산에 동원되어 중노동에 시달렸던 것은 윤리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그 시대의 윤리적인 기준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무엇보다 엔리케의 말처럼 역사 속에서 윤리적으로 너무도 중요한 사건인 노예해방을 ‘노예폐지론자의 목숨 건 투쟁도 있었지만’이란 단어 몇 마디로 간단히 치부해버릴 수 있는 일인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한 시대의 윤리적인 기준은 보편 일반인들의 윤리적인 수준도 있지만, 몇몇 영웅적인 사람들의 숭고한 희생 혹은 악당들의 해쳐먹음을 통해서 윤리적 수준의 게이지가 상향 혹은 하향 조정되기도 합니다. 특히나 노예해방은 영국과 미국의 위대한 인물들이 없었다면 천년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불가능했을지 모를 일입니다. 이런 인물들의 빛나는 행동들이 북극성처럼 윤리적인 기준이 되어서 그 시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더 나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도록 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영국은 18세기말 산업혁명을 태동시켰을 뿐 아니라 막강한 해군력에 힘입어 대항해시대의 제국으로 부상하였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힘으로 전 세계를 누비며 식민지를 확장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전 세계 노예무역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고 있었고, 영국 재정수입의 상당 부분이 노예무역에 의해 유지되었으며, 정치인들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노예무역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지요. 이런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노예해방이라고요? 공공의 적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노예선장이었지만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심한 존뉴튼 목사(1725~1807)와 그로 인해 인생이 180도 바뀌어버린 위대한 정치가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 그리고 그와 수십 년을 함께 한 클래팜(Clapham) 공동체의 각고의 노력이 없었다면 노예제 폐지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일입니다. 하지만, 영국 의회는 기나긴 투쟁가운데 마침내 막대한 국가적 손실을 감당하기로 가결하며 이들의 손을 들어주었고, 그 뿐 아니라 당시 전 세계적으로 횡행하던 노예무역을 아예 국가가 나서서 근절시키기로 작정하고, 그들의 막강한 해군력을 동원하여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노예선을 무력화시켜 노예들을 해방하는 일을 앞장서서 하게 되었습니다. 

 

산업혁명(출처-Khan Academy)


이런 영국의 저력을 우리는 얼마 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장례식 때 똑똑하게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에서 초대하지도 않은 전 세계 수장들이 너나할 것 없이 스스로 찾아와 줄을 서가며 조의를 표하는 기이한 광경을 말이지요. “아니, 도대체 영국이 과연 어떤 나라이길래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세상 어느 국가의 원수가 죽었다 해도 이처럼 몰려들지는 않았을 텐데…” 지금의 미국이 아직도 존경받을 만한 국가라 여겨지는 이유는 세계 패권국이어서라기보다 영국에 이어 노예제도를 종식시키는데 인생을 걸었던 링컨이란 위대한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반대를 할 사람이 있을까요? 하지만, 이런 인물들을 과감하리만치 제쳐두고 산업혁명의 덕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연 옳은가요? 설사, 엔리케의 주장처럼 산업혁명이 노예제도를 끝장냈다고 합시다. 그런데, 지금 전 세계가 모두 고통하고 있는 기후변화의 원흉은 다름 아닌 산업혁명 아닌가요? 
역사 속에서 발견하는 변함없는 진실은 (도킨스의 말을 인용하자면) 너무도 이기적인 유전자인 인간이 자기 생을 마감하기까지 남은 한 방울의 진액조차도 짜내어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숭고한 행위가 종교적인 이유 없이 과연 가능이나 할까 하는 것입니다.
엔리케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는 가치상대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시대에 따라 윤리적 기준이 달라지니 누구도 더 낫다! 더 옳다! 라고 말할 수 없겠지요. 정작 겸손하게 대화에 임하자라며 대화를 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듣는 사람은 없고, 각자의 소견대로 살았더라가 되고 말 것입니다.

 

노예선(출처-뉴욕타임즈)



균형 잡힌 윤리교사로서의 ChatGPT의 활용
윤리는 역사, 철학, 종교 등의 총체적인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충분한 연구와 다양한 사례 분석이 함께 진행되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는 오히려 ChatGPT는 좋은 윤리적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현재의 ChatGPT는 윤리적 딜레마의 상황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얘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이클 샌델의《정의란 무엇인가》처럼 윤리적 딜레마의 문제만 던지고 대안은 소개하지 않는 교육방식이 아니라, 또한 엔리케의《무엇이 옳은가》처럼 윤리는 변하니까 그리고 기술이 윤리를 변하게 하니까 네 생각도 틀릴 수 있는 거야, 그러니 겸손하게 대화하자처럼 무책임한 접근 방식이 아니라, 각 시대별로 다양한 윤리적 사례와 인물, 시대적 배경, 그리고 그 과정과 결과를 충분히 학습시켜 윤리의 다양한 차원과 함께 더 나은 종교적인 결정과 행위를 통해서 그 시대를 별처럼 밝게 빛냈던 인물들의 사례들을 함께 소개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인간이 로봇과 비교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가 한 시대를 빛낸 위대한 인물처럼 합리적인 사고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행동으로 세상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자유의지를 누구나 가졌기 때문이란 것을 소개하고, 부러워하며, 격려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그리고 균형 잡힌 윤리 선생님이 또 있을까요? 

 

서울시 마포구, 행복카우 추광재
caleb.kj.choo@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61>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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