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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삼국 중의 개혁 중에서 일본의 메이지 유신만이 혁신, 혁명에 성공했나?(3)

인문학/황혼과 여명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7. 12. 5.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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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를 통한 일본 사후 여행을 위한 연구]

동양 삼국 중의 개혁 중에서

일본의 메이지 유신만이 혁신, 혁명에 성공했나?(3)


지난 2회에 걸쳐서 일본이 가장 자랑하는 역사인 메이지 유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  

    A.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하급사무라이들이 주도하여 ‘메이지유신’을 일으킨 다양한 원인들 

    B. 서남쪽 번들의 하급 사무라이들의 의지와 운동의 결과로서의 메이지유신  

    C. 메이지유신의 한계에 대한 비판 


  마지막으로 지금부터 다룰 것은 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사안일 뿐 아니라 전혀 새로운 대안을 찾으려는 내용입니다:

    D. 막부가 개혁을 계속했다면? 

    E. 메이지유신은 서구를 과연 따라잡았으며, 그 서구란 무엇인가?

    F. 메이지유신 150여년 후 일본이 중국, 한국과 함께 가야 할 길 (2017년 12월호)


D. 막부가 개혁을 계속했다면? 

 ‘메이지유신’을 깊이 연구할수록 일본뿐 아니라 일본에 의해 19세기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의 동아사아 역사가 그렇게 부정적으로 흘러가 버린 것이 안타깝고 억울한 생각이 드는 것은 매우 당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혀 새로운 방향이지만 건강한 상상의 나래를 한 번 펴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막부가 개혁을 주도했더라면’하는 역사의 가정을 해 보는 겁니다. 역사는 물론 정복자, 지배자의 관점으로만 쓰여 질 수밖에 없지만, 서남쪽 번들의 하급 사무라이들이 이루었던 급진적인 개혁과 그 결과로 일본과 동아시아 전체에 엄청난 파괴와 회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것 같은 관계를 남겼습니다. 그래서 더욱 역사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매우 실현가능성이 높았던 일이기에, 이런 상상에 빠지는 것이 어느 정도 정당합니다. 만약에 미국의 페리가 지휘한 흑선의 도래로 인해 외부의 충격(1853)으로 혼란에 빠진 막부를 공격하여 집요한 야욕으로 정권장악을 노린 메이지유신의 정권찬탈자들(이와쿠라 도모미, 이토 히로부미, 산조 사네토미 등)을 막을 수만 있었더라면, 역사는 훨씬 나은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을 예상할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도쿠가와 막부 통치기간(268년)동안 보인 근본적으로 ‘보수적 정치성향’ 때문입니다. ‘오닌의 난’(1467~1477) 이후 혼란스러운 일본 정국을 이끈 세 사람의 태도는 다음 속담과 같은 것에서도 선명하게 차이가 납니다: 오다 노부나가(‘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죽여버려라’), 도요토미 히데요시(‘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울게 하라’), 도쿠가와 이에야스(‘두견새가 울 때까지 기다려라’). 도쿠가와 치세 내내 풍족하지 않을 시기도 지역적으로 생기기도 했지만, 대체로 전쟁 없는 태평성세를 유지했던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합니다. 그래서 도쿠가와 가문의 문양이 쥐방울 덩굴과인 끈질기고 강인한 ‘야생생강’(aoi) 인 것과 메이지 이후의 일본문양이 한번 화려하게 꽃피고 사라지는 벚꽃(사쿠라)인것과는 완전히 대조됩니다. 뿐만 아니라 메이지유신의 최초의 조정회의에서조차 도쿠가와 가계의 이런 공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지막 15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새 정부의 중진으로 모셔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15대 마지막 쇼군 - 도쿠가와 요시노부


