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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 한판, 인생 두판> 저자, 한국 최초의 화덕피자 ‘디마떼오’의 이원승, 몽키호테를 만나다.

2019년 11월호(121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9. 12. 15.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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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김미경이 만난사람]

<피자 한판, 인생 두판>저자,
한국 최초의 화덕피자 ‘디마떼오’의 이원승,
몽키호테를 만나다.

내 평생을 뒤흔든 첫 만남, <빨간 피터의 고백>
중학교 때는 대학생들과, 고등학교 때는 일반인들과 함께 연극을 할 정도로 연극에 푹 빠져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추송웅의 모노드라마 <빨간 피터의 고백>을 본 뒤 저는 배우가 되겠다고 다짐하며, 칼에 베인 듯 찔림을 지니게 됩니다. 연극은 아프리카에서 잡힌 원숭이가 살아남기 위해 이것저것 배우던 중 말이 터져 나오고, 어느 날 서커스 스타로서 학술원 회원들 앞에서 자기 삶을 보고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을 무대화한 것이지요. 대전에서의 그 공연은 감수성 어린 청소년들을 단숨에 출렁이게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배우가 숨을 멈추면 관객도 모두 숨을 멈추고, 다시 숨을 쉬면 관객도 따라 숨 쉬는 모습이 저에게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배우 한 사람이 압도하는 현장에서, 다양한 사람을 집중시키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배우라는 존재를 온몸으로 느꼈던 특강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앞으로 서야 할 무대에 대한 욕망으로 화산처럼 휩싸였습니다.

연극배우에서 개그맨으로
1982년, 군 제대 후 중앙대 연극 영화과에 복학했습니다. 그해 6월에 열린 MBC 개그맨 콘테스트에서 동상을 받아 최병서, 황기순 등과 함께 데뷔했어요. 신문에 실린 수상자 명단을 보신 아버지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중대 연영과에 이성규(본명)가 너 말고 또 있느냐?” “아니요. 아버지 그게 접니다.” 아버지는 연극을 하기로 했으면 연극을 해야지, 왜 다른 길로 가느냐며 줏대 없는 놈이라고 무척 꾸짖으셨죠. 처음에 제가 연극하는 것도 반대하셨던 아버지셨기에 화를 내시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부자 관계는 나빠졌지만, 방송 운은 좋아서 동기들 가운데 가장 먼저 TV에 얼굴을 내밀고 출연한 지 3주 만에 고정 자리를 꿰차게 되었습니다. 나이와 노력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돈을 거머쥐며 승승장구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도전! 지구탐험대>, 두 번째 내 인생을 흔들다.
1997년 6월 17일, <도전! 지구탐험대> 촬영차 이탈리아 나폴리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저는 나폴리의 오래된 피자집에서 마르게리타 피자 만드는 법을 배워오는 미션을 맡았습니다. 출발 전, 국내 M피자를 방문해 피자 만드는 법을 배웠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찾아간 피자집이 바로 지금 제가 운영하는 피자집의 이름이기도 한 ‘디마떼오’(마태라는 이름의 성)입니다. 이탈리아에서 열린 G7 회의 때 빌 클린턴이 방문해 유명해진 곳이자, 70년 역사의 전통 있는 피자집이었습니다. 어쨌든 문제는 M피자에서 배운 피자 만드는 법이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게 돼버린 겁니다. 그 이유는 참나무 장작화덕에서 굽는 나폴리식 피자와는 근본부터 달랐습니다. 이 당황스러운 마음을 빨리 추스르고, 붙임성 있게 이탈리아 피자이올로(Pizzaiolo, 피자를 전문으로 만드는 요리사)들과 친하게 지내며 열심히 배웠습니다. 피자 만드는 일이 생각보다 재밌고, 무엇보다 맛이 일품이었죠. 전에 전혀 경험하지 못한 순수한 맛이랄까요? 저는 촬영을 마친 후, 혼자만의 원대한 꿈을 품고 그들에게 다시 오겠다는 말을 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지금까지의 활동을 스크랩해놓은 앨범들을 큰 가방에 넣고 그 누구와도 상의 없이, 예산 계획도 없이 손에는 항공권, 마음속에 확신을 쥐고, 이탈리아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디마떼오 로열티를 요구하던 사장, 바로 그를 감동시키다 
나폴리 ‘디마떼오’를 찾아가 내가 온 진짜 이유를 말하자, 사장은 안색이 변했습니다. 그는 계약을 원한다면, 로열티를 내야 한다고 버텼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저는 오히려 한국에 ‘디마떼오’을 알리는 것이니 홍보비를 받아야 하지만 서로 퉁친 것으로 하자고 했지요. 사장은 ‘뭐 이런 놈이 다 있나’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날부터 얼굴에 철판을 깔고 ‘디마떼오’에 출근해 직원들의 일손을 도우며 함께 어울렸습니다. 사흘 뒤 사장이 결혼식에 함께 가자고 하더군요. 이탈리아 결혼식이 궁금했던 저는 바로 따라나섰습니다. 과연 이탈리아 결혼식은 한국의 판에 박은 결혼식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영화<대부>에서처럼 종일 잔치가 이어졌습니다. 사장은 낯선 동양인을 궁금해 하던 하객들에게 “한국에서 피자 배우러 온 친구인데, 개그맨이래”하며 저를 소개했습니다. 그랬더니 “개그맨? 그럼 웃겨봐”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난생처음 말이 통하지 않는 관객 앞에서 만국 공용어인 바디랭귀지로 팬터마임을 무려 두 시간이나 했습니다. 바로 이 무대를 보고 ‘디마떼오’ 사장이 감동했습니다. 앨범 속의 저를 그곳에서 확인한 것이었죠. 

