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정주민족 북송과 유목민족 요가 맺은 최초의 외교문서 ‘전연의 맹’은 중국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2018년 9월호(제107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10. 2. 21:55

본문

[송과 요와 맺은 조약 연구]





정주민족 북송과 유목민족 요가 맺은 

최초의 외교문서 ‘전연의 맹’

 중국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사진출처 고등셀파 동아시아사>



 고려시대 서희가 외교담판으로 강동 6주를 되찾은 나라(993), 강감찬 장군이 귀주대첩(1018)으로 크게 물리친 유목민족이 이룬 나라를 아시나요? 우리의 역사의식에는 별 볼일 없는 나라로 여겨지지만 사실상 중국 북쪽을 지배하며 한때 호령했던 나라입니다. 바로 거란족의 요나라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창피를 당한 요나라가, 고려가 숭상하고 문물을 받아들였던 정주민족정권인 북송에 대해서는 철저한 우위를 점한 역사를 우리는 잘 모릅니다. 이 요나라가 북송을 누르고 공적으로 불평등조약을 체결했는데, 중국의 한족들은 밖으로 말은 하고 있지 않지만 대대로 이것을 수치스러운 조약으로 역사적 뇌리속에 깊이 각인하고 있습니다. 바로 ‘전연의 맹’이라는 조약(1004)입니다. 

정주민족국가 북송이 건국한지 채 50년도 안되어 요나라 거란의 침입을 받게 되자 평화의 댓가로 유목민족국가 요에게 해마다 엄청난 세폐(일종의 조공)를 바친다는 것이 이 조약의 핵심입니다. 이‘전연의 맹’은 12세기 초, 요가 약해져서 멸망되기 얼마 전에 북송 측이 파기하기 전까지 100여년의 긴 시간 동안에 걸쳐 실질적으로 효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이것은 중국의 이전 역사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새롭고 수치스러운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을 기점으로 그 이후 천년동안 정주민족인 한족은 유목민족에게 더욱더 철저히 지배당하는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조약은 중국역사전개에서 결정적인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전연의 맹’과 관계된 세 가지 주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첫째, 전연의 맹의 내용과 성격


먼저 이 조약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면,



    전연의 맹


① 송나라는 매년 군비로 요나라에 

    비단 20만 필, 은 10만 냥을 보낸다.

② 송나라 황제는 요나라 성종의 모친인 

   소태후를 숙모로 삼고, 양국은 형제의 

   친교를 맺는다.

③ 양국의 국경은 현재 상태로 하고, 

    양국의 포로 및 월경자는 서로 송환한다.

④ 송나라가 요나라에 대해 형의 나라가 

    되고, 양국황제는 형제관계를 맺는다.



이 조약의 성격은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습니다. 


 1) 유목민족인 요나라가 정주민족인 북송보다 힘에 있어 우위에 있다는 것을 공적문서로 인정한 사건입니다. 조약문의 내용에서도 그대로 보이지만, 이 조약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이 사건이 북송에게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이 선명히 드러납니다. 북송이 먼저 ‘서서’(誓書, 서약하는 문서)를 작성해 요에 제출했고, 요는 내용을 살펴 1주일 후, 그대로 복사하여 자신들의 말로 표현했습니다. 즉 문서를 약자인 북송이 작성하면 요가 그 내용을 심사하여 만족하면 재가하여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양국 모두의 서서가 현재 역사적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2) 표현상으로는 대등한 국가 사이의 조약 같지만, 실제적으로는 힘에 의한 불평등한 조약입니다. ‘북송은 대등한 황제국으로 형제관계를 통해 외교적 평등 지위를 획득하였다’고 평가하였습니다. 문화민족인 한족의 북송은 형이 되고 그들이 야만족이라 무시하던 요가 동생이 되는 거지요.   형이 동생에게 돈을 준다라는 것 같지만 ‘세폐’를 바치는 조공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사실상 ‘전연의 맹’은 명백히 불평등한 조약입니다. 북송이 받쳐야할 세폐는 요가 요구한 것인데 요나라에서 송에 행해야 할 실제적 의무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도 송나라황제 ‘진종’은 이 조약을 평등조약으로 보이기 위해 다음과 같은 위선적 정치행위를 했습니다. 즉, 그는 천하를 평정했다는 의미로 태산(泰山)이라는 지역에서 중국전통적인 황제가 했던 하늘을 향해 고하고 제사 드리는 봉선(封禪)의식을 그로부터 4년 후 (1008)에 행한것이죠. 사실 이것은 ‘조공외교’로 외교적 좌절과 ‘전연의 맹약’에서 입은 손실을 무마시키기 위한 백성들을 속이는 거짓된 정치 행위에 불과합니다. 