  무엇보다도 메이지 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 자신이 막부와의 좋은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겁니다. 그러나 ‘존왕’을 주장하고 겉으로는 천황의 친정을 내세우는 메이지유신 정권 찬탈자의 위선과 거짓을 알고 고메이천황은 이들에게 매우 대적적이었습니다. 존왕파인 이토 히로부미는 실제로는 ‘황태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참으로 불운한 일이에요. 태어나자마자 사방에서 에티켓의 사슬로 옭아매고 성장하면 측근에 있는 자들이 부는 피리에 맞춰 춤을 춰야 하니 말이죠’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해대었습니다. 그는 인형극에서 줄을 가지고 인형을 춤추게 만드는 몸짓까지 해 보였다고 합니다(도널드 킨, [메이지라는 시대1], 2017, p.65). 고메이 천황의 친구의 증언은 그가 ‘건강 그 자체’였다고 할 정도로 튼튼한 몸(도널드 킨1, p.190)이었으나, 몸의 아홉 구멍에서 피를 토하며 급격하게 사망한 사실(1867. 1. 30)은 그가 이 정권찬탈자에게는 늘 껄끄러운 존재였다는 사실과 상관된다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이들이 무사들에게 내밀은 ‘막부토벌의 밀칙’은 고메이 천황이 재가한 것이 아니라 결국 가짜문서로 판명 났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정상적 정치발전과정 대신 일본 특유의 테러를 동원한 편법과 위법을 따랐으며, 이후 15세 소년에 불과한 메이지 천황을 꼭두각시처럼 다루어간 겁니다. 


  조선과 관련지어 막부가 개혁을 주도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더욱 더 간절하게 드는 것은 정말 어쩔 수 없습니다. 이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임진왜란으로 조선뿐 아니라 일본도 피폐해진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전쟁을 피하려는 막부가 개혁을 주도했다면, 만세일계의 대국주의를 주장하며 해외정벌을 통한 전쟁의 광란으로 일본을 몰고 가는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먼저 메이지유신 직후 일어난 정한론 논쟁(1873) 자체가 아예 성사되지 못하도록 했을 겁니다. 조슈번이나 사쓰마번과 같은 ‘막부토벌파’도 있었지만, 막부는 도사번과 에치렌번과 같은 온건한 ‘공화정체파’와 함께 더욱 더 부드럽고 온건하게 내·외적 개혁을 주도했을 겁니다. 이를 위하여 유능한 ‘가쓰 가쓰오’ 같은 온건한 개혁가들을 더 많이 등용시켰을 것이 분명합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메이지유신이 주도한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의 승리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로 동아시아의 역사가 계속 전쟁으로 질주하여 훨씬 더 많은 파괴와 대량살인을 자행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이 자부심은 헛됩니다. 막부라면 이런 불행을 막았거나 적어도 서서히 진행시켰을 것이고 또 서양과의 관계도 부드럽게 열어갈 수 있었을 겁니다. 또 메이지 시대 이후의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2)과 같이 망상에 빠져서 엄청난 피해를 남길 짓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둘째,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점은 ‘막부가 실제로 했고 또 추진할 수 있었던 개혁은 없었나?’하는 겁니다. 대답은 아주 많았다!는 겁니다. 그 뿐 아니라 메이지유신이 시도했던 좋은 개혁의 거의 대부분은 막부가 이미 많이 시행하고 있었거나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메이지유신의 나쁘고 악한 점들인 국민을 전쟁의 광분으로 몰아가며, 정권 집중화를 위하여 천황숭배를 위한 ‘천황교’로서의 국가신도라는 국가이데올로기를 새로 창조하여 일본국민을 획일화시키는 짓은 하지 않도록 했을 겁니다(박규태, [신도와 일본인], 2017). 


막부가 그때까지 했었고, 앞으로 계속 했었을 개혁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1) ‘막부가 휘두르던 통치권을 천황과 조정에 이양할 용의가 있었던 점’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260년 정도 한 가계가 나라를 통치하면 통치에 대한 ‘피로감’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인지 막부는 서서히 천황과 교토에 있는 조정을 향해 정치적 고자세를 꺾어 낮추어 왔으며, 마지막 쇼군인 요시노부는 오사카에 있는 외국공사들을 향하여서 자신은 외교권을 가지는 존재(외무부장관)로 소개했으며, 드디어는 정권 전체를 천황에게 넘기는 대정봉환(1867)을 신청했습니다. 그렇지만 메이지유신 정권찬탈자들이 쇼군의 정권 뿐 아니라 쇼군의 사적 재산까지 강탈하려고 하자, 그것을 거부하고 신정부군과 보신전쟁(1868~1870)에 돌입한 겁니다. 그렇지만 막상 백만이 거주하는 에도성을 두고 공방전이 벌어지며 피가 낭자할 위기에 처하자, 신정군이 무혈입성하되 쇼군의 명예로운 퇴진을 주선한 로주였던  ‘가쓰 린타로’의 의견을 바로 받아들여서 패배하지만 불필요한 피를 흘리지 않게 한 점은 정말 높이 사야 합니다(1868, 4, 5).   

