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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이상의 역사에도 여전히 오리무중인 러시아의 자기정체성

2021년 6월호(140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1. 6. 18.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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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화(명) 2]

천년 이상의 역사에도 여전히 오리무중인
러시아의 자기정체성


한반도 주위의 4대 강국은 모두 자기정체성에서 헷갈리는 나라들뿐이다!

이런 우스갯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단군 할아버지가 부동산 사기를 당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대적들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땅 한반도를 항구적 나라로 정했다.” 어떻게 하든지 한반도에서 도망쳐 이민가고 싶은 사람들의 부정적 관점에서는 이 우스갯소리가 그럴듯하게 들릴 겁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불리한 지정학적 환경을 적극적,자기주도적으로 바라본다면 전혀 다른 셈법이 나옵니다. 현재의 지구를, 북반부를 위로, 남반부를 아래로 보는 시각을 거꾸로 뒤집으면 - 우주에 좌표가 따로 없기 때문에 이것이 정답임 - 대륙에 견고한 뿌리를 내린 한반도는 거대한 바다들을 넘어서 우주로 항해를 떠날 가장 중요한 거점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지금까지 각 민족들은 세계사에서 주도권을 한 번 행사할 기회를 부여 받았지만, 한반도 한민족에게는 한 번도 그런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21세기 초야말로 바로 그 찬스가 아닌가 하는 기대감에 설렐 수 있습니다. 지구의 긴 과거를 돌이켜보면, 과격하며 잔인하게 통치했던 민족/나라(앗시리아,바벨론,알렉산더,스페인,포르투칼,히틀러의 독일,제국주의 일본,공산주의 러시아 등)의 통치기간은 매우 짧았던 반면, 그 통치에 있어서 종교적,윤리적 성격을 지니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군사적,상업적으로 세계를 통치하려 했던 민족/나라(페르샤,영국,미국?)의 통치기간이 제법 오래 지속되었다는 놀랄만한 역사적 진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한반도,한민족이 ‘홍익인간’이라는 그 어느 민족도 가지지 못한 탁월한 건국이념과 함께, 더 깊은 (절대)종교에 바탕을 두어 탁월게 개발한 윤리를 기초로 하여, 지구와 우주를 다스리는 일에 철저하게 준비한다면 정말 엄청나게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을 기대하는 것은 허망한 몽상일까요?

물론 한반도가 항구적으로 처한 지정학적 상황 속에서 일제에 의해서 강제로 나라의 역사와 존재 자체가 말살될 뻔한 위기를 벗어나고, 이후 일어난 또 다른 위기인 한국동란이 종료된지도 채 70년이 안된다는 매우 짧은 역사를 지닌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 속에서 가장 어렵고 중요한 과제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일 겁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의 네 이웃들은 모조리 정체성에 있어서 헷갈리는 민족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웃’ 러시아는 자유를 선물로 받은 시간(1991 소련해체)이 30년 밖에 안되는, 역설적 의미에서 매우 싱싱하고 젊은 나라입니다.