둘째, ‘전연의 맹’이후 중국 땅에서 유목민족국가와 정주민족국가 사이에 맺어진 조약의 역사


 그러면 이 조약 이후, 계속해서 새롭게 나타나는 유목민족의 정권과 그 자리에서 대를 이어 살아갔던 정주민족의 한족정권은 어떤 조약을 체결했고, 어떤 상호 관계를 수립했을까요? 


 1) 북송은 중국 북동쪽, 한반도 북쪽에서 발원한 유목민족인 여진족이 이룬 국가인 강력한 나라 ‘금’과 ‘해상의 맹’이란 조약을 맺었습니다.(1123) 그 조약의 내용은 북송과 금이 연합해 요를 멸망시킨다면, 요가 차지했던 연운16주를 북송에게 넘겨주는 대신 북송이 요에게 바치던 세폐에 100만관을 더 추가하여 금에게 바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조약이 만들어지는 과정자체도 ‘전연의 맹’처럼 정주민족에게 수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전연의 맹’의 ‘서서’형식처럼 북송이 먼저 금에게 제출하고 금은 이 내용을 살펴본 후, 1개월 후에 그대로 자신들의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연의 맹’때보다 오히려 북송이 더 저자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북송은 자신을‘대송황제’로 간략하게 표현하나, 금은 ‘대금대성(大聖) 황제폐하’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2) 요가 망한 후에 금은 세력을 더 확장하여 결국 북송을 무너뜨리고 맙니다. 여기서 남쪽으로 도피하여 새롭게 이룬 정주민족 정권이 ‘남송’인데, 금과의 새로운 공적조약 관계를 체결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1142년 금과 남송 사이에 체결된 ‘소흥화의’입니다. 이 화의는 금과 북송사이의 ‘해상의 맹’보다도 남송에게 훨씬 더 굴욕적인 것이었습니다. 구체적 내용을 보면,‘신하국 남송은 금 황제의 생신 및 정월에 대사를 파견하여 알현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문구를 통해 아예 형식상의 평등관계 조차 깨어졌음을 알 수 있고, 남송과 금 사이는 이전보다 격이 더 떨어져서 신하국과 주권국의 관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남송이‘해상의 맹’보다 훨씬 저자세를 취한 ‘소흥화의’문서는 아마 칭기스칸이 먼저 금을 멸망시킨 후, 남송이 수치스러워 폐기했는지 공적기록 자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3) 역사는 흘러 원이 금을 멸망시킨 후에, 초강력 유목민족국가인 ‘원’은 아예 중국 전체를 장악하고 말았습니다. 비록 100여년이 채 안되는 동안 원은 정주민족인 한족을 통치했지만, 한족 속에 이전보다 훨씬 더 큰 수치심과 고통스러운 역사인식을 뼈속 깊이 남겼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 지배하의 남송인은 사회계층에 있어 최하층으로 분류되어 취급되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정주민족 국가인 ‘명’이 나중에 원을 물리치고 중국을 통일했으나, 얼마 안 되어 이전에 금을 이루었던 유목민족인 여진족의 후손(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처음에는 후금이라 칭함)가 다시 흥기하여 무려 268년 동안 중국을 철저히 지배했습니다. 초강력 유목국가인 ‘원’, 그리고 매우 효과적인 정주민족을 통치하였었던‘청’은 아예 정주민족과는 조약을 맺을 필요도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전연의 맹(1004)과 청의 멸망(1912)까지 약 천년의 역사를 유목민족국가와 정주민족국가 사이 관계의 역사로 본다면, 자명해지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역사가 지나갈수록 새롭게 정비한 강력한 유목민족국가라면, 아무리 인구가 많고 광활한 토지를 가진 정주민족이라도 얼마든지 오랫동안 지배하고 통치할 수 있다는, 한족 중심의 중국인들에게는 매우 악몽과 같은 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마 중국의 정주민족인 한족의 뇌리 속에 유목민족에 대해 역사적 두려움과 열등감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고 추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중국역사 전체의 관점에서 본 ‘전연의 맹’의 평가 


 이제는 ‘전연의 맹’을 중국역사 전체의 관점에서 보아야 할 차례입니다.


