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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문화(명)와 서양문화(명)가 유사하지만 다르게 세상의 배꼽에서 파생해 나간 역사(5)

2019년 8월호(118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9. 10. 12.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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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문화의 황혼에서 새 문화의 여명으로 25]

  동양문화(명)와 서양문화(명)가 

유사하지만

다르게 세상의 배꼽에서 

파생해 나간 역사(5)

 

현재 한국의 미디어들의 제작 기준은 중학교 졸업생이지만, ‘행복한 동네문화이야기’는 조금 높여 고등학교 졸업생으로 기준을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옛 문화의 황혼에서과 새 문화의 여명으로]는 더 높여 한국에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대학졸업생으로 삼았습니다. 이 분들이 조금만 끈질기고 사려깊게 읽어주시고, 또 만나는 분들과 서로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 사회에 건강한 여론을 형성하는 주역이 되시기를 바라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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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주위에서 4개국 30여대의 전투기가 뒤엉킨 65년만의 초유의 위기!
2019년 7월 23일 독도 주위에 30여대의 폭격기와 전투기들이 순식간에 뒤엉켜서 한국전쟁 이후 최고조의 위기가 연출되었습니다. 미국, 북한을 빼고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네 나라 (러시아, 중국, 한국, 일본)에서 모두 발진한 것이었습니다. 비행기의 행동에 대한 각 나라의 해석과 주장도 가지각색인 중에, 세 힘센 나라가 큰소리치고 힘 약한 한 나라만 조용히 있어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지난 66년 동안 한반도에서 전쟁을 모르고 평화롭게 살아왔던 세대들이 동아시아 속에서의 변할 수 없는 고정된 지정학적 상황 때문에 매우 불안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정말 섬뜩하게 자각했을까요? 마침 같은 시기에 벌어지고 있는 한·일 간에 조성된 역사적, 경제적 초긴장 상태를 볼 때에 차라리 한반도인들이 이제는 더 이상 우물 안에 개구리처럼 살면 안 된다는 것을 총체적으로 각성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또 같은 시기에 지구의 정반대편에 있는 영국에서, 정권욕을 채우기 위해서는 어떤 바보짓이라도 감행했던 존슨(그래서 ‘바보 존슨’의 별명)이 총리로 선출되면서 영국이 유럽에서의 탈퇴(Brexit)를 올해 내로 기어이 이루어낼 조짐을 보이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중국의 너무 빠른 통일의 단점, 유럽의 너무 늦어지는 통일(EU)
아시아의 동쪽 끝인 중국에서는 무려 2천년도 훨씬 더 전에 있었던 통일을 이룬 ‘장점’(진시황 BC 221)이 오히려 획일화, 안정추구, 전제정치전통 등의 ‘단점’이 된 사실이 역사에서 확인되었습니다. 그런 구심력적 통일을 대륙세력인 중국, 러시아가 추구하면서 한반도까지 세력을 확장하려 하는데, 그것을 해양세력인 미국, 일본이 막아서고 있는 형국입니다. 반면 지구의 정반대편인 유럽의 서쪽 끝에서는 지금까지 통일이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어 민주화된 사회와 정치, 상호 경쟁으로 역사의 발전 속도가 매우 빨랐던 ‘장점’이, 이제는 이미 만들어진 EU에서도 탈퇴(Brexit)로 삐걱거려 세력이 약화되는 ‘단점’을 안게 되었습니다. 즉 EU는 날마다 강력해지는 미국, 러시아, 그리고 앞으로 교육이 평준화될수록 국민의 숫자가 바로 국력이 되는 시대에서 27억 이상의 아시아 강국(중국, 인도)을 맞상대할 능력을 지난 19~20세기에 가졌던 것처럼 과연 가질 수 있을까요?