 

  2) 막부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외교정책’을 취했습니다. 그것으로 국제적 환경에 익숙해진 성숙한 일본 경제가 되어갈 수 있었고, 점진적인 막부외교에 일본사회가 개국에 정착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메이지유신의 정권찬탈자들은 천황중심의 만세일계, 대국주의, 아시아 정복과 같은 전혀 엉뚱한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심지어는 ‘국토의 일부가 초토화되더라도 그 길(해외정복)을 가야 한다’는 어리석은 주장을 했습니다.    


  3) 사실 막부도 서양을 배우기 위하여 ‘무역을 통한 부국강병’과 ‘서양식 군대개혁을 꾸준히 추구’했습니다. 서양의 총포류들과 함선들을 계속 구입했고, 다만 조슈만큼 급진적이고 강도 높게는 하지 않았을 따름입니다. 


  4) 막부는 막대한 자금을 들여서 ‘해외유학생’과 ‘해외사절단’을 여러 차례 파송했습니다. 막부가 보낸 ‘사절단’은 총 5차례로 290명을, ‘유학생’은 1862년에 14명을 네덜란드로 보낸 이래로 5년 동안 총 62명을 해외로 보내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나중에 홋카이도에까지 후퇴하여 막부를 위한 전쟁을 벌였으며, 거기서 일본 최초의 공화국 총재로 ‘에오모토 다케야키’가 선정되었습니다. 물론 이 5년 동안 서남번(조슈, 사쓰마, 사가)에서도 58명의 유학생을 보내었는데(기타 15명), 그 중에 조슈의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모리 아니로리는 장차 메이지유신의 핵심 정권창출자가 됩니다.


  5) ‘새로운 개혁정부의 구성에 대한 현실적인 제안’을 하고 있었습니다. 행정부와 의정원(의회)을 구분해서 세우고, 의정원은 다이묘로 이루어진 상원과 번사들로 구성되는 하원으로 이루도록 할 계획도 막부 편에서 먼저 제시되었습니다. 이것 자체도 서구적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며,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오랜 시간 대화와 토론을 통하였다면 일본의 정국은 훨씬 좋은 방향으로 나갔을 것입니다. 


  6) ‘서양의 외교관들은 마지막 쇼군인 요시노부의 높은 정치적 식견에 감동’했습니다. 그들은 메이지유신 정권자들이 그렇게 뒤집지 않고 그가 일본을 이끌었으면 서양과 관계도 순조롭게 맺어 나갔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초대쇼군 - 도쿠가와 이에야스


E. 메이지유신은 서구를 과연 따라잡았으며 그 서구란 무엇인가? 

  이제는 더 중요한 질문 두 가지를 다루어야 할 시간입니다.