 1) 중국역사 최초로 정주민족국가인 북송과 유목민족국가인 요 사이에 공식적 외교관계가 체결되고 그것이 문서로 작성되었다는 것으로 ‘전연의 맹’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목정권인 요(916)와 정주정권인 북송(960) 모두 국가를 창건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창건의 생생한 기운이 있는 가운데 이런 조약이 체결된 것은 두 세력 간의 우위가 처음부터 선명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즉 물리적 힘의 우위를 가진 요가 침입했을 때 이것을 극복하지 못한 북송은 이전에는 요를 문화가 없다고 야만인 취급하였지만, 이제 공적으로 대등한 국가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화는 총체적인 것인데 북송은 군사력이 빠진 문화적 성취에만 자부심을 가졌던 것 입니다. 이것은 허구이고 위선적일 뿐입니다.

 2) 전연의 맹 체결은 북송과 요 사이에서 122년 평화의 기초를 이루었지만, 이런 장기간의 평화는 북송에게 현실에 안주하는 심리를 이 조약 후에 정주민족인 한족에게 지속적으로 가지게 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돈을 주고 평화를 사는 굴욕적 심리를 심었을 것입니다.

 3) 한족 중심의 사관에서는 엉뚱하게도 ‘전연의 맹’을 중국 영토 내에서 발생한 다(多) 민족적 사건으로 보고 북송과 요 간의 전쟁을 일종의 내전으로 평가합니다. 하지만 분명 당시 북송과 요는 별개의 민족들이 이룬 독립적 국가였습니다. 즉 하나(북송)는 정주민족 정권이었고, 다른 하나(요)는 어디서든 갑자기 형성하여 중원을 차지할 수 있는 유목정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후에도 금, 원, 청과 같이 다양한 유목민족이 일어나 점점 더 강력하게 한족들을 통치하고 지배할 수 있게 된 겁니다. 또한, 한족 중심의 사관은 한족왕조인 북송을 정통으로 설정하기 때문에 이 맹약이 굴욕적이냐, 평등하냐의 논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정주민족편에서는 굴욕적이요. 유목민족편에서는 자부심을 가질만한 사건입니다. 비록 유목민족은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기보다 현재적 통치를 이루는 것을 더 좋아하지만 말입니다.

 4) 중국역사의 긴 시간이 흐를수록 유목민족이 정주민족을 더욱 강하게 지배하는 터전이 확실해졌고, 이 기본 출발이 바로 전연의 맹이었습니다. 요나라 이후로 여진의 금, 요와 유사한 민족적 출발을 가진 몽골의 원, 금을 다시 이은 여진의 청의 역사들은 이 사실을 증거합니다.

 5)‘전연의 맹’을 통해 ‘중국과 중국인의 정체성’에 대해 재고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중국인의 정체성을 한족중심주의로만 파악한다면, 중국안에서 다른 민족들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현대중국은 형식적으로는 다민족사회라고 주장하고, 중국 국경내의 여러 민족을 포섭하고 자치구를 허용한다고는 말합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한족 혹은 한족화된 사람들이 중국전체를 지배하고 통치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것이 중국인의 정체성을 세우는데 수반되는 실질적인 어려움입니다. 만약에 이렇게 이민족을 모두 중국인으로 포섭한다면 나중에는 사실상 세계 모든 민족이 중국인이 된다는 헛된 주장까지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이어서 중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에서도 혼돈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현재 중국의 광활한 영토는 정주민족이 아니라 유목민족국가로서 중국을 지배했던 요, 금, 원, 청이 확대해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이들 국가들은 대부분 한족을 지배와 통치의 대상으로 여겼고, 원은 심지어 남송의 백성을 가장 낮은 계층으로 취급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중국과 중국인의 정체성이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적 기초를 제대로 놓는 일은 항상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중국이 계속해서 가질 수밖에 없는 역사적 고민일 것입니다.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편집장 김미경
hasun2001@hanmail.net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07호>에 실려 있습니다.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는 

  • '지역적 동네'뿐 아니라 '영역적 동네'로 확장하여 각각의 영역 속에 모여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스토리와 그 속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문명, 문화현상들을 동정적이고 창조적 비평과 함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국내 유일한 동네신문입니다.
  • 일체의 광고를 싣지 않으며, 이 신문을 읽는 분들의 구좌제와 후원을 통해 발행되는 여러분의 동네신문입니다.
  • 정기구독을 신청하시면 매월 댁으로 발송해드립니다. 

    연락처 : 편집장 김미경 010-8781-6874

    1 구좌 : 2만원(1년동안 신문을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예금주 : 김미경(동네신문)

    계   좌 : 국민은행 639001-01-509699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