앞으로 보겠지만, 이 나라는 1)외부의 지배를 철저하게 받거나 혹은 거의 우상숭배하듯이 받아들여서, 2)정점에 이른 후, 3)그것을 즉각 폐기처분하는 이상한 역사가 반복되었습니다(J.A.Billington, The Face of Russia, 1998, pp.45f.241). 또 ‘둘째 이웃’ 중국은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지만 정주적 정권(30%, 한-송-명)과 유목적 정권(70%, 북위-수-당-요-금-원-청)이 기름처럼 뒤범벅 되어 정신없이 정권들이 교체되었기 때문에 제대로 자기정체성을 확인하고 형성할 겨를도 없는 나라입니다. 특히 100년(1921~2021)이 넘어가지만 아직 붕괴될 조짐이 확실하지 않는 공산주의 철권통치라는 두터운 외피를 쓰고 있기에 바로 옆에 붙은 작은 나라인 우리에게도 큰 짐입니다. ‘셋째 이웃’ 일본은 겉으로 보면 굉장히 오랜 역사를 꾸준히 가지고 가는 것 같지만, 정체성에 있어서 그 초기 역사부터 스스로를 속인 나라입니다. 먼저 거주하던 조몬인 위에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여 이주한 도래인이 지배한 것은 이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의자왕의 백제멸망이후, 백제부흥을 도우려 2만7천군사가 백촌강 전투(663)에서 패배한 이후, 최초의 역사기록으로 남은 고사기古史記, 일본서기日本書記는 백제와의 관계를 떨쳐버리려 만든 조작된 기원 역사인 점이 점점 밝혀지고 있습니다. ‘넷째 이웃’ 미국은 비록 21세기 세계 초강대국이지만 정체성에서 정말 헷갈리는 나라입니다. 여러 유럽적 기원을 가진 백인계, 남미의 스페인계, 아프리카 흑인계, 각종 아시아계들이 모여 서로 섞이지 않는 샐러드볼과 같은 나라입니다. 엄청나게 덩치 큰 어린아이의 정체성을 가진 나라이기 때문에, 그 혼돈이 정리되는데 몇 세기가 더 필요할지 모릅니다.
사실 눈에는 잘 뜨이지 않는 정체성에 있어서 매우 황당한 우리의 이웃들에 비해, 한반도에 사는 한민족이 다음과 같은 행동을 한다면, 지구 정부 구성이나 우주시대 개척에서 앞장설 놀라운 기회가 찾아올지 모릅니다: 1)신라-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견고한 역사정체성에 기초하여, 2)북한과의 총체적 통일을 이루어서, 3)동양적, 서양적 정체성 중의 한쪽을 택하는 것이 아닌 아예 ‘인간 고유의 근원적 정체성’을 확립한다면 말입니다.
이런 기회를 잡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이웃들을 더욱 더 잘 알뿐 아니라 이해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know’and‘ understand’). 그래서 우리는 몇 년 전부터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었던 일본과 중국에 이어 세 번째로 러시아에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러시아인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IBM을 비롯한 여러 대기업에 입사한 사람들의 성향과 자기정체성을 전체 80여개 민족을 대상으로 여섯 가지 현실적인 지표로 분석한 오랫동안의 결과가 쌓인 객관적이고 탁월한 책이 있습니다.1) 물론 한 나라 안에서도 개인적,지역적,역사적 차이는 분명히 존재할 것이지만, 그 민족들의 대략적 성향을 상대적 관점에서 잘 말해주기 때문에 인재확보에 사활을 걸어야 할 경영인들에게는 필독서입니다. 여러분은 러시아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이 책이 제시하는 여섯 가지 지표를 따라 다음의 질문에 답해보며 확인해 보실래요?

1) 러시아인은 ‘남성적’일까요 ‘여성적’일까요? 가장 남성적 민족이 슬로바키아(1위 110점), 일본(2위 95점)이라면 러시아(63위 38점)는 대부분의 스칸디나비아를 비롯한 북유럽이나 남한(59위 39점)과 유사하게 매우 여성적입니다. 러시아인은 대단히 여성적이다.
2) 러시아인의 ‘불확실성 회피지수’는 얼마일까요? 불확실성 회피 점수가 가장 높은 나라는 그리스(1위 112점) - 러시아(7위 96점) - 일본(11위 93점) - 남한(23위 85점)이 따릅니다. 정반대로 그냥 일을 저지르고 보는 쪽은 미국(64위 45점)이 나오며 가장 마지막은 싱가폴(76위 8점)이 차지합니다. 러시아인은 불확실성을 아주 싫어한다.
3) 러시아인은 ‘권위적’일까요‘ 탈권위적(독자적)’일까요? 가장 권위적인 민족은 말레이시아(1위 104점)이며 러시아(6위 93점)와 중국(12위 80점)이 뒤를 따릅니다. 남한(41위 60점), 일본(49위 54점)이 중간 정도에 해당하며, 예상했듯이 미국(59위 40점)과 이스라엘(75위 13점)은 매우 탈권위적입니다. 러시아인은 매우 권위적이다.
4) 러시인은 ‘개인적’일까요 ‘공동체적’일까요? 예상할 수 있듯이 미국(1위 91점)은 최고로 개인주의적이며, 러시아(39위 39점)는 중간 정도인데, 같은 바이킹족인 북유럽인들(라트비아,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은 서유럽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개인적 성향이 강합니다(15~20위 정도). 또 예상했듯이 남한(65위 18점)과 대만(66위 17점)은 매우 공동체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러시아인은 중간(개인적-공동체적 사이)에 해당한다.
5) 러시아인의 안목은 ‘장기적’일까요 ‘단기적’일까요? 놀랍게도 장기적 안목을 가진 점에서 빨리빨리문화를 가진 남한(100점)이 1위를 차지합니다. 일본(3위 88점)을 이어 러시아(10위 81점)가 오며, 미국(69위 26점)은 아주 낮으며 최하위는 푸에도리코(92위 0점)가 차지하여 가장 단기적인 안목을 가졌음을 나타냅니다. 러시아인은 아주 장기적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다.
6) 러시아인은 ‘탐닉,방종형’일까요 ‘절제형’일까요? 최고로 탐닉/방종형은 좌파정권의 퍼주기 정책으로 돈이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남미의 베네수엘라(1위 100점)입니다. 미국(15위 68점)도 제법 높은 편이며, 옆나라 일본(49위 42점)은 중간입니다. 남한(67위 29점)에 이어 러시아(77위 20점)가 나오며, 가장 절제된 민족은 파키스탄(93위 0점)입니다. 러시아인은 제법 절제형이다.

