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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비양 커피는 ‘도레미파솔라시도’가 한 커피 안에 다 들어가 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김학수 교수를 만나다!

기업/가비양(커피 칼럼 & 스토리)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7. 11. 1.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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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칼럼 & 커피스토리 45]

가비양 커피는 ‘도레미파솔라시도’가 한 커피 안에 다 들어가 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김학수 교수를 만나다!


  청명한 날씨, 조선시대 문헌, 종가, 가문 분야를 전공한 김학수 교수를 만나기 위해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가을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과는 달리 솔직하고, 유쾌한 대화로 인터뷰 내 내 조선시대를 연구하는 딱딱한 사학자 같지 않은 모습으로 저를 웃음짓게 한 김학수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어렸을 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저는 400년 된 동족마을인, 경북 영천의 경주 김씨 마을에서 성장했습니다. 어렸을 때만하더라도 마을에 한문을 가르치는 서당이 있었을 정도로 전통적인 마을이었지요. 어렸던 저야 서당에서 배우지는 않았지만, 형들은 저녁먹고 한문을 공부하기 위해 서당에 가는 것을 늘 보았습니다. 낮에는 정식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한문을 공부하러 서당을 다니는 형들을 보면서, 알게 모르게 전통에 대한 인지능력이 저에게 남들보다 높이 형성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을에 서당이 있다는 인문학적 자부심이 저의 소년시절에 영향을 끼쳐 그게 역사학으로 확장되지 않았을까 회고해봅니다. 무엇보다 퇴계 이황 선생이 “내가 유일하게 선생으로 받들 만한 분은 이 분밖에 없다”라고 했을 정도로 유명한 분이 16세기 유학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입니다. 이 분의 글귀를 물어보면서 우리나라 역사 중에서도 ‘나는 조선시대를 연구할 것 이다’라고 생각했지요.

 

 

조선시대의 문헌, 종가, 가문 분야를 전공하셨는데, 조선시대 500년 역사상 탁월한 점은 무엇이고, 반대로 지금까지 이어진 폐해가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조선시대 핵심사상에는 ‘충’과 ‘효’의 사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충과 효가 균형을 잘 이루면 좋았겠지만, 그 시대에는 충보다는 효에 대한 집착이 너무 컸다고 저는 진단합니다. 그래서 그 시대 사람들이 공리적이고 국가적 차원의 발상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가장 극단적 예로써 한 마을에서 의병 투쟁을 했을 때, 의병장이 되었던 분들 중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전쟁이 아무리 급해도 그날로 바로 의병장 감투를 벗고 상주를 하러 간 겁니다. 상주를 하러 가는 사람도 이상할 게 없고, 떠나보내는 사람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거죠. 아무리 시대적 다급함이 크다고 할지라도 거의 모든 사람이 효라는 덕목에 함몰되어 큰 틀에서 나라를 바라보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물론 효도 매우 중요한 가치임은 틀림없지만, 그 효가 충과 균형을 이루지 못한 조선시대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래도 조선시대가 가지는 장점이라면, ‘정신적인 군살’이 적다는 겁니다. 즉, 어떤 시대의 사람들보다 도덕적인 지수는 높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 인간이 되기 위해서 굉장히 노력한 점이 드러납니다. 제가 ‘군살’이라고 표현한 예를 들겠습니다. 불교 사찰의 규모와 조선시대 서원의 규모를 대비하면 한눈에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불교 사찰은 웅장하 고 호사하고 화려하기 짝이 없는 장중한 느낌을 줍니다. 반면에 조선시대 서원은 아무리 커봐야 웬만한 사찰의 반도 되지 않습니다. 이미 물자를 금약하고 아끼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죠. 그것이 물질적 아낌이든, 그것의 기초가 되었을 정신적 아낌이든 아무튼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로는 ‘유학’이라고 하는 ‘학문적 공동체 의식’이 있었습니다. 유학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을 차치한다면, 자신들이 학문적 신조로 삼았던 유학에 대한 학문적 공동체 의식이 다른 시대보다 강해서 각각 연구하기보다 공동연구와 공동작업으로서의 학문 탐색에 치중했습니다. 현 시대는 자기밖에 모른다고 할 정도로 연구자들이 전부 개인적 관심사에 집중하는 것에 비하면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의 이런 학문공동체적 의식은 명백한 장점처럼 보입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는 각 나라 외국학생들이 찾아와 많이 공부한다고 들었습니다. 고문서나 역사문화를 배우러 오는 외국학생들에게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하시나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제가 전공한 조선시대로 한정한다면, 사회의 상층으로는 조선시대 로얄 패밀리의 왕실문화가 있고, 그 바로 밑으로 양반, 사대 또는 기층문화가 있습니다. 물론 어느 문화가 좋거나 나쁘다를 평가할 수는 없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매력을 가지고 외국 학생과 한국 학생을 구분하지 않고 강조하는 것은 사대부 또는 기층의 문화를 얘기하는데 중점을 두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문화에 대한 기록들이 상부계층으로 올라갈수록 ‘많이 편집’되어 있고, 하부계층으로 내려갈수록 ‘그대로 기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록의 ‘대상들’을 잘 탐색할 것을 강조하지요. 인간 삶에 있어서 감동적 요소는 사실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에서 훨씬 강합니다.