‘근본을 공부함으로 더 나은 길을 개척한다’
이런 가운데 동아시아의 끝자락에 위치해 앞으로 대륙과 해양 세력이 본격적으로 충돌할 21세기의 제2막이 벌어질 한복판에 살 수밖에 없는 우리로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요? 이런 가운데 지난 6월에 해외 이민자가 작년에 비해 갑절로 늘어났다는 우중충한 소식이 여름 장마의 곰팡이처럼 끼어들었습니다. 소(득)주(도)성(장)이라는 허황된 이데올로기만 가질 뿐 나라를 제대로 살리는 정치적, 경제적 대책 하나 없는 좌파/진보정권이 주도하는 이 땅에 소망을 잃고, 가진 재산 몽땅 끌어 모아 밖으로 튀는 이런 사람들이, 아무 전략 없이 일본과 싸움을 벌이고, 북한에 헛된 소망을 걸고, 미국과 중국에 어떤 소리도 못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 땅에 살아가려고 남아있을지 모르는 우리들보다 혹시 더 솔직한 것은 아닐까요? 이런 가운데 최근의 어떤 분이 ‘(근본적 역사를)공부함으로(일본에) 저항한다’는 기사를 쓰신 것을 읽으면서 ‘근본을 공부함으로 더 나은 길을 개척한다’는 자세를 가져봅니다. 우리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를 애독하며 나라를 걱정하고 세계의 정상적 진로에 대한 소망을 끝까지 품으시는 분들과 함께 다음의 두 가지 목표로 이 글을 쓰고 있음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

1. 16세기 이후 21세기까지 여전히 전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서구문화(명)를 아예 밑바닥인 근원(고대 서아시아와 이집트와 그리스가 맺은 연관)에서부터, 모든 차원(물질 및 정신문화, 정치, 사회, 윤리, 철학, 신화, 종교, 역사, 지리)에서 파헤치는 것입니다.


중(서구인)이 제 머리 못 깎는다(자기비판 못한다)
서구문화(명)의 한쪽 축이 되었던, 물질문명 3부작(법, 군대, 건축)으로 유명한 로마문명은 중립적인 것이며 누구나 배울 수 있고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의 다른 축은 물질문명을 포함한 철학, 문학, 역사, 음악, 미술 등의 총체적 그리스문화(명)인데, 이것은 서구문화(명)의 본질에 해당하며, 쉽게 이해하거나 분석하여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그 중에서 우리는 그 핵심이 되는 그리스신화와 그것으로부터 자양분을 얻은 그리스철학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 일을 할 때에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처럼, 서구인들이 서구문화(명) 자신을 오히려 더 잘 볼 수 없을 것을 예상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지금까지 그들이 이룬 성취로 보아 지나치게 우월감을 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자신에 대해 해석하고 동양인과 아프리카인을 향해 주장했던 것과 전혀 상관없는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그들의 근본을 파헤쳐야 하는 숙제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먼저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한국인들이 사대근성을 버리고 짧은 기간 동안 우리가 유럽에서 배웠던 문화(명)의 모든 방법론과 목적 등을 완전히 재평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대원군의 쇄국의 시기 이후 지난 140여년 정도의 짧은 세월동안 어설프게 서구를 복사했던 일본을 통해, 또 서구문화(명)의 막내인 미국을 통해, 배웠던 서구문화(명)를 제로로 내려놓을 뿐 아니라, 유럽인 자신들이 제시했던, 모든 탁월하다고 하는 결론들도 아무 것도 손에 쥔 것이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볼 작정을 하는 것입니다.

동양의 관점으로 그들을 비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미 가진 동양문화(명)의 관점으로 그들을 비판할 수 없는 이유는 전혀 객관적이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무엇보다도 동양의 문화(명)가 총체적 문화(명) 형성에 실패해서 21세기 세계를 주도할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자명해졌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 동양은 전제군주와 독재를 벗어난 자유를 누린 적도 없었고, 중국, 인도의 거대한 폐쇄된 두 땅덩어리가 정치적으로 지나치게 일찍 통일되었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자유경쟁체제를 발전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양이 총포를 일찍 발명해 놓고도 그것을 받아들여 경쟁적으로 자유롭게 발전시킨 서구에 압도당하여, 중국은 100여년의 수치를 당하고 인도는 아예 영국의 속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제1이동수단인 인간의 ‘다리’(보병)와 제2이동수단인 ‘말’(기병)을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제3이동수단인 ‘배’(전함)를 타고 세계를 휘젓고 다닌 서구에 압도당했습니다. 그렇기에 우주시대의 필수적인 제4이동수단인 ‘로켓’으로 직행하는 것은 동양인으로서 제3이동수단의 경험 자체가 없으므로 뱁새가 황새를 좇는 것처럼 어렵게 느껴질 겁니다.  