러시아인이 이렇게 특이한 모습을 보이는 근본적 이유들은 무엇인가?
여러분이 경험적 혹은 주관적으로 예상했던 것과 오랫동안 검증되어 소개된 이 지표들과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그러면 러시아인들이 이런 점수를 받게 된 근본적 이유들을 우선 총체적 관점에서 개괄적으로 살펴봅시다 :

1) 혈통과 자연환경
혈통에 있어서는 같은 바이킹의 후예인 북유럽인과 동질한 점이 보입니다. 중세의 전지구적 해빙기 혹은 온난화기에 바이킹은 먼저 대서양을 통해 서쪽으로 진출하여 그린랜드, 아이스랜드에 이어 북미의 뉴펀드랜드까지 진출했습니다. 그렇지만 남쪽으로도 진출하여 프랑스나 영국해안가를 정복한 후에 지중해까지 나가 식민지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육지를 통해 동남쪽으로 남하한 바이킹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종착역인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기까지 다양한 슬라브족을 형성하였으며 그 중에 핵심은 러시아인이었습니다.
자연환경을 보자면 남반부에 비해 북반부에 더 많은 지구 인구가 모여 사는데, 그 중에서도 북극까지 맞닿은 러시아는 가장 높은 위도 상에 있습니다. 그래서 겨울 6개월은 매우 춥게 지내야 하며, 나머지 봄,여름,가을이 6개월입니다. 11시간대의 차이가 나는 다른 쪽 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시베리야 횡단철도로 6일을 꼬박 타고가야할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길쭉한 나라로서, 위도와 함께 계산하여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입니다. 만약 19세기에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지 않았더라면 경도의 길이가 얼마나 길어질지는 계산 상으로 쉽게 나오지만, 좁디좁은 땅덩어리에 살아온 한국인의 상상력의 한계를 초월하는 일입니다.

2) 심미적 감성
너무나 춥고 어두우며, 너무나 넓고 방대하고, 너무나 오랫동안 경험한 강압적 정치체제 속에 지내면서 이런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상상의 세계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예술의 세계에 몰입하는 것이 긍정적인 차원이라면, 남성성을 주체하지 못해 보드카,도박에 빠지는 것은 부정적인 차원입니다. 비잔틴 기독교의 영향으로 만든 환상적인 이콘을 비롯해 19세기에 서유럽문화를 갈구하듯이 수입하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창적 예술세계를 구축한 것이 러시아인이었습니다. 정치,경제,사회의 차가운 현실 세계에서 도무지 이룩할 수 없는 유토피아를 예술을 사용해서라도 돌파할 수 없었다면 민족정신 전체가 이상해졌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리스/러시아 정(통)교회正(統)敎會Orthodox Church의 아주 독특한 교리,예배,건축,생활양상은 한국인들에게 정말 낯선 것입니다. 특히 각종 감각기관(시각,청각,촉각)을 충만하게 만드는 예배는 추상적 교리와 마음의 각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개신교인에게는 너무나 이질적입니다. ‘시각’(금빛 찬란한 사제들의 제의와 그 복식의 보석 장식, 현란한 모자이크와 프레스코로 장식된 예배당), ‘청각’(장엄하게 울려퍼지는 성가와 종소리), ‘후각’(진한 향의 연기와 향내)을 총동원하기 때문입니다. 서방기독교처럼 따지고 논박,분석하기보다 명상과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다 보니, 교리는 부차적이 되었으며 철학은 단순화되어 버렸습니다. 서방기독교(로마교,개신교)가 가진 논리정합성의 신학 대신 ‘아름다움의 신학’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런데 러시아가 아주 독특한 모습을 가지게 된 근본 원인은 오랜 역사를 관통하며 외부와 맺고 주고받은 네 가지의 중요한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을 러시아 편에서 외부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 두 가지와, 외부가 적극적으로 러시아에 침투해 들어간 것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역사 :
1) 동방기독교 2) 19세기의 서양문화
러시아에 외부가 적극 침투한 역사 :
1) 따따르의 지배(250년) 2) 공산주의 지배(70년)