  첫째, 메이지유신은 그렇게 바라던 서구 따라잡기에 과연 성공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것과 연관된, 그러나 더 깊고 중요한 질문으로 이들이 따라잡아야 할 서구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1.  메이지 유신은 과연 서구를 따라잡았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 그러나 동시에 ‘아니다’, ‘Yes and No!’라고 말해야 합니다. 먼저 ‘Yes!’, 즉 ‘메이지유신이 서구를 따라잡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일동맹(1902)을 맺으며 장차 미국과도 대등한 전쟁(1942~1945)을 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순일본식’으로 말입니다. ‘순일본식’이란 외부에서 들어오는 모든 자극과 행동을 오직 외적 형태만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심지어 종교적 차원까지도 ‘순일본식’입니다.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왔을 때에 어떻게 하든지 불교의 본질에 깊이 들어가려한 역사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불교 자체도 일본 내에서 끊임없이 변화되었으며, 또 신도와의 경합을 벌이며 ‘신불습합’(신이 종이고 불이 주)에서 ‘본지수적설’(부처와 보살이 일본의 신들로 나타났다)에서 더 나가 ‘신주불종’(신이 주이고 불이 종)으로 나갔습니다. 서구의 절대종교인 기독교도 일본에서 ‘신기습합’(신도와 기독교의 하나됨)이라는, 말도 안 되는 혼합주의로 나갔을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일본이 추구하던 서구배우기는 결국 서구문명/문화의 겉모습인 화려한 물질문명이었습니다. 일본이 서구를 배우기 시작하던 19세기 중엽 이후 서구는 마침 물질문명의 극단적 발전으로 유토피아가 곧 도래할 것이며 세계를 완전히 제패할 환상에 젖어 들어가던 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환상은 조만간 20세기 초 세계 파멸의 극단적 상황까지 몰고 갈 세계전쟁으로 무참히 깨어질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서구문명/문화가 물질주의적인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는 상황과 일본인 특유의 현재중심주의와 세속주의적 특성과 맞아떨어진 가운데 서구 따라잡기에 나선 겁니다. 그래서 더욱 더 서구문명/문화의 외적 껍질을 짧은 시간 내에 베낄 수 있다고 확신했고, 그것을 성취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또 실제로 매우 빠른 시간에 이 외적인 것 따라잡기를 어느 정도 성취한 것은 사실입니다. 일본인 특유의 현재의 외적인 필요에 몰입해 들어가는 열정을 따라서 이런 것도 빠른 시간 내에 성취한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No!’ 즉 ‘메이지유신은 서구를 결코 따라잡지 못했다’고 대답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서구문명/문화의 본질에 결코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랫동안 변화 없는 섬나라에 갇혀 살면서 자신 절대주의의 환상 속에 지내던 일본의 속성상 외부의 것을 본질적으로 알고 연구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할 수 있습니다. 역사도 문화도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현상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이 이들의 궁극적 관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메이지유신은 결코 서구를 따라잡지 못했다고 해야 하는 겁니다. 여기에 우리는 또 다른 질문을 하고 정직하게 답해야 합니다. 이 질문은 일본의 문제만이 아닌 같은 동아시아에 사는 모든 동양이 묻고 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그것은 ‘동양이 따라잡아야 할 서구란 과연 무엇인가’하는 겁니다.  


2. 따라잡아야 할 서구는 과연 무엇인가? 

  누구나 동의하는 사실은 서구문명/문화는 두 가지 기초, 즉 그리스문명/문화와 히브리문명/문화 위에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르네상스 이후 서구의 역사는 대부분 전자인 그리스문명/문화, 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리스 - 로마문명/문화의 방향으로 극단적으로 기울어진 반면, 히브리문명/문화는 점점 소외되어 갔습니다. 그런 중에 21세기가 넘어갈수록 정신문명/문화와 물질문명/문화의 균형이 어느 정도 이루었던 그리스문명/문화에서 눈에 보이는 외적인 것(전쟁, 건축, 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로마문명/문화 쪽으로 더 치우치게 발전하였지요. 그 결과로 생긴 것이 극단적 물질주의적 문명/문화를 추구하여 전 지구적, 전 사회적, 개인적으로 온갖 종류의 엄청난 문제들(환경문제, 군사, 경제전쟁 등) 앞에 허우적거리게 되었습니다. 서구문명/문화가 이제는 막다른 골목으로 치달리기 시작하는 상황인 19세기 중엽부터 일본은 그 서구를, 그 중에서도 더 외적이고 물질주의적인 문명/문화만을 흡수하려하여 서구 중에 가장 악한 집단인 나치즘이 저지른 엄청난 죄악에 동참하는 잘못을 저지른 겁니다. 


  그리스문명/문화의 철학적 기초를 놓은 파르메니데스는 ‘여신의 길’(신적인 길) -‘여론의 길’(인간 경험의 길)의 이원론 속에서  ‘건강한 회의’를 하며 인간의 경험적 지식을 진지하게 회의하라고 일갈하였습니다. 그 이후의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이어받아 ‘인간아, 너는 너 자신을 아느냐?’라는  ‘건강한 질문’을 스스로 해 보도록 했지요. 그렇지만 그를 이은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의 건강한 이원론을 슬쩍 바꾸어서 ‘이데아’-‘현상’으로 구분했지만, 결국 플라톤 정치의 ‘이데아’는 자신이 철학왕이 되어 세상을 다스리는 구조를 만드는 것에 불과한 위선을 범한 겁니다. 인간의 자기비판 능력을 사실상 사라지게 만든 셈이지요. 다시 그를 이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원론의 형태를 ‘형상’-‘질료’라는 형태로 더 타락시켜서, 특히 르네상스 이후 서구는 더욱 더 이 길로 내달려서 서구문명/문화의 물질주의화를 재촉한 겁니다. 그래서 전체 보다, 부분을 우선적으로 취급하는 데서 출발하는 ‘귀납법’ 위주의 자연과학적인 사고가 사실 문명/문화 전체를 지배하는 구조가 되었고 어떻게 전체를 보는 ‘연역법’을 쓸 것인가에 대해서는 무지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21세기 초인 지금 서구문명/문화의 남은 기초인, ‘히브리문명/문화의 본질을 찾아서 현대문명/문화를 회복하는 길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무척 다행입니다. 그러나 히브리 문명/문화를 단순히 영적, 정신적이고 물질적 차원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무지하다고 어리석게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3천년전의 솔로몬 치하에서는 예루살렘에 은이 돌보다 흔할 정도였으며, 레바논의 백향목이 뽕나무보다 많았다고 할 정도로 물질적 성과에서 탁월했습니다. 정신적, 영적 성과는 말할 필요도 없고요. 또 현대유대교가 히브리문명/문화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사실 종교적 미래가 없고 현재뿐인 바리새적 전통에 기원한 유대교는 ‘종교의 세속성’ 혹은 ‘세속의 종교성’을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종교일 뿐입니다. 그러니 유대교는 구약성경이 말하는 총체적(물질적, 정신적, 영적, 역사적, 우주적) 차원의 문명/문화를 이루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바로 이런 중요한 사실을 일본이 과거에 놓친 것은 어떤 의미에서 불행이었지만, 이제 마지막 질문에 대하여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다행입니다.    


