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긴 긴 나라 ‘칠레’(1)

2020년 1월호(123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1. 23. 18:14

본문

긴 긴 나라 ‘칠레’(1)

 

월간지 <소년중앙>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이’ 기사를 초등학생 때 읽으며, 기사에 나오는 7대 불가사이 중 하나인 ‘모아이’ 상이 있는 이스터 섬에 꼭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런 이스터 섬이 제가 지금 살고 있는 나라, 칠레의 영토라는 사실을 몰랐다가 20년 전에야 알았지 뭡니까? 


칠레교민이 되기 전
30년 전인 1989년에 형이 원래의 계획인 캐나다 이민을 포기하고 칠레로 이민을 갔습니다. 편지로 전해 오는 그곳 소식에서 풋풋한 시골정서나 남미사람들의 별난 성격들을 엿볼 수 있었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불편한 나라에서 잘도 사는구나!’정도였지요. 
그러던 중 독일에서 성악을 공부하던 여동생과 천문학을 공부하던 매제 내외의 강력한 권고로 27년 전인 1992년에 클래식 기타를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가게 되었죠. 유럽하면 프랑스, 영국, 스위스 아니면 독일 아닙니까! 
그토록 염원했던 나라 독일, 또한 유럽 선진국의 최전선에 있는 나라 독일에 갔으니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돈을 벌려고 간 것과는 달리 예술이라는 드넓은 세상에 던져진 그 자유함이라니… 그러니 칠레라는 나라로 이민을 간 형을 볼 때, 다만 쾌적하게 살기 위해 돈을 다소 쉽게 벌 수 있다는 장점 하나로 이국에서 사는 불편을 참겠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형네 가족을 생각할 때마다 안쓰러웠지만, ‘인생은 그런 거지 뭐.’라고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지고지순한 예술, 그 중에 최고인 음악가의 세계에 뛰어들었으니 나나 잘하자면서 말입니다.

뜻대로 안 풀린 독일유학
잘 풀릴 줄 알았던 독일유학생활은 아내의 ‘태클’로 중도 포기해야 했습니다. 평생 공부할거냐며, 싹수가 없어 보인다고 당장 칠레로 오라했습니다. 의외로 순진한 저는 아내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말 세 달 뒤에 칠레로 들어갔습니다. 왜냐하면 빨리 안 들어오면 이혼한다했기 때문이었죠. 학습지회사 공문수학(구몬수학)에서 일하던 아내는 학부형들이 IMF로 인해 소위 ‘긴축재정’의 카드를 쓰는 바람에 돈벌이가 시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형수가 날이면 날마다 칠레가 낙원이라며 이민 오라고 꼬드겼으니, 확~ 저지른 게 ‘칠레로 이민가자!’였던 거죠. 
하지만 제가 속까지 착한 남편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칠레에 가서 아내가 자리 잡게 될 때까지 도와준 후, 다시 독일로 돌아와 학업(최종 지휘자 공부)을 이어가려했습니다. 아니, 예술가가 되겠다고 직장생활을 때려 친 사람이 뭐가 좋다고 칠레에서 교민이 되고 싶겠습니까!
지금에 와서야 운명은 절대 내 생각대로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어느 정도까지는 내 의지대로 되는데 안 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내 뜻대로는 되지 않지만 주어진 상황을 기꺼이 감수하고 기쁨으로 살아가면 도리어 평화가 온다는 것을 말입니다. 물론 내 경우는 “기꺼이 감수했다기 보다는 억지로 감당했는데 결과가 넘 좋은 거 있죠”라고 해야겠지요.

아무튼 칠레에 입국하다
산티아고 공항에 형이 마중 나왔을 때, 형은 중형 승용차를 몰고 나왔습니다. 한국에 있을 땐 우리 식구 중 누구라도 차가 없었으니 ‘칠레가 살기는 좋은 나라 맞나보다!’ 했지요. 그러거나 말거나 저는 다시 독일로 돌아갈 것이니 잠깐 여행 온 여행자의 기분이었습니다.
공항에서 시내로 나가는 가도 양 옆엔 남미의 상징인 야자수 나무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는데, 이 모습이 어찌나 멋졌던지 잠시 혼돈이 왔습니다. 게다가 완전 시골스러울 줄 알았던 산티아고에 멀쩡히 큰 건물들이 있다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고요. 그만큼 칠레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길고도 긴 나라’라는 것과 ‘몹시 시골스러울 것이다’라는 정도의 생각이었으니까요. 독일이 최선진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시에 그닥 삐까번쩍한 건물들이 없고 대개가 다 나지막한 빌딩들이었으니, 도리어 산티아고의 건물들을 보고 ‘빈민국에 웬 고층빌딩이여~’라며 당황했던 거죠.

형네 집에서의 더부살이
1999년 7월에 두 아이를 데리고 칠레에 도착한 아내는 이미 형네 집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9월에 도착했으니 아내가 이민 선배가 되었고, 그러니까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편인 제가 죽어라 노력해도 아내인 색시의 능력을 넘지 못하는 희한한 경험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참고로 이민생활에서는 대부분 여자들이 훨씬 더 적응을 잘하고 돈도 악착 같이 잘 번다고 알려져 있더군요.(살아보니 이 말이 맞음) 형네로 부터 독립을 해야 사람 구실하겠다 싶어 제가 칠레 도착한지 채 한 달이 못 되어 이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독립하고 보니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초기에 많은 교민들이 친절하게 다가와 도와주었는데, 알고 보니 장사가 안 되는 자기 가게나 자기 형제들의 가게를 떠넘기기 위한 친절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형은 “야! 따지지 말고 그냥 가게 하나 잡고 그냥 팔면 되는 거야!”하는 거예요. 사실 이런 생각은 저와 맞지 않을뿐더러 또 이렇게 살 수도 없었습니다.


2월호에 두 번째 스토리가 연재됩니다.

 

칠레에서 노익호
melquisedec.puentealto@gmail.com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23>에 실려 있습니다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는 

  • '지역적 동네'뿐 아니라 '영역적 동네'로 확장하여 각각의 영역 속에 모여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스토리와 그 속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문명, 문화현상들을 동정적이고 창조적 비평과 함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국내 유일한 동네신문입니다.
  • 일체의 광고를 싣지 않으며, 이 신문을 읽는 분들의 구좌제와 후원을 통해 발행되는 여러분의 동네신문입니다.

정기구독을 신청하시면  매월 댁으로 발송해드립니다.
    연락처 : 편집장 김미경 010-8781-6874
    1 구좌 : 2만원(1년동안 신문을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예금주 : 김미경(동네신문)
    계   좌 : 국민은행 639001-01-509699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