3) 러시아 역사 1 : 동방기독교(러시아 정교회)의 영입, 그러나 토착신앙과 혼합
러시아인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첫째 외부는 바로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비잔틴교회, 동방기독교였습니다. 끼에쁘 루시(현재 우크라이나 지역의 도시국가인 끼에쁘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최초의 거대 정치집단)를 장악한 블라디미르 공후는 세 종교(유대교,로마교,이슬람교)와의 만남을 가진 기록을 남겼습니다. 각 종교의 특색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 후에, 러시아가 동방기독교를 받아들인 이유를 소개합니다: ‘방랑할 운명을 지닌 유대교 ’나‘영광은 경험할 수 없는 (이성적) 서방기독교 ’와‘즐거움(음주)이 없고 슬픔만 있는 이슬람교’를 버리고, “박식하며 미적 감성이 충만한 비잔틴(그리스)정교회”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원래의 그리스정교회는 본질을 이성적으로 추구하는 일에 탁월한 그리스인의 본성을 따라, 근본원리를 따지는 교리논쟁에 매우 익숙했습니다. 동방과 서방의 기독교가 삼위일체 교리 중에서 지엽적인 문제인 필리오크 논쟁으로 분열된 이후(1054), 스스로를 ‘정통’orthodox이라 규정한 그리스정교회는 오랜 중심이었으며, 황제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 함락(1453)으로 무너졌습니다. 그러자 모스끄바의 공후는 자신의 도시가 무너진 옛 도시(‘제2의 로마’)를 계승한다고 선언하고 비잔틴기독교의 진정한 대표로 자처하기에 이릅니다. 또 이 새로운 수도 모스끄바를 다시는 무너지지 않는 신의 도성인 ‘제3의 로마’로 선언하며 신학화한 겁니다. 이것은 교리,논리,이성을 강조하던 그리스인의 기질에서 경험,체험,감정,감성을 강조하는 러시아인의 기질로 동방기독교가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그리스 수도사들은 ‘하나님의 본질’essence과의 합일을 추구했던 반면, 러시아 수도사들은 ‘하나님의 에너지’energy에 연결되어 그로부터 (황제가 통치하는) 힘을 받는 것을 추구한 차이점을 보였습니다(J.A.Billington, 47). 이렇게 해서 신학적으로 러시아 정교회는 황제 지배를 더욱 막강하게 하려는 정치적 태도를 취하게 된 겁니다.
그렇지만 동방기독교의 둘째 버전이 된 러시아정교회는 그 교리적 취약함 때문에 기독교 이전에 러시아에 있던 동슬라브족의 범신론적 세계관이나 토속적 민중신앙과 병합되는 경향을 띠었습니다. 그리하여 혼합주의, 즉 러시아만의 새로운 종교현상인 ‘이중신앙’을 만들어내어, 전통의 신들을 기독교적 성인의 모습으로 재창조하였습니다(석영중, 러시아정교, 21). 예를 들면 대지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경외심으로 만들어낸 ‘축축한 대지-어머니’는 러시아정교에 흡수되어‘성모 마리아에 대한 절절한 지향으로 변화시켰으며, 마리아의 처녀성virginity이 아니라 모성maternity를 강조한 것도 이런 점을 드러냅니다(J.A.Billington 51).