대한민국 화덕피자의 문익점 
‘디마떼오’의 한국 독자 사업권 계약서에 사인하는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나라 선조 중에 문익점이라는 분이 중국에서 붓 뚜껑에 목화씨를 숨겨왔듯이, 당신이 해주는 이 사인이 대한민국 화덕피자에 씨를 뿌리게 될 것이다”라고 말이죠. 사실 그 당시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했는데, 대학로에서 23년을 지내고 보니 화덕피자의 씨가 뿌려졌고, 우리나라에 나폴리 화덕피자가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한국 최초 나폴리 화덕 피자집 ‘디마떼오’(Di Matteo)를 열다  
한국으로 돌아와 사업계획을 이야기했을 때 동참하기로 한 사람은 네 명이었습니다. 당시 연극을 연이어 제작하느라 밑천이 다 떨어진 상태라, 어렵사리 가져온 나폴리 피자 사업권을 살리려면 투자자를 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애초에 예상한 인테리어 비용이 훌쩍 넘어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IMF 위기까지, 투자를 약속했던 친구들은 하나 둘 손을 들고 떠났습니다. 유일하게 남은 투자자는 ‘정태봉’이라는 고등학교 친구였죠. 급전이 필요할 때마다 도와주던 친구였는데, 그날도 자금이 부족해 찾아가니 선뜻 흰 봉투를 건네주더군요. 바로 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겨우 혼자 있을 때 열어보니 웬걸 봉투 안에는 지폐 한 장, 아니 동전 한 푼도 없었습니다. 대신 정호승의 <수선화에게>라는 시가 적힌 종이 한 장이 달랑 들어 있었습니다. 먼저 강해지고 스스로 깨우치라고, 친구는 돈 대신에 편지를 준 것이죠. 1998년 1월 9일, 드디어 저는 천신만고 끝에 한국 최초의 나폴리 화덕 피자집‘디마떼오’를 열었습니다. 돈보다 시 한 편이 더 커다란 힘을 발휘했지요.(웃음)

이리 어렵게 피자집은 열었건만…
저는 화덕피자 업계에서 너무 일찍 일어난 새였습니다. 지금이야 화덕피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당시에는 “뭐야, 이게?”하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죠. 100명 중 98명은 참나무 장작 화덕에서 구워낸 ‘디마떼오’ 피자를 낯설어했습니다. 심지어 테이블에 내온 피자를 보고 화를 내며 돌아간 사람도 있었습니다. 3개월 동안 판매한 피자보다 나폴리 출신 피자이올로가 먹은 피자가 더 많을 정도이니 사업을 접을까도 했습니다. 하지만 빚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쉽게 접을 수도 없었습니다. ‘디마떼오’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이제 내 삶의 무대에서 퇴장할 시간이라며 죽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나를 도와준 태봉이에게 마지막 통화라도 하자는 생각에 휴대전화 버튼을 눌렀습니다. 울음을 삼키며 “태봉아…. 잘 있어!”하며 말을 몇 마디 이어가는데 “야! 코미디언 생쇼 하지 말고! 저녁 일곱 시 반에 만나! 나 지금 바빠!” 뚝 하고 전화가 끊어졌습니다. 순간 일곱 시 반 약속이 기다려지더군요. 허무하게도 친구의 한 마디가 제 생사를 갈라놓았습니다. 

