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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가깝고도 먼 나라 중국! 공동체로 방문하다

2018년 11월호(제109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8. 11. 10.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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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연구여행]



 또 다른 가깝고도 

먼 나라 중국 !

공동체로 방문하다



 





  우선 과제인 한국인으로서의 자기정체성 확인


 일본이 가깝고도 먼나라가 된 데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이유가 컸었습니다. 임진왜란과 36년간의 일제강점이 없었고, 또 비록 그것이 벌어졌다고 하더라도 과거를 잘 정리하는 정치적 행위들이 있었다면 지금의 프랑스와 독일처럼 행복한 이웃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매우 불리한 것은 이런 가깝고도 먼 이웃이 일본과는 정반대편에 또 하나 있다는 겁니다. 그 크기는 아주 거대하며 인구도 너무나 많고 또 우리와의 관계가 아주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여기에는 서구에서 도입한 정치사상인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라는 또 다른 함수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보다는 더욱 복잡합니다. 이 정치사상이 한반도를 반으로 나누며, 다시 그 남쪽 반에서 아직까지도 ‘진보’라는 슬며시 바뀌치기한 이름으로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과거 조선시대 내내 중국의 송나라에서 들어온 사상인 주자학을 신주단지처럼 ‘사대적’으로 모셨다가 한민족이 아주 오랜 고통의 세월을 보내었지요. 현재 외부에서 들어온 한물간 정치사상에 불과한 것을 거의 종교적 열정으로 숭배하기에 ‘사대근성’이 한민족의 본성인 것은 아닐까요? 최근에 우파의 치명적인 실패로 어부지리를 얻어 정권잡은 이들은 자신들의 사상적 뿌리를 광란의 피의 역사를 기록한 프랑스혁명(1789)으로 잡는다는 기가 막힌 말까지 한다고 합니다. 그 혁명과 그보다 무려 100년 전에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왕권의 완전한 이양을 이루어내었던 영국의 명예혁명(1688) 중에서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를 물으면, 바보천치 아니고서는 누가 왕뿐 아니라 자기들끼리 목을 자른 혁명을 선택할까요? 지난 65년의 매우 기이한 평화로운 시대(1953~2018)는 지나가고, 한반도를 주위로 정치적 군사적 파고가 크게 높아지는 상황에서 몰아칠 가능성이 있는 피의 광풍을 우리는 과연 막아낼 힘이 있을까요? 사실 외부인 중국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보다 더 시급한 것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제대로 세울 것인가 하는 겁니다.



  ‘다양성과 통일성을 이루는 공동체여행’, ‘총체성을 이룬 지역학’


 그렇지만 한번씩은 우리의 또 다른 가깝고도 먼 외부를 알아가는 여행, 특히 중국을 향한 공동체여행은 필요하다고 여긴 것이 우리의 여행의 이유였습니다. 먼저 우리 모두 여름 휴가 기간동안 땀흘려 일했으며, 대신 추석연휴 전후에 각자의 직장에서 연속휴가를 받아서 10일의 여행기간을 마련하였지요(9월 20일(금)~30일(주일)). 이 공동체에는 남녀, 학력, 사회적 지위 고하를 막론했으며, 고등학생부터 팔순이 다 되어가는 치매 초기증상의 할머니까지의 모든 연령층이 다 포함되었습니다. 이 할머니는 다시 본인의 활력을 찾으셨는지 가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위트로 우리를 웃겨주시고 긴장도 풀어주셨으니, 우리에게는 부담이 아니라 안 계셨더라면 오히려 재미가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기차시간에 맞추느라 업고 뛰기도 했지만, 지금은 행복한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았습니다. 이렇게 착한 치매에 걸린 엄마를 모시고 두번째 해외여행을 이어가는 딸의 이야기가 이번 신문에 실렸습니다(김미경).