4) 러시아 역사 2 :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수입하려한 19세기의 서구문화(명)
이슬람 세력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정복(1453)에 얼마 안되어 따따르의 압제도 종료되면서(1480), 부상하기 시작한 러시아적 자의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높이 솟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피렌체에서 열린 동방기독교와 서방기독교가 같이 모인 제17차 교회공의회(1439~1442)에서, 오스만 터어키의 공격에 시달리던 동방기독교는 서방기독교의 원조를 받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로마교회의 수위권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이 때 러시아 정교회는 이 결정을 거부하고‘제3의 로마’인 모스끄바를 중심으로 삼았습니다. 이반 뇌제 사후(1584) 대혼돈기 후에 모스끄바 총 대주교의 아들이었던 미하일 로마노프(1613~1645 재위)가 콘스탄티노플 황제의 뒤를 잇는 카이사르,짜르,황제로 공적으로 등극한다고 천명하면서, 본격적으로 로마노프 왕조의 러시아제국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후 러시아정교회는 내부적으로 구교도와 개혁파의 투쟁이 진행되었으나, 결국 황제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황제가 러시아 사회전반을 완전히 지배하는 반면, 교회는 사회나 정치를 정화시키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석영중 102). 그 이후 대제라 불리우며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인 뾰뜨르 황제(1672~1725)는 러시아의 거의 모든 것을 서유럽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오래된 수도인 모스끄바를 버리고 대신 발트해에 가까운 황량한 습지에 완전히 서유럽화된 석조궁전과 교회당과 운하로 채워진 새로운 도시, ‘뾰또르의 도시’(빼쩨르부르그 St.Petersburg 소비에트 시절 레닌그라드라고도 불림)를 단시간에 건설하여 수도로 삼았습니다. 이제 서유럽화는 이어서 통치한 안나 여제, 엘리자베타 여제, 남진정책 수행으로 잘 알려진 예까제리나 여제의 지속적인 정책이 되었습니다. 예까제리나 여제는 프랑스 계몽주의자인 볼테르,디드로를 초대하는 등 교제를 이어나가며 사회전반에 걸쳐, 형식적 차원에서는 적어도, 서유럽화를 추진해 나갔습니다. 알렉산드르 2세(1855~1881 재위)가 추진한 더 강력한 서유럽화로 러시아의 사상,문학,미술,음악에서 유례없는 창조성이 분출되었습니다. 심지어 사회적 차원에서도 발전을 이루어, 원망이 자자하던 농노제도 형식적으로나마, 땅은 나누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폐지(1861)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서유럽화를 강력하게 더욱 빠른 속도로 추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한 러시아적 것을 놓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한 감정도 러시아인들 속에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즉 러시아인들은 서유럽화를 시작하면서 1)계몽주의가 말하는 서유럽적 유토피아를 꿈꾸며 독일적 관념론을 거쳐서, 2)프랑스적 실증주의와 유물론에 이르고, 3)더 나아가 사회주의와 니힐리즘에 도달한 후, 4)최종적으로는 심지어 무신론까지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급박하고 반성없이 받아들인 서유럽화는 장차 20세기 초에 러시아를 초토화시킬 볼세비키 공산혁명의 씨앗이 된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이런 세속화,사회주의화,유물론화를 혐오하여 진정한 러시아적인 것이나 정교신앙의 본질로의 복귀라는 반작용도 사회와 개인의 내면 속에 깊이 자리잡아 있었기 때문에, 20세기 말의 공산주의 파멸 이후(1991) 러시아는 급격한 종교부흥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5) 러시아 역사 3 : 외부의 격렬한 (물리적)침투의 첫째 역사 : ‘따따르의 속박’ 250년 (1237~1480)
몽골제국에서 고려는 특이하게도 부마 국가의 지위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제국의 서쪽 끝에 있던 끼에쁘 루시는 징키스칸의 아들,손자인 주치-바투의 침입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이렇게 몽골의 서쪽 제국인 킵차크 칸국이 유목민족의 전형인 철저하고 잔인한 전제적 방식으로 통치하는 250여년 동안 러시아인에게 엄청난 고통(‘따따르의 속박’)을 안겨주었고 이것은 러시아인의 자의식에 깊이 내면화되었습니다. 몽골과의 관계에 모든 에너지를 써버린 러시아는 자연스럽게 서유럽과도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모스끄바 공후 드미뜨리 돈스꼬이(‘돈 강의 영웅’)가 꿀리꼬보 전투(1380)에서 킵차크의 칸인 마마이를 격파하기까지, 러시아는 몽골의 서유럽과 중유럽의 침투를 막아주는 방패막이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괴롭히는 시어머니를 증오하면서도 서서히 시어머니와 같이 되어가는 며느리처럼, 러시아인은 몽골을 싫어하면서도 몽골의 동양적 전제군주적 지배를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향은 러시아인의 정치적 성향 속에 자리잡아서, 러시아인들이 훗날 1)모스끄바의 이반 4세 뇌제(번개,벼락(치는) 제후)의 강압적 통치, 2)이 도시를 중심으로 한 로마노프 황제들의 러시아 제국의 철권통치, 3)나아가 공산주의의 일인(당)독재를, 쉽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러시아의 유명한 인형인 마뜨료시까matreshka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외피 안에 또 다른 작은 외피가, 다시 그 안에 외피가 계속되는 것과 같습니다(J.H.Billington, Russia in Search of Itself, 2004; 러시아의 정체성, 2018, p.6).