  그리고 한국문화를 배우고자 하는 외국학생들의 시각에서 봤을 때에도 한국의 여과없는 삶의 모습이 훨씬 매력적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고, 학생들도 그렇다고 동의하는 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요즘도 기회가 있으면 평민들, 어렵게 산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느껴야 되는 학술문화적인 단상을 말하고, 저도 그것을 통해서 계속 공부해 나가는 겁니다. 실제 외국학생들에게 한국의 상속제도와 관련된 고문서나 과거시험제도를 얘기해주면 아주 재미있게 듣습니다. 왜냐하면 세계 역사상 고위공무원을 시험을 봐서 뽑은 나라는 중국과 한국, 베트남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가 세워지게 될 때 그전 시대 역사는 거의 사라지게 되는데, 우리나라 북방계 문화인 고구려, 고려의 또는 삼국시대 가치는 어디에 있다고 보시나요?

  우리 역사의 전통적 패턴은 한 나라가 망하면 그 다음 왕조가 그 역사를 정리하고, 또 그 다음 왕조가 이전 왕조의 역사를 다시 정리해오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 과정은 ‘역사적 뺄셈’인 셈입니다. 즉 ‘지난 왕조를 부정하는 것을 정당화’한 거지요. 또 이 과정을 통해 조선시 대는 ‘무’(武)를 죽이고 ‘문’(文)을 숭상하는 문화 쪽으로 경도되었지요. ‘문’을 강조해야 문명 국가 혹은 문화국가다운 모습으로 간다는 생각이 아주 강했고, 그것이 정점에 이르렀던 때 가 조선시대 중에서도 특히 조선시대 후기입니다. 그러다 보니 국방이 약해지고, 흔히 말하는 ‘문약(文弱)의 시대’에 접어들게 되어 급기야 극단적으로 약해져서 궁극적으로 조선이 망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결론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과거의 나라들인 삼국(신라, 고구려, 백제)과 고려시대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갈수록 국제문화적이고 세계문화적 성향이 강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원나라와 관계를 이룬 고려시대는 굉장히 글로벌한 시대였습니다. 초강대 세계제국을 이룬 원나라와 겨루었던 고려는 어찌보면 매우 위대한 나라라고 할 수 있지요. 반면에 조선시대는 원나라와 청나라를 야만족이 세운 왕조라고 하며 대단히 낮게 보며, 오히려 망한 명나라를 숭상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중화주의에 물들고 그것에 대한 동경이 만든 약점이었지요. 그리고 이런 중화주의를 동경하는 이유가 바로 ‘문’(文) 즉 문명성, 문화성에 대한 환상을 가졌고, 그것을 모방하려는 자세가 우리의 의식마저 축소시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구려가 가졌던 상무정신, ‘무’(武)를 숭상하는 정신으로 진정한 남자들이 그 시대를 움직였던 패기를 지금의 대한민국이 전수받고 이어간다면, 그리고 조선에 있었던 ‘문’(文)의 요소와 합쳐진다면, 대한민국은 밝은 미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원래 ‘문’(文)과 ‘무’(武)는 수레의 두 바퀴나 새의 두 날개와 같은 겁니다. 그래서 어느 한쪽도 결함이 생긴다면 수레는 굴러갈 수 없고 새 는 날수가 없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이지만 고려 이후의 조선은 한쪽 날개, 또 한쪽 바퀴로 굴러온 수레나 새와 같은 형국이었다고 할까요? 오히려 이런데도 나라가 오백년이나 굴러갔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고 어떤 면에서 대단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조선시대 역사학자로 계신 것이 교수님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저는 역사학을 공부하면서 한 번도 진로를 잘못 선택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가장 하고싶고 잘할 수 있는 것을 업으로 삼아 저의 사회적 환경을 갖출 수 있었다는 것이 축복으로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사회적인 부채의식 즉, 저는 국가와 사회를 향해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학비를 내지 않고 공부했기 때문에, 더욱더 국가와 사회에 가치있는 것으로 환원해야 한다고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역사학자로서의 역량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는 학술적 행위로써 대한민국의 발전과 사회의 안정을 위해 노력을 다하고 싶고, 또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저에게 주어진 아주 행복한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만큼 나만을 위해서가 아닌 다른 사람과 사회를 위해 기여해야 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문득 하곤 합니다. 지금까지는 제 길을 제가 간 것이라기보다 남이 이미 닦아 놓은 길 위를 간 것입니다. 이제는 남이 앞으로 걸어갈 수 있는 그 길을 내가 만들어 주는 것이 제가 학자와 스승으로서 해야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힘든 때는 언제인가요?