신용불량자 취업의 우선적 기회, 경제공동체 ‘디마떼오’
‘디마떼오’는 갑과 을이 있는 비즈니스 직장이 아니라, 커뮤니티 즉 경제공동체입니다. 그동안 돈을 벌어 빚을 다 갚고 난 후, 제가 처음으로 했던 것은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디마떼오’근처에 집을 마련했습니다. 세를 받지 않고 집을 제공하여, 직원들이 생활하며 저축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무엇보다 직원들을 뽑을 때 신용불량자들에게 우선적인 기회를 주었습니다. 대신 중요한 조건을 달았죠.‘디마떼오’에서 마련한 숙소에서 지내고 5년 안에 신용불량에서 벗어난다는 약속이었습니다. ‘디마떼오’가 갱생의 터전이 된 겁니다. 직원이 아프면 우리 동네 병원인 서울대병원에 함께 갑니다.(웃음) 새벽 두 시라도 응급실에 찾아가 옆에 있어 줄 때, 직원들은 ‘아! 나를 가족처럼 대해주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면 자연스럽게 가족의 한 일원이라는 마음으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디마떼오’ 23년 동안, 10년 이상 근무한 직원들이 예닐곱 명 됩니다.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면 다른 곳에 가서 본인의 피자집을 열기도 합니다. 이탈리아 친구들도 이런 가족적인 분위기를 알고 9년, 17년씩 근무하고 있습니다. 

본래 시골 쥐, 서울 쥐로 착각하다
‘디마떼오’를 다른 곳에서도 오픈하자며 유혹하는 곳이 많았습니다. 에버랜드, 현대백화점 본점 등등. 하지만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100개의 피자집보다 100년 가는 피자집을 하겠다는 것이 목표였으니까요. 그런데 남이섬에 매장을 내자고 하던 강우현 대표는 뭔가 달랐습니다.“늘 정해진 길만 걸을 것이 아니라, 모든 발상 자체를 바꾸고 허물어 새롭게 시도해보자”며 대한민국에 매장 하나, 남이공화국에 매장 하나를 내보자고 하더군요. 그의 생각이 독특하고 신선해서 고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남이 공화국 ‘디마떼오’점을 열면서 대학로와 남이섬을 분주히 오갔습니다. 덕분에 일주일에 이틀은 가평에 내려가 황토방에 머물며 글도 쓰고, 미래도 구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시골의 매력에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했지요. 이렇게 가평의 삶에 익숙해지면서 ‘나는 시골 쥐인데, 서울 쥐처럼 착각하고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릴 적 시골에서 밤이 되면 별을 보며 길을 걷고, 가까이 있는 무덤을 보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도 하고, 무엇보다 사계절 변화를 만끽하며 살았는데, 그것을 잊고 콘크리트에서 편한 생활 하는 서울 쥐로 살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세 명의 아이들도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에 미치자 바로 가족 설득 작전에 들어갔습니다. 개를 키우고 싶지 않으냐 등의 유혹을 하며 전략적으로 아이들을 설득해갔죠. 하지만 가족들이 가평으로 이사한다 해도 아이들 살아가는 곳이 그냥 시골이어서는 안 되고 문화가 있는 곳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2012년의 가평은 다른 시골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콘텐츠가 많이 부족했습니다. 