 이렇게 공동체로서 - 나 개인 혹은 가족의 행복한 (여가, 휴가, 음식, 관광)여행이 아닌 - 중국을 좀 더 깊이, 더 많이, 더 멀리, 더 포괄적으로 알아가는 여행을 제대로 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각자가 정한 주제로 중국을 향한 사전연구여행을 했었지요(9월호). 사전연구를 할 때부터, 또 실제 여행을 하면서, 그리고 귀국후 여행기를 기록하면서, 앞으로 중국에 대한 사후연구여행을 해나가기 위해, 우리는 수많은 대화를 하였으며 정보를 주고받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가 이루려했던 첫째 목표는 우리의 생각과 관심의 다양성과 통일성의 유지였습니다. 공동체가 유지되려면 내적 통일을 이루는 어떤 원리 같은 것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개인의 생각, 또 몰입하는 영역과 그 영역적 관점의 다양성을 상호인정하여 풍성하게 만들어 중국에 대한 총체적 상을 완전하게 만들어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공동체가 연구하고, 여행하고, 다시 연구해 나가는 이런 과정은 중국을 총체적으로 아는 지역학이라는 둘째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같은 것을 보아야 하기에 공동체여행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되도록 중국의 총체적인 면을 아는 과정으로 발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중국을 향한 사전연구여행에서 이미 시도해 보았지요. 즉 중국의 역사, 사상, 철학(종교), 인물, 문화 등에서 각자가 관심을 가지는 것들을 자유롭게 서로 중첩되지 않도록 2~3개 정도를 정해서 이론적 글쓰기를 해 보았습니다. 또 이제 몸으로 직접 중국을 여행하면서, 자신이 설정한 작은 영역에서 자신만의 관점으로 경험적 글쓰기 할 것을 미리 마음으로 준비하고 갔지요. 물론 주제가 서로 겹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여행하면서나 돌아와서도 서로 대화하면서 써내려갔고 서로 점검하는 시간들을 가진 결과가 이번 11월호의 신문의 내용입니다. 물론 우리 중에는 중국과 지속적인 사업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지만, 우리 중에 누가 또 중국과 실제적 관계를 맺으면서 일을 해 나갈 사람이 생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럴 경우에 대비해 단순히 중국에 대한 조언으로 ‘꽌시’(관계)가 중요하다는 정도만 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모든 것(종교, 철학, 심리, 기후, 언어, 지리, 역사, 정치, 사회, 법, 제도, DNA등), 즉 총체성을 미리 알고 대비하여야 할 것이고, 이것이 세 번의 글쓰기와 한 번의 여행의 목적인 겁니다. 더 나아가 중국이 아닌 그 어떤 외부에 내가 독자적으로 나가는 상황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혼자서라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연구하고 여행해야 할 것입니다. 즉 그 외부인들이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그 사회와 문화(명)현상 배후에 놓인 실제적 원리, 작동방식, 심리 등을 추론하는 법을 공동체 모든 사람들이 배우도록 미리 훈련해 보았던 겁니다.



 완전한 다름의 세계, (서)유럽을 향한 셋째 여행기획(2020)


 지금 우리는 외부를 향한 셋째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데, 현대세계문화와 문명의 기초와 대세를 이룬 서유럽을 3주 정도의 비교적 짧은 시간(2020)동안 방문하는 겁니다. 유학생으로 또 사업상으로 서유럽에 짧게 혹은  오랫동안 있었던 분들이 한국사회에 소수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대체로 바쁜 일정 때문에 서구문화(명) 그 차제를 차분하게 동정적이면서도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기는 어려워서, 자신이 겪은 단편적 경험들만 의식 속에 남은 경우가 많습니다. 앞으로 2020년까지의 1년반 혹은 2년은 긴 것 같지만, 우리가 공부하고 알아야 할 범위를 생각하면 사실 턱없이 부족한 시간입니다. 일본과 중국을 향한 여행은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실질적인 맹점 같은 것을 찾아가는 여정이었습니다. 반면에 서유럽은 모든 면에서 전통적 동양사회의 하나인 한국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거의 없고, 오히려 우리가 일방적으로 영향을 받았고,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서유럽은 까막눈과 같은 상태로 볼 수밖에 없는 철처한 외부일 뿐입니다. 이 완전한 다름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1) 단순한 사대(주의)적 수용, 2) 단순한 거부, 혹은 3) 일본의 메이지유신이 헛되게 성공했고 또 중국이 철저히 실패한 원리인 ‘동도서기’(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기술)적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 서유럽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완전히 상대화시킨 후에, 21세기에 함께 우주로 나가야 할 하나된 세상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새로운 관점에서 출발해야 할 겁니다. 이 단계가 되기 전에 우리 작은 공동체가 몸으로 했던 중국을 향한 여행의 다양한 성격을 정리해야겠지요?