러시아 마뜨료시까matreshka 인형

6) 러시아 역사 4 : 외부의 격렬한 (사상적,물리적)침투의 둘째 역사 : 프랑스혁명(1789,1848)과 그 후예인 공산주의의 70년 지배
19세기 초부터 러시아에 터진 서구화의 물결은 가장 먼저 정치적인 것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근세 서구는 세 가지 근본 변화를 경험하는 중이었습니다: 영국의 명예혁명(1688), 미국혁명(1774), 프랑스혁명(1789). 이 중에서 러시아의 정교,정치,사회구조는 개신교의 영국,미국의 혁명을 흡수하기에는 여러모로 상관관계가 적었습니다. 하지만 교회권과 왕권의 사회지배가 아주 강력하여 점진적 변화를 기대하기가 매우 어려운 프랑스는 러시아와 매우 흡사하였습니다. 그래서 러시아는 프랑스 혁명(1789,1848)을 흡수하기가 매우 쉬웠고, 이에는 파리가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유럽문화의 중심지라는 일반적 인식도 강하게 작용했습니다. 그렇지만 프랑스혁명(1789)이 정상적,점진적으로 발전하지 않고 과격하고 파괴적으로 진행될 뿐 아니라, 나폴레옹에 의해서 정치적으로 탈취당하였고, 기대하던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하자, 그 혁명의 허상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나폴레옹의 모스끄바 점령의 실패, 그리고 비엔나체제(1815) 이후의 전승국으로 참여한 러시아의 강화된 황제권은 자유,평등,박애의 이상을 헛된 몽상으로 추락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어진 1848년의 혁명과 파리 코뮨의 실패, 그리고 나폴레옹 3세의 등장으로 프랑스는 다시 큰 혼란에 빠지지만, 러시아 이상주의자들은 민중을 위한 저항의 이데올로기를 키워갔으며, 결국 20세기에 볼세비키라는 극단적 공산주의자들이 러시아 혁명(1917)을 성공시키게 만든 겁니다. 그렇지만 정반대로 19세기 중엽 이후에 화려하게 꽃피웠던 러시아 문학,음악,미술은 당시의 낭만주의와 러시아적 정서를 표현하는 국민파의 등장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함몰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민중을 고려하지 않는 이런 순수예술,학문 등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엘리트로만 생각될 따름이었습니다. 즉 19세기 후반은 짜르주의자들의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와 민중이데올로기 사이에서 예술이 화려하게 꽃피는 역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V.Nabokov, Lectures on Russian Literature, 1981, p.5). 뿐만 아니라 이 두 경향은 ‘헤겔적 정正’과‘헤겔적 반反’이었지만, 70여년 후의 볼세비키 혁명(1917)에서는‘헤겔적 합合’이 되어, 국가권력의 독재와 대중(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결합이라는 독특하지만 매우 고통스러운 정치체제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전제적,독재적 통치요소는 더 깊은 곳에 근원을 두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최초로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받았던 외부의 영향인 비잔틴기독교에서 황제가 교회의 회의를 주재하고 총 대주교들을 임명하고 통제하는 것입니다. 즉, 중세의 서방기독교가 교황이 왕과 황제를 통제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 것에 있습니다. 즉 세 가지 요소, 동방기독교,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19세기의 러시아 혁명가들, 그리고 볼세비키 공산주의가 모두 총체적으로 완고한 전제(독재)적 통치형태를 만들어낸 겁니다.


1) G.Hofstede,G.J.Hofstede,M.Minkov, Cultures and Organizations : Softward of the MInd, 2010. 1) Power Distance(사회권위자에게 느끼는 거리감),
2) Individualism vs. Collectivism(개인주의적이냐 공동체적이냐),
3) Masculinity vs. Femininity(남성적이냐 여성적이냐),
4) Avoidance of Uncertainty(위험감수 혹은 회피), 5) Long-Term-Orientation(원시적이냐 근시안적이냐),
5) Indulgence vs. Restraint(탐닉형이냐 억제형이냐).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segensong@gmail.com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40>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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