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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항해 그리고 로맨티스트

2020년 8월호(130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0. 10. 4.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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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문법, 요트이야기 8]

 

야간항해 그리고 로맨티스트

 

밤하늘에 가득히 빛나는 별들과 바람의 힘으로 시속 10킬로 남짓 물살을 가르며 고요히 나아가는 배, 그리고 그 물살에 부딪혀 빛을 산란하는 수면 위 플랑크톤들의 아름다운 한 장면을 좋은 광각 렌즈로 무척이나 담고 싶었지만, 이처럼 낮은 조도에서 인공의 렌즈로 이 광경을 붙들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기술이 아무리 크게 발달한다 한들, 인간의 눈 이외에는 확인할 방법이 없는 아름다운 장면들이 항해 중간에 이렇게 널리고 또 널려 있었다. 바다 위에서 달빛에 빛나며 반짝이는 저 파도의 높고 낮음과 저 무늬를, 저 구름 사이의 낮은 빛들이 만들어내는 그 직관적 아름다움들을 어떤 예술이, 또 어떤 장치가 잡아내고 또 재현할 수 있을까? 


몇 년간 물 위에서 사진을 찍으며 내가 사람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사진 속 인물들이 더 아름다운 이유는 이 큰 렌즈들이 여러분의 얼굴이 반사하는 빛을 더 섬세하게 잡아내기 때문이에요. 인간의 눈보다 이 렌즈가 더 훌륭해서 아무리 작은 빛일지라도 미세하게 잡아내 더 아름답게 표현하죠.”
항해 속에서 나는 나의 이 말이 크게 틀렸음을 몇 번이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오직 인간의 눈으로밖에 확인할 수 없는 저 낮은 은빛 조도 속 밤하늘의 달과 별, 그리고 이 빛을 반사하는 저위도 지역의 높이 솟아오른 뭉게구름의 부피감. 밝은 행성과 별빛들을 반사하며 조용히 반짝이는 물길의 아름다움. 이 물의 세상에 현존하는 아름다움들은 항해가 여전히 살아있고, 또 바다에서의 이런 모험들이 인간에게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스스로 웅변하고 있었다.
해가 지고나면 서편 하늘에 유난히 반짝이는 금성과 북쪽 하늘의 북극성, 남쪽의 남십자성 등 몇몇의 밝은 별들은 스스로 물길을 내어 반짝이며 나의 눈 속을 한아름 빛으로 채워주었고, 나는 조용한 피아노 음악을 들으며 그 아름다움에 취해 밤이 밤이 아닌 듯, 낮에 있었던 항해의 고단함과 불편함들이 한 순간에 씻겨나가는 것을 느꼈다. 어떤 장면들은 지상에는 표현할 단어가 없이 너무 기이하고 아름다워, 일종의 누미노제(Numinose)적 체험들이 눈앞에 펼쳐져 나는 다만 조용히 찬양을 읊조리며 다윗의 시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항해는, 인간들에게 눈앞에 보이는 날 것의 자연 그 아름다움들만으로 인간을 고양시키고 겸손하게 만드는, 여전히 유효한 경험이다. 세상에 태어나 39년 만에 처음 보게 된 장면들. 선장님이 말씀하신 태평양 한가운데 말 그대로‘쏟아지는 별의 바다’는 어떤 모습일까… 글을 메모하고 있는 지금 남십자성이 멀리 홀로 바다에 비춰 일렁인다. 재연한 사진, 영상 등 디지털 기기들로는 확인할 길이 없는, 오직 눈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이 태초의 아름다움들을, 이 감사한 시간들을, 나는 감사히 살아냈다. 


수빅 마리나를 향하는 마지막 밤. 손쉽고 간편한 오토파일럿이 이시가키 출항 때부터 문제를 일으키더니 마지막 구간을 앞두고 그믐 새벽에 멈춰버렸다. 새벽에 교대를 위해 깨어나 보니 김선장이 나침반을 보며 매뉴얼 항해를 하고 있다. 이럴 때 방법은 오직 하나, 눈앞에 변하지 않는 푯대를 시야 속에 가두고 그것을 향해 나아나가는 것뿐이다. 바람은 20노트로 비교적 강하게 불어온다. 이 컴컴한 밤에 분별이 가능한 변하지 않는 두 가지는 오직 별과 나침반 뿐. 항로 바로 왼쪽으로 마스트 옆에 별 하나가 떠 있다. 나는 그 별에 미간을 찌푸리며 집중한다. 남반구 항해의 북극성과 같은 지표 Crux-남십자성이다. 별에 집중을 하니 눈에 별빛과 그 위치가 차분히 들어온다.


‘Per aspera Ad astra-역경을 넘어 별에 이르도록’ 세일링서울요트클럽의 창업 모토가 떠오른다. 역경과 별은 내게 종교적인 의미와 고진감래라는 비유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믐의 어둠, 20노트가 넘는 강풍 속 매뉴얼 항해를 해야 하는 ‘역경’ 속에서 별은 더 이상 은유가 아닌 내가 바라보고 따라가고 이 어려움을 극복해야 할 현실이다. 자칫 나태해지기 쉬운 마지막 밤에 ‘이것이 항해야!’라고 웅변하듯 기계가 고장이 나주어 우리는 조타를 잡고 꼬박 밤을 샜다. 조타 휠 옆에 놓인 작은 나침반과 별 하나를 바라보며 9일간 이어진 긴 여정의 마지막 코스를 견딘다. 저 자연 앞에 온통 까막눈이라 무엇을 봐야할지, 또 무엇을 예측해야할지 조차 모르고 있었던 내게, 흔들리며 빛나는 예쁜 별들이 촘촘히 박혀있던 하늘, 파도와 빛, 형광 플랑크톤. 어둠 속에서 작고 낮은 것들의 빛들로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던 저 자연이 이제 내게 손을 내밀며, 떠나기 전 축제의 마지막 춤을 추자는 듯하다. 그렇게 휠 위에 손을 얹고 155도 요트의 방향을 잡는다. 24노트 바람을 뺨에 맞으며 어둑한 그믐 바다 속, 별빛과 선저에 부딪혀 빛을 산란시키는 플랑크톤들과 함께 이번 여정의 마지막 항해를 보낸다. 그리고 나는, 나의 항해 인생이 이를 통해 비로소 새롭게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임대균 (세일링서울요트클럽, 모아나호 선장)

keaton70@naver.com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30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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