 ‘대화’여행의 실패


 여행에서 실패한 것부터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 중국인과의 대화여행에서 실패했다는 겁니다. 일본여행에서는 한국인으로서 일본에 사시는 분들이나 개방적 일본인들과의 직접적 만남들이 있었고 대화가 자유로웠고 나름으로 깊었기 때문에 중국에서도 기대했었지요. 물론 우리의 인맥이 얕고 좁은 것도 문제가 되었지만, 우리가 교섭한 거의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이모저모로 국가의 눈치를 보는 것이 명확해 보였습니다. 중국의 정치경제적 현실과 관련있는 대화를 할 수 있는 경우도 아주 드물게 있었지만 매우 조심스러워했습니다. 그래서 대화여행의 실패가 이번 여행에서 제일 아쉬운 점으로 남아있습니다. 한국에 오는 여유있는 분들을 조용히 초대해서 모든 것을 비밀로 보장하면서 깊은 대화로 나가는 방법 밖에 없는 것 같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중국 거리에서 저녁마다 거리에 나와 노래 부르고 춤추는 모습을 얼핏 보고 매우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다양한 주제에 대한 표현이 자유롭지 못한 중국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고은정). 대화를 해도 SNS상에 올리지 말 것을 부탁하는 분위기이니 더욱 대화가 위축될 뿐이었지요.


    

 남방여행 / 남방문화(명)여행


 현대중국에 포함된 지도의 북쪽에서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는 ‘15인치 강우량’ 등고선은 만리장성과 거의 일치하며, 청나라 때의 여름피서궁전이 있었던 열하에서 출발합니다. 즉 그 이북에는 유목을 하며 이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으며, 그 이남에는 농경을 하는 정착생활이 가능합니다. 흔히들 중국여행의 첫째 지점으로 그 등고선 아래 북단에 놓인, 오래된 수도이며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인 베이징을 잡습니다. 북경은 엄청난 역사적 자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공해, 꽉막힌 교통란, 산만한 분위기, 이미 가본 사람들이 있음 등의 이유로 여행지 고려 대상에서 일찍이 제외되었지요. 이런 점에서는 10개 정권의 수도였던 서쪽에 놓인 시안(서안)도 사정이 비슷해서 포기되었습니다. 아예 동쪽에 놓인 대만도 환경, 영어사용의 편리함 등으로 한때 고려하기도 했지만, 역사적 자취가 너무 얕아서 장개석이 후퇴할 때에 가져온 엄청난 유물이 있는 중산기념관 외에는 매력적인 점이 적어서 바뀌었습니다. 그렇다보니 남은 곳은 남방으로 그 중에서도 현대도시 상하이, 그리고 고대(현대)도시 난징, 쑤저우, 우전(가마우지 마을)에 한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대체로 중국문화(명)을 북방의 유목민족과 남방의 정주민족의 교호작용으로 보는데, 지금도 이 두 문화(명)의 차이가 아주 선명하기에 우리들은 일단 남방만에 선택 집중하기로 한 겁니다. 유목민족인 만주족의 청나라가 중국에 깊숙이 들어와서 지배했지만 이전의 유목민족(선비족) 정권인 북위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즉 시간이 지날수록 정주민족인 한족 속에 해체되어가서 말타는 호방한 정체성이 흐려지며 투쟁의식이 사라져서 배를 타고 건너온 서양에게 최초로 항복한 사건이 바로  ‘아편전쟁’과 그 결과로 체결한 ‘난징조약’(1842)이었지요. 우리 중에 바로 이 사건 이후에 중국 속에 ‘전형적인 서양적 현대도시로 발전한 상하이의 역사와 그 이면’을 다룬 글을 썼습니다(이송아).  