2. 서구문화(명)와 그 정반대편의 동양문화(명)도 아닌, 제3의 대안인 세상의 배꼽의 문화(명)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과 같이 문화(명)사를 가르는 일반적인 기준은 서양문화(명)와 동양문화(명)로 나누는 겁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순 지리적 관점에서만 관찰한 것일 뿐입니다. 즉 지금의 그리스부터 서쪽은 서양, 터키부터는 동양이라고 지구본을 놓고 선을 긋듯이 순진하게 구분하는 어리석은 실수를 그동안 많이 했습니다. 그 중간 지점을 무수히 왕복하면서 이루었던 사람들의 삶과 문화(명)에 집중하지 않았던 겁니다.

누구나 자기교의 교주인 현대인이 고대인의 종교를 제대로 비판할 수 있을까?
이 점을 보기 위하여 우선 21세기의 현대인, 서구인의 우월의식에 근거했던 과거의 판단을 버려야 합니다. 그 중에 ‘종교’란 한물 지난 것으로, 또 현대를 비종교, 무종교 사회로 간주하는 어리석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종교에는 교리체계, 예배, 조직과 같은 ‘외적 요소’도 있지만, 각 사람의 마음, 생각, 판단, 행동을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내적 요소’가 있습니다. 사실상 중요한 것은 바로 이 후자이지만, 이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눈에 잘 드러나는 전자만을 보고 종교를 판단하기가 매우 쉽습니다. 또 무엇보다도 ‘종교를 넓은 차원에서 정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로 앞에서 말한 내적 요소를 더 구체화한 것으로, 만일 증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어떤 것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데올로기, 생명과 죽음에 대한 확신, 세계관 등)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종교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런 체계를 자신의 내적인 확고한 기준점으로 삼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보라고 주장하며 정치화하는 좌파도 종교인이요,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우파도 종교인인 셈입니다. 현대 많은 이데올로기 세력들이 자신은 철저히 객관적이라 주장하며 과거의 종교들뿐 아니라 자신과 다른 세계관들을 가짜로 판단하는데, 일단 자신이 정치적 세력을 잡으면 마녀사냥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바로 이런 현대종교 자체가 가짜임을 증거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래와 같은 세 가지 기준을 가지고 평가한다면 말입니다 : 
  1) 과연 어떤 고대와 현대의 종교가 ‘궁극적’으로 옳으며,
  2) 인간 삶과 세상을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3) 또 ‘역사적’으로 나은 것인가를 만인 앞에 비교하는 것입니다.

독자적 종교문화(명)체계인 3대 절대종교의 문화(명)
우리는 이미 동양문화(명)에서 인류가 동쪽으로 뻗어나가면서 종교가 변질되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또 우리는 앞으로 서양문화(명)에서 어떻게 종교가 변화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세상의 배꼽에서 종교가 어떻게 전개(발전 혹은 후퇴)되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세계의 3대 절대종교의 기원인 구약성경의 종교, 즉 고대이스라엘에 실제로 구현되었던 종교가 어떻게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로 전개되었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이어서 그 종교들이 각각 어떻게 문화(명)체계를 발전 혹은 후퇴하게 만들었으며 또 앞으로 만들 것인지를 보려고 합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이 3대 절대종교를 신봉하고 그것을 따르는 문화(명)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 거의 모든 대륙에 걸쳐 있으며 전 인류의 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이 사실은 세상의 배꼽에서 기원한 이 3대 절대종교와 그것들이 만든 문화(명)는 이때까지의 서양문화(명)와 동양문화(명)가 별개의 것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단순무식한 지리적 관점에서 문화(명) 단위를 둘로 나누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구분인가를 점차적으로 이 글을 통해서 드러날 것입니다.