도쿠가와 가문의 문양 - 야생생강


F. 메이지유신 150여년 후 일본이 중국, 한국과 함께 가야 할 길 

  이제 메이지유신 이후 15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일본이 과거에 이룬 성공과 실패의 역사를 거울삼아 동아시아 삼국이 함께 가야 할 건강한 문명/문화를 만드는 길은 무엇일까요?


  첫째, 서세동점(西勢東漸)하던 서양이 20세기를 지나면서 점차로 문명/문화적 자신감을 잃어가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매우 과감하게 ‘동양’이라는 정체성 자체를 벗어나서 서양까지도 포괄하는 새로운 정체성, ‘우주적 정체성’을 추구하여야 할 때입니다. 본격적으로 우주시대가 전개되어 인간들이 지구에서 부채살처럼 우주로 뻗어나가야 할 시점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서양을 단순히 그리스-로마적 서양, 그 중에서도 물질주의적 서양으로만 인식하고 그것만 배우면 된다고 할 때에 일본이 했던 똑같은 실패를 경험할 겁니다. 


  둘째, ‘동양의 한계에 대해서 솔직히 시인하는 문명/문화비평적 작업’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단지 얼굴 형태나 피부색과 언어가 ‘우리’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본질적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서양보다 우리는 어떤 것을 분석하는 일에 예민하지 못했으며 집중하는 능력도 모자랐던 것은 사실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오랫동안 인간의 경험과 삶이 중심인 상대종교(불교, 유교, 도교, 선교)의 종교적 상황에만 살았습니다. 그래서 인간 밖에 절대적 기준이 있는 진정한 의미의 절대종교가 가지는 장점과 그 문화적 능력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이제 그것을 큰 숨으로 들이킬 때입니다.    

  그러므로 셋째,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다행스러운 그동안 잘 사용하지 않았던 남은 대안인, 또 하나의 문명/문화인 ‘히브리문명/문화의 정수를 새롭게 배우고 꽃피우는 일’입니다. 인간 경험과 지식은 언제든지 한계가 있으며, 한 사람이 그것을 절대적으로 주장하면 결국 다른 사람이 다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솔로몬 시대에 왕들이 모이면 정치, 외교, 국방, 경제와 같은, 필요하지만 저차원적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왕들끼리 지혜토론을 하며 어느 국민이 총체적 차원에서 가장 행복한지를 경쟁했던 문명/문화를 다시 이룩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21세기를 이룰까요?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segensong@gmail.com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98호 >에 실려 있습니다.

 

황혼과 여명 - 규슈를 통한 일본 사후여행을 위한 연구 바로가기


< 동양 삼국 중의 개혁 중에서 일본의 메이지 유신만이 혁신, 혁명에 성공했나? 시리즈 >

제 96호 시리즈 (1)

 제 97호 시리즈 (2)


제 98호 시리즈 (3)


< 메이지유신 정권찬탈자들은 어떻게 종교(국가신도)를 정치에 이용하였나? 시리즈 >

제 99호 시리즈 (1)

제 100호 시리즈 (2)


제 100호 시리즈 (3)

제 101호 시리즈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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