 결과적으로 우리가 남방을 여행지로 선택한 것이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여러 면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정주민족의 방어적 태도를 잘 나타내는 것은, 우리가 첫날 만났던, 명나라 때에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규모로 방어적으로 지은 ‘오월동주’의 오나라의 수도였으며 장개석 정권의 초기 수도였던, 난징성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공세적으로 접근한 일본군에 의하여 결국 취약한 곳이 뚫렸고 이어서 30만명이 죽는 난징대학살사건이 일어난 곳이지요. 우리 중에서는 난징대학살기념관을 방문하여 ‘한국과 중국의 일본을 향한 전후의 보상정책의 차이’를 다룬 글을 썼습니다(최승호). 또 저녁식사 후 남방의 많은 물들을 다스리는 방식으로 개발된 수로(운하)를 어슬렁거렸지요. 그러다 우연히 마주쳐서 들어간 곳이 바로 그날 개장한 비단집(비단장수 왕서방이 결코 아님!)이었는데, 우리 모두는 비단의 화려함에 처음으로 흠뻑 취했다고 할 정도로 화려한 옷감 디자인과 옷을 보았습니다. 문화적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현대적으로 재현하는데 성공한 것 같은데, 남방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박수를 쳐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또 그 운하로를 따라가며 뱃놀이하는 중국인들에 섞여서 옛사람의 삶을 화려한 불빛으로 현대적으로 재현한 중국인들의 자부심에 같이 들떠 보았지요. 또 난징 중심거리에 잔뜩 모인 엄청난 숫자의 젊은이들에게서 세계로 나갈, 또 새로운 차원의 인해전술을 쓸 가까운 미래에 긴장감을 느끼기도 했지요.   



 ‘정치는 건드리지 말고 문화만’/ 문화여행


 진시황 이후 2천년 이상의 중국역사에서 명백한 한족의 정주정권이 지배했다고 하는 것은 한/송/명 밖에 없는데, 남방은 그 한족문화를 자신의 핵심으로 여기고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이란 바로 정치빼고 문화만이라는 겁니다. 즉 정치는 말 타고 중국 전역을 휩쓸며 지배했던 기마유목민족이 하고, 정주민족인 한족은 그 지배 아래서 시키는 대로 도자기, 옷감제작과 같은 문화(명)을 만드는 일을 하는 겁니다. 사실 중국인들이 이룬 문화에 대한 자랑에는 이런 지배당한 슬픔을 덮으려는 위선이 살짝 엿보이는 것 같았지요. 난징박물관은 장개석이 모조리 대만으로 유물들을 가져가서 그런지 휑하니 보였지만, 상하이박물관은 모두가 감탄할 정도로 내용이 엄청났으며 풍성했고 발굴한 것도 아직 정리하지 못해서 한쪽에 쌓아놓았을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아무리 고려나 조선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중국 것의 변형이나 복사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지요. 그래서 우리 중에서 10여년 전 대학시절 상하이박물관에 왔을 때와는 달리, 지금 천천히 살펴보니 ‘남방문명의 화려함, 정교함, 대범함, 깊이’등에 감동해서 글을 쓰기도 하였습니다(김송희).

 실제 18세기 이후 서양이 그 기술을 베끼고 능가하게 되기까지 전세계를 휩쓸었던 화려한 ‘도자기문화’에 관심을 집중하기도 했지요(한수정). 여기서도 유목민족 정권인 수/당의 도자기들은 화려한 색채와 과감한 형태 등을 보이지만, 송/명의 도자기들은 절제된 모습을 보이는 특징의 차이가 명백하게 보여서 두 민족정권의 본질적 차이를 선명하게 알게 되었지요. 청나라를 이끈 만주족은 원나라를 이룬 몽골족과는 달리 본거지인 만주를 완전히 비우고 중국의 모든 곳에 흩어졌기 때문에, 정주민족의 것을 어떻게 하든지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꼼꼼하고 성실하게 일했던 것으로 유명한 ‘청나라의 옹정제 시대에 어떻게 도자기 장인을 대접하여 화려하고 섬세한 도자기가 나왔는지’를 살피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나경희). 또 현대 중국이 남방을 계속해서 예술도시로 만들려는 정책하에서 강력하게 지원하는 ‘현대 예술단지인 상하이의 M50’을 방문한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고종훈). 또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음식을 만드는 ‘중국의 음식문화’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조현선). 이어서 중국 남방의 현대문화를 잘 나타내는 ‘텐쯔팡 거리’가 어떻게 현대에도 전통적인 남방의 중국문화를 이어가는 지에 대한 관심도 가져보았습니다(신동숙)