서양문화(명)=기독교문화(명)라는 등식은 허구다!
‘서양문화(명)가 바로 절대종교의 문화(명)이다’라는 일반론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되면 바로 기독교, 유대교와 동일한 기원에서 출발한 이슬람교와 그 문화(명)를 어거지로 동양문화(명)에 쑤셔 넣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 서양문화(명)가 기독교/유대교문화(명)와 그리스-로마문화(명)로 이원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잘 알려졌지만 아주 애매무지하기 짝이 없는 일반론 역시 다시 고려해야 합니다. 나아가 서양에 들어간 기독교/유대교가 과연 그 근본이 되는 구약성경(고대이스라엘)의 종교와 문화의 진정한 계승과 발전이었던가를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이 문제를 앞으로 충분히 다룰 것이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계승과 발전’이 아닌, 기독교의 경우는 ‘후퇴’였으며, 유대교의 경우는 ‘유아시절 고착화’에 머물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문화=기독교문화(명)이라는 등식은 허구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이렇게 ‘후퇴’했습니다.
구약성경의 종교와 문화(명)는 ‘거룩한(제한된) 공간(성전)’과 ‘거룩한(특수한) 시간(안식일)’개념이 명확했습니다. 이것은 혈통적으로 제한된 아브라함의 후손만이 그 백성이 되는 상황 속에서 정해진 규율이었습니다. 하지만 구약성경 자체가 이미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을 초월하여 모든 열방의 백성들이 전쟁무기를 포기하고 (영적)예루살렘에 모여들어 토라를 배울 미래를 예언하고 있습니다(이사야서 2:2-4). 즉 이미 혈통적 백성 개념이 초월된 것을 예언하고 있는 셈이지요. 이것을 기독교인들이 ‘주’(主)로 섬기는 예수는 정확하게 적용하여, 새 시대에는 인간 남녀의 욕정이나 혈통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백성이 아니라 영으로 탄생하는 새로운 백성이 일어날 것을 선언하였습니다(요한복음 1:12, 3:5). 이어서 성전으로 제한된 종교적 공간을 철폐하고‘아버지의 뜻을 따라,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 바로 성전이 된다고‘ 승화된 공간’개념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별도의 예배를 드리지 말라고까지 말한 겁니다(요한복음 4:21). 이렇게 공간의 개념으로서의 성전은 초월되어서, 예배의 본질이 이루어지는, 즉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초월적 성전임을 말한 겁니다. 
바로 이 원리를 종교적 시간관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즉 7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안식일이라는 시간 개념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는 본질이 훨씬 더 중요하게 된 겁니다. 예수 자신은 매우 의도적으로 당시의 유대인이 가진 경직된 해석을 뒤엎기 위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을 서슴치 않았고, 그들을 향해 매우 공격적인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 ‘아버지께서 (쉬지 않고)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왜!’ (요한복음 5:17).
그렇지만 실제 기독교 역사를 살펴봅시다. ‘로마교’나 ‘동방교’(러시아, 그리스 정교)가 성당을 스테인드글라스로 화려하게 꾸미고 예배에 향을 피우는 외적인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리고 정치력을 장악하려고 끊임없이 황제, 국왕과 싸웠던 비참한 ‘로마교’의 역사나, 그것과는 정반대로 완전히 황제와 정권의 시녀처럼 되어 역사와 사회를 변혁시키지 못하고 가장 비참한 농노들이 고통 받는 것을 그냥 볼 뿐 아니라 거의 70여 년 동안 역사상 최악의 (공산)정권을 수립하게 만든 동방교인 ‘러시아 정교’의 역사는 기독교가 확실히 ‘후퇴’한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의 기독교인 개신교는 여전히 어거스틴의 (신)플라톤주의를 따라서 세상나라와 하나님나라를 이원적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의 세상에 나가 일을 하며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기독교인은 전무하고, 주말에만 자기들끼리 모여 예배드리며 스스로를 신의 백성, 선민, 거듭난 자라고 착각하는 ‘후퇴’한 기독교의 모습을 보일 뿐이었습니다. 외부에서는 기독교를 개인의 마음의 종교로만 인정할 뿐인 겁니다.     

