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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을 이끈 적장들에게서 교훈을 얻을 수 없을까요?

2018년 9월호(제107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10. 2.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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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동란의 주역인 3인의 적장연구] 




한국전쟁을 이끈 적장들에게서 

교훈을 얻을 수 없을까요? 







 한국동란의 인물하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 장군’이 떠오를 정도로 그의 명성은 우리의 역사적 뇌리 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는 전쟁 발발 초기에 즉각 대응하는 인천상륙작전으로 한방에 전세를 역전시켰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이후 중공군의 참전을 예상하지 못하여 전쟁을 질질 끌게 되는 결정적인 실책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만약 역사를 읽을 때에 우리 편의 인물에게서만 교훈을 얻는다면, 즉 그가 중공군의 실제실력을 예상하고 더 나은 승리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제대로 배울 수가 없습니다. 만약 같은 사건에 참여한 적에게서 장점이 있다면 냉정하게 그것을 인정하고, 단점이 있다면 과도한 비난을 하지 않고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수준에서만 평가하는 것은 어떨까요? 이렇게 한다면 한 역사적 사건에서도 매우 다양한 관점에서 교훈을 받을 수 있으며 그 사건을 조감도를 그리듯이 매우 총체적으로 풍성하게 보는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동란이라고 하는 우리에게 매우 뼈아픈 사건에 참여한 적장 세 사람(모택동, 김일성, 팽덕회)에게 관심을 집중하여 그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인지 알아보려 합니다. 


 모택동 


자국보호’라는 실리적 전략으로 참전


중국공산당은 한국전쟁 참전논의를 위해 1950년 9월 보름동안 모택동 주재 하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공동으로 서명한 서한을 전달받고 군대 파병을 위한 군사적 원조 문제를 여러 차례 토의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결국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미군을 막으며 조선을 돕고 가정과 국가를 지킨다는 의미)이라는 이념과 목표를 설정하고 참전합니다. 모택동은 1950년 10월 8일 ‘중국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신속하게 조선으로 출동하여 조선 동지들과 함께 침략자들과 싸워 영광의 승리를 쟁취하도록 하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한국동란으로 전쟁의 불씨가 중국으로까지 확대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큰 고통을 준 적의 행동이긴 하지만, 새롭게 건국된 국가(1949)의 입장에서 보면 전략 자체는 옳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당시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국내외에 좋게 선전되는 것을 중요시했습니다. 중국은 전쟁 수행 과정에서 중·조 연합사령부를 대외적으로 결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전쟁이 보도될 때마다 이 사령부의 참전이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의 검토와 지시 하에 이루어진 것이 알려진다면, 북한과 함께 전쟁을 일으킨 주범으로 해석되어 외부에 알려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UN이 한국을 도우기 위해서 전쟁한 사실을 선명하게 알린 것과는 정반대의 태도이지요. 이렇게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선전전에도 섬세하게 신경을 썼던 것입니다.

 또한, 전쟁의 전 과정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실리를 챙겼습니다. 전쟁을 위한 정전회담을 준비하면서 김일성에게 회의제반 전문을 발송하여 명령함으로써 실제적 주도권이 중국에게 있음을 보인 겁니다. 


 

김일성  


 잘못된 예상에서 비롯된 실책과 그것을 만회하려 거짓된 책략사용하기 


 미 국무장관인 ‘에치슨’이 1950년 방어선을 일본에 국한한다고 선언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긴 했습니다. 김일성은 이 선언을 개인의 선언일 뿐이고, 자유민주주의 세계 체제 전체와 새로 신설되어 세계평화 수호를 원리적으로 추구하려는 유엔의 태도가 아님을 몰랐습니다. 북한의 최고사령관인 그는 상황을 오판하여 전쟁 초기에 3일이면 남한을 해방한다고 확신하며 모택동과 스탈린에 호소하고, 자신들의 군대를 격려하는 결정적인 실책을 범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순식간에 서울을 점령하자 남노당의 박헌영이 장담했던 서울시민들이 총궐기 할 것을 예상해서 3일을 남쪽으로 전진하지 않고 그 궐기를 기다리는 패착에 빠집니다. 이것은 짧은 기간이지만, 국군과 미군은 그동안 후퇴하고 정비할 시간을 벌었고 장차 낙동강전선에서 방어막을 치며 견디다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는 전과를 올린 것입니다. 그는 중공군과 ‘장개석’의 국민당군과의 전쟁에 참여하고 도움을 주어 실력을 길렀지만, 상대가 약화된 일본군이나 장개석군 정도가 아닌, 세계최강의 미국과 생생하고 활발한 유엔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또 미군과 유엔군이 그렇게 재빠르게 전쟁 참여를 선언할 것(7월 27일)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겁니다. 한마디로 그는 자기가 일으키는 전쟁의 성격을 전혀 헤아릴 만한 안목이 없었던 것입니다. 