 또 우리가 많이 방문한 곳은 중국 남방에 특히 유명한 정원들이었습니다. 황제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거대하고 웅장한 베이징에 있는 이화원과 같은 북방정원에 비하여, 규모는 적으나 화려하고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남방정원을 유유자적하게 걷는 호사를 누리기도 하였지요. 그 중에서 ‘남방정원의 창과 바닥의 다양하고 섬세한 문양’에 대해서 쓰기도 했습니다(유지형). 그렇지만 이런 정원은 높은 담으로 외부와 차단되어서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를 만들려고 한 것 같이 보였습니다. 정권에는 참여하지 못한 가운데, 정부가 허락하는 수준에서 돈을 벌어 고향에 화려한 집과 정원을 짓고 그 안에서 유유자적하게 지냈지요. 하지만 높은 담장으로 둘러쳐서 자신을 외부로부터 보호한다고 생각하였으나 오히려 자신을 자신이 만든 감옥에 가두는 문화와 삶을 이룬 슬픈 역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외부인 기마민족이 또 서양이 어떤 힘으로 침입해오는 지를 알지 못한 채 말입니다. 전 중국을 통치하면서 외부와의 전쟁을 도맡았던 청나라의 만주족들은 후대에 갈수록 말도 못타고 활도 못쏘며 만주어조차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으니, 근세에 누가 중국을 지킬 수 있었겠습니까? 



 뒤범벅된 역사를 관통하는 시간여행 


 남방의 정신문화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유학/유교의 기원인 공자를 기리는 태도인데, 그것을 잘 나타내는 것이 ‘공부자묘’와 조선에서처럼 공자의 가르침(사서삼경)으로 과거를 보았던 ‘공원’입니다(한상기). 송나라 때에는 이런 것이 국가를 세우는 철학적 기초가 되었으나 결과적으로 문약(文弱)으로 흐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몽골족의 일족이 세운 요나라,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속국처럼 조공을 바치며 지냈어야 했지요. 다시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에 의해 정복되어 가장 낮은 계층으로 존재했던 남방민족들이었고, 다시 여진족의 정복으로 다스림을 받아 남방의 한족들이 유리천장 속에서 출세하는 수단으로 쓰인 것이 바로 과거였습니다. 만주족은 과거가 필요없고 언제든지 최고의 통치자 위치에 있었고 그것을 결코 한족에게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공자와 그의 가르침을 후대 정권들이 유용하다고 판단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일단 유교가 가진 통치하는 세력을 인정하고 시작하는 보수성, 그리고 유교로 얻을 수 있는 정권의 안정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정권의 ‘보수/평안’을 유지하는 근거와 함께 ‘충성과 (공)의’를 다해 공산정권에게 충성하고, 공산당이 제시하는 법을 지키라고 말하는데 사용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는 거지요. 그래서 중국은 태평천국의 난을 크게 선전하려고 특별한 상설 전시관을 마련하였지만 그 마지막에 ‘홍수전-마르크스-손중산-모택동을 연결’시키려는 억지에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추광재). 가는 곳 어디나 중국식 사회주의를 이루려는 슬로건이 마치 종교적 규칙처럼 적혀있으며, 공산당원임을 나타내는 집 문패에 달린 빨간 표시판은 한국의 교회신자들의 집을 나타내는 것(‘~교회’)이나 유대인의 집앞에 걸어놓은 표시(Mezuzah)나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즉 중국은 오랫동안의 무종교사회이지만, 대신 어떤 것(황제, 공산당)이 절대자 위치에 있는 것을 하나의 관습처럼 받아들여지는 나라인 것입니다.

 21세기 후반에 갈수록 영토의 크기나 국민의 숫자 때문에 중국은 결국 제1경제대국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총체적 문화와 정신적 능력에 있어서 이럴 정도로 빈약하다면, 그 휘두를 철권으로 얼마나 많은 민족들을 얼마나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할지, 또 그 첫째 대상이 바로 우리가 될 것이라는 어두운 상상으로 다가오는 뒤범벅된 중국역사를 관통하는 여행이었습니다.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편집부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09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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