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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통해 세계제국이 될 수 있었던 중국, 기회를 놓치다.

2018년 9월호(제107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9. 15.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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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정화의 해상진출 연구]



바다를 통해 세계제국이 

될 수 있었던 중국, 

기회를 놓치다.


- 정화의 대양항해를 다시 생각해보기 -


1405년 6월, 중국의 첫째 서방원정을 지휘하는 총사령관 정화의 거대한 선단이 대양을 향해 쑤저우의 항구를 출발했습니다. 정화선단은 길이가 135m나 되는 기함을 포함한 200척이 넘는 배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총 6차 항해를 통해 지금의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인도와 아프리카 동부까지 도달하는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1492년 콜럼버스의 1차 항해 당시 사용된 선박이 23m 산타마리아호를 포함한 3척 밖에 안 되는 것을 보면, 정화선단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1492), 인도항로를 개척한 바스코 다가마의 항해기간(1497~1499)과 비교했을 때 정화선단의 대양항해는 시기적으로 약 90년이나 앞선 일이었습니다. 

 정화선단의 대양항해는 중국을 육지에서 벗어나 강력한 해양국가로 발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더 나아가 서양이 동양을 압도했던 지난 오백년의 역사를 완전히 역전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중국은 바다에서의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정화선단 이후 다시는 그 같은 대양 항해원정을 도전하지 않았고, 명나라는 심지어 원정기록조차 모두 소각하고 바다에 나가는 것조차 막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우선 정화선단의 성격과 명나라의 한계, 이와 반대로 해양강국을 이룬 서양을 비교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서양의 선단과는 완전히 달랐던 정화선단의 성격

 정주민족이 다스린 중국의 역사 속에서 명나라 영락제의 외교활동은 굉장히 예외적인 일이었습니다. 외향적이었던 유목민족이 지배했던 역사 (당나라, 원나라 등)와 달리 정주민족이 지배한 명나라의 중국은 ‘내향적’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대외적 활동이 적었던 중국역사에서 정주민족 국가인 명이 정화선단을 파견한 것이나, 한나라 무제가‘흉노족’을 정벌한 것과 같은 사건은 예외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화의 항해는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정치적 이유가 강했습니다. 명나라의 황제 영락제가 정화선단을 파견한 목적은 명나라의 위엄을 널리 알리고 다른 나라로 하여금 중국과의 ‘조공무역’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조공무역이란 사대자소(事大字小: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고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보호함)의 관계를 바탕으로 중국과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주변국 사이에서 하는 무역으로 아래위를 따지는 유교적 전통에서 나온 것입니다. 유럽인들이 오랫동안 중시해왔던‘상업무역’과 비교했을 때, 정화선단의 항해 목적은 ‘동양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그렇게 거대한 정화선단의 파견을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상업무역의 목적이 아니었던 만큼, 항해를 통해 얻는 이익은 적고, 대신에 엄청난 적자를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명나라는 경제적 어려움과 많은 신하들의 반대에 직면하여 결국 영락제 사후에 선단도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 정화선단

 

정화선단을 파견한 정주민족의 명나라

 정주민족은 주로 집을 짓고 한 곳에 정착하여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동할 때의 이동수단은 발로 걷거나 바퀴를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정주민족은 토지를 경작하며 한 곳에 정착하여 성과 같은 방어시설을 세움으로 외부의 침입에 대한 군사적 대비를 하는 방어적 전략을 가집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이동하며 목축과 수렵, 약탈로 삶을 이어가는 유목민족보다 소극적일 수밖에 없고, 또한 말을 이동수단으로 삼은 유목민족보다 좁은 영토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대륙을 넘나드는 제국을 형성하기 위해서 더욱 필요한 것은 배를 통한 효율적인 이동과 경제적으로 꼭 필요한 상업적 무역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해안주변에 한정된 근해 항해가 아니라 정화선단과 같은 대양 항해가 창조되고 유지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중국을 통치한 정주민족 뿐 아니라 유목민족 모두 바다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정주민족적 중국의 신분구조인 사농공상에서 볼 수 있듯이, 상업과 무역을 맡은 상인은 가장 미천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한 때 원나라와 같이 거대한 제국을 정복한 유목민족은 말을 버리고 바다로 나가는 위험을 감수하지 못했습니다. 주변국들과 조공무역을 해왔고 자급자족의 경제체제였던 명나라도 결국 대양 항해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거기에 더해 당시 일본의 혼란기를 틈타 많아진 왜구의 끊임없는 약탈에 바다를 통한 활동을 제한하는 해금령까지 실행했습니다. 


해양강국을 이루었던 서양

 지중해를 중심으로 오랫동안 활동했던 유럽인들은 활발한 해상무역과 바다를 통한 전쟁들을 치루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해양기술과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중해를 중심으로 오랫동안 활동해 왔던 유럽 국가들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대항해 시대를 연후, 지중해를 넘어 대서양을 항해할 더 정교하고, 크고 강력한 배를 개발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상선과 군함의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카락’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습니다. 

 정화의 선단과 달리 유럽에서 대양으로의 탐험은 개인적 참여가 컸습니다. 콜럼버스, 마젤란 등 많은 항해가들이 직접 계획하고 국왕과 귀족들을 설득해서 이루어진 일들이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항해를 통해 얻을 경제적 이익은 철저하게 계산되어 공평하게 나누어졌습니다. 무엇보다 무역을 통해 부유하게 되고 싶었던 상인들이 앞 다투어 해양 항로를 개척하게 되고, 이를 통해 무역이 활발하게 지속되는 역동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600년도부터 영국과 네덜란드는 아시아의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동인도 회사를 세우기 시작했고, 이러한 경쟁들에서 유럽인들은 더욱 효율적이고 안전한 경제체제들을 상호 발전시켜 갑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주식을 최초로 도입해, 증권을 거래하는 ‘증권거래소’를 운영한 것입니다.

 서양 국가들에게 바다에서의 패권을 빼앗기게 된 동양은 이후 많은 분야에 있어 유럽에 주도권을 내어주게 되었습니다. 경제 강대국이자 세계의 중심이라 생각했던 중국 또한 청나라 말기에 해양력과 군사력에 있어 유럽보다 훨씬 뒤쳐져 있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차이로 1839년 아편전쟁이후 중국은 서양강국들의 반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21세기 현재,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도, 말과 배 혹은 자동차나 심지어 비행기를 이동수단으로 삼는 것도 아닌,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나가야할 시대가 활짝 열렸습니다. 이런 우주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과거의 명나라와 같이 그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폐쇄된 가운데 웅크리고 지낸다면, 우리 역시 우주시대를 이끌어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는 역사를 반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고예찬(고1)
rhtndud1020@naver.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07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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