유대교는 이렇게 ‘유아시절 고착화’에 머물렀습니다.
현대 유대교의 기초는 이미 예수 시절 이전부터 존재했고, 그 이후에 형성된 탈무드를 중심으로 점점 더 고착화되어갔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10지파는 북조 이스라엘이 망할 때(BC 722)에 공중분해 되어버렸습니다. 이어서 남조 유다에 남은 두 지파인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바벨론에 의해 망한 후(BC 586), 포로로 끌려가 살다가 페르샤의 고레스(Cyrus)대왕에 의해서 해방을 얻어 귀국했습니다(BC 539). 이들은 다윗, 솔로몬의 종교와 정치가 일체화된 영광스러운 왕국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고 단지 재건한 성전을 중심으로 소박한 종교생활만을 영위할 뿐이었습니다. 이때 이들이 집착한 것은 당시 세계의 공용어인 아람어를 쓰지 않고 그들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쓰는 일과, 안식일을 확실하게 지키는 일, 개인적 성결을 유지하는 법등이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자신들이 망한 이유가 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구약성경의 법의 원리, 정신(언약적 공의와 언약적 사랑/자비)보다는 법 조항 자체에 목을 매었으며, 그것을 잘 지키기 위한 아주 세부적 법들을 만들어간 겁니다. 그리고 오경이 구약성경에서 우선적 위치를 차지하긴 하지만 그것은 고대 이스라엘 종교의 초기단계에 형성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 이후 천년 이상이 흘렀으며 그동안 하나님 나라는 엄청나게 변화되었고, 심지어는 전혀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예언까지 주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유대교는 이런 후대의 성경(역사서, 예언서, 시가서)의 중요성을 뒤로 미루고, 절대적으로 오경에만 집착한 것입니다. 법 항목이란 세부적일수록 시대와 역사에 매일 수밖에 없다는 역설적인 진리는, 세상법에도 하나님 나라의 법도 사실입니다. 시대가 변화됨에 따라 그 법의 원래 정신을 살려서 새롭게 제정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거부하고 철저히 천 년 전의 세부적 법조항 자체를 시대의 흐름과 상관없이 그대로 가져오려고 한 겁니다. 그렇지만 심지어 오경 자체 속에서도 모세가 40년 일한 것으로 치면 그 초기의 법(출애굽기 법)과 후기의 법(신명기 법)이 내용이 조금씩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는 이런 점에서 나타나는 유대교의 위선을 아주 명확하게 드러내었습니다. 유대인이 싫어하는 것이 안식일에 ‘노동’하는 것인데, 그 일 중의 하나가 침대 매트리스 같이 무거운 것을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예수가 38년 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병자를 불쌍히 여겨서 고쳐준 것에 대해서 유대인이 시비를 건 이유는, 단순히 안식일에 깔고 있던 매트리스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요한복음 5:1-18). 안식일법의 정신이 사람에게 자유, 해방을 주는 것인데, 자신들이 정해놓은 안식일에 무거운 매트리스를 들고 걸어간 노동을 행하도록 했으므로 예수를 정죄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습니다. 이런 점들이 유대교가 구약성경의 종교에서 ‘유아시절에 고착화’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앞으로 서양문화(명)의 기원인 그리스문화(명)과 철학을 다음과 같이 다루고자 합니다 :

  1) 이슬람교가 어떻게 구약성경의 종교에서 벗어나 심각하게 ‘왜곡’되었는지
  2) 구약성경의 종교와 성경, 고대서아시아의 종교/신화, 그리스 종교/신화의 상관관계
  3) 그리스 신화와 그리스 철학의 상관관계
  4) 그리스 철학과 서양철학의 상관관계
  5) 제3의 문화(명)형태로 세상의 배꼽의 문화(명)란 무엇이며 얼마나 가능한가?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010-6844-0609/segensong@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18>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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