가평, ‘연극 도시’를 그리다
가평에 터를 잡고 저는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했습니다. 학교로 찾아가 선생님을 만나 연극 관련 특강을 해주고 싶다고 하자, 단발적인 행사보다 지속적인 프로그램으로 만들고 싶다는 학교 측의 요구에 따라 연극반을 만들었고, 가평의 마장초등학교 연극반 선생이 되었습니다. 초기부터 연극을 가평군에 있는 초·중·고 전체로 확대하려는 계획과 가평에 연극인 마을을 조성하겠다는 큰 그림을 가지고 국회의원, 군수, 교육장, 사단장, 지역 지도자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설득했습니다. 이 계획에 큰 영감을 준 스승은 오태석 연출가였습니다. “일본의 ‘스즈키 타다시’라는 연극 연출가가 30여 년 전에 세운 ‘도가 연극마을’이란 곳이 있네. 가평에도 치즈 마을을 만들어서 돈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연극마을을 짓는 건 어떨까? 이 지역 사람들에게도 가치있는 일이 될텐데 말야.” 그렇게해서 사업이 하나 둘 씩 구체화되는 가운데, 가평의 국회의원과 군수와 함께 일본 도야마현 도가 연극마을을 벤치마킹 하기로 했습니다. 연극 축제인 ‘도가 페스티벌’을 만들어 연간 13만 명의 방문객이 찾는 명소가 된 인구 600명의 작은 마을을 둘러본 국회의원과 군수는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 했습니다. “그럼 가평에는 어떤 연극마을을 구현하는 게 좋을까요?”저는 기다렸다는 듯이 “생활연극, 즉 커뮤니티 연극을 해야 합니다.”라고 바로 대답을 드렸지요. 일본 도가 연극마을은 전문 배우들이 모여 세련된 연극을 선보이지만 우리는 다르게 접근해야 했습니다. 배우들을 초청하면 전문성은 있으나 재정이 많이 드는 문제가 있어, 우리는 가평 주민들이 주도하는 참여형의 자연스러운 생활연극을 선보이며 연극 문화도시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2014년 드디어 ‘가평을 무대로 주민이 배우로’라는 슬로건으로 <어설픈 연극제>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가평군과 세계 3대 축제인 이탈리아 <까르네발레 비아레조>와 MOU
매년 1월에 이탈리아를 방문해 ‘디마떼오’에 필요한 식자재 수입을 합니다. 2015년 이탈리아를 방문하는 동안 <비아레조(Viareggio)축제> 재단과 업무협약을 추진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혼자보다는 대사관 지원을 받는 편이 효과적일 듯싶어 대사관을 찾아가 30분이 넘도록 <어설픈 연극제>에 대한 그간의 활동과 계획을 설명했습니다. 제 말을 듣던 대사관 참사들의 표정이 점차 심란해지기 시작해지더군요. “그래서 어떤 지원을 원하시는 거죠?” “당연히 MOU 체결을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지요.” 두 참사는 대답 대신 잘못된 점을 지적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전혀 도움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착잡한 마음과 좌절 속에 오기가 생기더군요. 그런데 도움은 전혀 다른 곳에서 왔습니다. 18년 전 이탈리아로 건너와 활동하고 있는 조각가 박은선 선생을 소개받아 <비아레조 축제> 알렉산드라 사무국장과 질베르트 예술감독을 만났습니다. 이분들은 가평에서 거대 인형축제를 열고자 하는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MOU 체결 역시 순풍에 돛 단 듯 순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축제 개최와 MOU 모두 민간인이 앞장서 주도하고 성과가 가시화되자 업적을 놓고 일종의 주도권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2015년, 142년 전통의 <비아레조 카니발>을 응용한 거대 인형축제가 대한민국 가평에서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축제를 내려놓은 까닭
그동안 축제를 진행하기 위해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나 자신과 사람들에게 느낀 크고 작은 실망감이 조금씩 쌓여갔습니다. 행정, 절차, 감정적인 문제로 갈등을 빚기도 했지요. 무엇보다 가장 힘든 순간은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저의 옛 모습이 발견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것은 덮고 싶은 과거의 내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돈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니라면서 돈을 헤아리는 모습, 의리를 목숨처럼 여긴다면서도 결국 자신을 위해 늘어놓는 변명, 박수 받을 때는 펴고, 원망 들을 때는 접는 날갯짓 등등. 점점 왜 해야 하고,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하는 원론적인 고민이 많아졌습니다. 이후, 종교적으로 회심하게 되면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여러 상황 속에서 4회 <어설픈 연극제>의 총감독을 내려놓았습니다. 그 후 안타깝게도 2017년 <어설픈 연극제> 개최가 무산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지금도 가평의 광야 생활은 제 가슴 깊숙이 남아 있습니다.

몽키호테(Mon Quixote)의 바람
이원승으로 살아온 ‘나’의 삶이 회심 이후, ‘그’의 삶으로 바뀌도록 힘을 다하려고 합니다. 남들이 지어준 몽키라는 별명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합친 몽키호테(Mon Quixote)가 그의 이름입니다. 환갑인 내년부터 ‘피자 전도여행’을 떠나려 합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모든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듯’, 피자 트럭을 만들어 교회, 성당, 고아원을 다니려 합니다. 찾아오신 예수를 증거하고, 제 아내는 찬양하면서 피자를 나누렵니다. ‘이 피자는 우리를 배부르게 하지만, 생명의 떡인 예수의 말씀은 우리를 목마르지 않게 함’을 증거 하는 삶을 소망합니다.


‘디마떼오’이원승 대표의 눈은 맑았습니다. 대화에 집중하며 상대방을 배려하는 모습이 이미 몸에 밴 듯했지요. 저와 마주 앉아 본인이 가져온 노트에 필요한 것들을 기록하는 모습은 더욱 남달랐습니다. 그 노트는 마치 이원승 대표의 보물 같았죠. 말은 씨가 되고 행동은 열매를 맺는다며 인생은 연극이므로 우리 모두는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고 한없이 다채로울 수 있는 삶의 어엿한 주연배우라고 했습니다. 스마트폰, TV가 없는 생활을 하는 이원승 대표는 도리어 산만하지 않아 자기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하루하루를 하나의 인생처럼 살아가는 자세로, 23년 동안 한 자리에서 ‘디마떼오’를 지켜낸 이원승 대표를 비롯한 직원들에게 힘내라는 응원을 아낌없이 보냅니다. 

 

대학로 다마떼오 대표 이원승 
02-747-4444, www.dimatteo.co.kr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21>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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