 2남 3녀 중에 제가 네 번째로 살아오면서 힘들었던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15세 소년기 때의 고민이 떠오르는군요. 저희 집은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습니 다. 하지만 자녀들을 위해 아버지께서는 물려받은 과수원과 논을 계속 팔아가면서 학비를 대셨습니다. 점차 어려워지는 상황을 물론 아버지께서 내색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집안에 조금이라고 관심을 가진 자녀라면 그런 상황을 느낌으로 다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때 저희의 살림살이가 녹녹치가 않은 가운데서, 아버지께서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저 토지를 팔면서 마음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러면 자식으로서 위로의 편지라도 보내는 게 도리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지요. 그래서 ‘아버지! 너무 상심하지 마시고, 그래도 이것이 모든게 아니지 않습니까’라는 취지로 편지를 썼는데, 끝내 보내지는 못했습니다.


가비양 클럽 회원으로써 가비양의 매력은?

  제가 가비양을 만나기 전까지 커피를 많이 마셨지만 커피의 맛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가비양 커피를 먹게 되면서, 커피의 맛에 상당히 편차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제 말로 표현해 볼까요? 7~8종류의 커피를 마시게 될 때 커피는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음계와 같습니다. 이 커피는 ‘도’다! 이 커피는 ‘레’다!라고 말이죠. 그리고 진짜 좋은 커피는 ‘도레미파솔라시도’가 한 커피 안에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가비양 커피를 마시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지요. 커피의 세계에 좀 더 빠져들고 싶은 유혹을 가지게 한 곳이 바로 가비양입니다. 매일 집에서 새벽 3~4시에 일어나면 꼭 배달된 가비양 커피를 핸드드립해서 한잔 마시고 출근합니다. 바로 가비양 커피를 마시는 이 시간의 행복함, 즉 미각의 행복함이 정서적 안락함과 행복감으로 승화되는 것을 순간적으로 느끼기도 합니다. 커피향도 마찬가지죠. 모든 커피의 향과 맛이 다 다르기 때문에, 매월 15일 간격으로 배송되는 가비양 커피가 배달 되자마자 ‘이번에는 무슨 맛일까?’라고 오감을 집중시켜서 첫 느낌을 음미합니다. 흡사 여자친구를 만나 처음 키스 할 때의 설레임과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멕시코산의 커피를 좋아하는데, 그 중 저희 부부가 찬사를 보낸 커피는 ‘이흐후앗란’입니다. 지금도 압도된 그 커피맛을 잊을 수 없어서, 가비양 직원에게 더 추가로 받을 수 있나 문의했는데, 그 커피는 계절상품이라 더 이상 받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것과 비슷한 맛을 추천받아 마셔봤지만 역시 그 맛은 아니올시다였죠. 새콤하기도 하고 고소한 맛도 있고, 가벼운 삽싸름한 맛이 아닌, 상당히 묵직하고 품위를 잃지 않은 쌉싸름함 이라고 할까요? 한창 많이 마실 때에는 하루에 6~7잔정도 마셨고, 요즘에는 바빠서 하루에 3잔 정도는 늘 즐겨 마십니다. 가비양을 알게 된지는 한 3년 정도 되었고, 그전에도 커피 맛 을 알고는 있었지만 가비양을 통해서 커피에 대한 감도가 업그레이드된 거지요.


  김학수 교수는 학위로서의 박사와 직책으로서의 교수는 진정한 학자에게는 형식일 뿐이고, ‘교수=학자’의 공식은 절대 맞지 않다고 강조했습니다. 세상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학설’을 세우며 거기에 걸맞는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야 진정한 학자이며 바로 그 길을 자신이 걷고 싶다는 소원을 말해 주셨습니다. 그 바람이 꼭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커피향 내 우러나는 연구실에서의 유쾌한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가비양 커피클럽  문의 010-9405-8947

 www.gabeeyang.com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97호 >에 실려 있습니다.


  

< 가비양 커피클럽 & 커피스토리 바로가기 >

  가비양은 커피를 매개로 한 소통장소입니다. 커피를 직접 로스팅하고 드립도하지만, '최고의 인테리어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으로 많은 사람이 머무는 장소를 만들려고 합니다. [가비양 커피클럽 & 커피스토리]는 그 속에서 머무는 많은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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