 인천상륙작전(9월15일) 성공으로 수세에 몰린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에 지원을 요청하지만, 이것은 그 이후부터는 그가 외국인 중국의 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지휘권에 미련이 있었는지 중공군이 참전하자 전쟁초기에 북한군과 중국군은 각각의 지휘체계로 서로 공격하는 사건도 다수 발생해서 혼란이 일어났고 결과적으로 중·조 연합사령부가 구성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이 사령부의 실질적인 사령관은 팽덕회인 것은 분명합니다. 반면에 반대편에 서 있었던 남한의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도움을 받았지만 전쟁의 지휘권을 완전히는 넘겨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통일이라는 목표에 실질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미국과 상의없이 갑자기 포로를 석방해 버렸고 이어서 미국과의 상호군사방어조약을 체결하는 개가를 올려서 지금까지 남한이 군사적으로 유지되는 것은 바로 이 체제에 의한 것입니다. 김일성의 패착과 이승만의 성공은 이렇게 완벽히 서로 대비됩니다.    

 김일성은 이런 어리석은 행동과 판단을 한 사실을 감추고 패전-휴전은 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패전-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거짓 술책을 감행합니다. 그것은 팽덕회를 보좌했던 김웅과 박일우를 연안파, 즉 친 중국파로 몰아서 숙청한 겁니다(1956~1958). 이것은 독재자 개인의 정권유지를 위한 비겁한 행위로 이제 새롭게 출발해야 할 북한 전체에서 다양한 리더쉽들이 통합될 기회를 막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북한 전체가 점차적으로 그 발전에 있어서 남한에 밀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팽덕회


 종교에 가까운 국가와 당에 대한 ‘충성심’ 


 전형적인 군인이었던 ‘팽덕회’에게는 중국의 이익이 최우선이었습니다. 1945년 이전 항일전쟁에서부터 공로를 세운 그는 한국동란이 일어나자‘임표’(린뱌오)로 대표되는 반대론자들을 제압하고 한국전쟁 참전을 관철시켰습니다. 팽덕회가 이와 같이 한 것은 모택동과 같이 중국 자체를 지키기 위한 목적에서였습니다. 

그는 미군이 일찍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전술, 인해전술로 중국군의 병력이 무제한하며 그 능력이 무한하다는 환상을 유엔군에게 심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의 보급체계는 미흡하기 짝이 없었고, 기계화 전력은 유엔군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낮았다는 사실이 시간이 지나서야 알려졌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환상은 전쟁 초기에 중요한 전과를 올리게 했으며 만약에 유엔군의 전쟁의지가 약해서 한반도 허리에서의 방어막이 뚫렸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을 지도 모릅니다.  


팽덕회는 엄청난 인명피해가 있었음에도 중국과 당에 대한 종교적일 만큼의 충성심으로 그 피해를 정당화시키며 버텼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념적인 면만 가지고 무지막지하게 밀고 나간 것은 아닙니다. 더 이상 한국전쟁을 끌어간다면 공산군이나 유엔군이나 누구도 승리를 얻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여 한반도에는 두 개의 힘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 판단을 내릴 줄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휴전에 합의하게 된 겁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전쟁수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소련으로부터 군수품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이렇게 팽덕회는 한국전쟁을 기회로 중국군 전체의 2/3가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현대식 장비를 갖추는 성과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국군대의 실질적인 무장을 완성시켰습니다. 또 한국에서의 전쟁경험을 통해서 군사훈련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결과적으로 입었던 엄청난 중공군의 인명 손실을 피하려면 군의 현대화, 기계화와 새로운 전략전술 개발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절감하여 추후의 중국군을 건설적 방향으로 발전하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현선효즙 조현선
hyunseon.hyo@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07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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