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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의 가르침

2021년 10월호(144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1. 10. 11.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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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수연의 인생 단상 17]

냉장고의 가르침

 

평소와 같은 밤이었습니다.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 문을 여닫았는데, 갑자기 표시창에 냉장고의 온도가 아닌 에러 메시지가 떠 있었습니다. 영어 알파벳으로 바뀌고 터치도 더 이상 작동하지 않더군요. 점차 냉동실의 냉기가 사라져 가고 음식물들은 녹기 시작했습니다. 아찔해졌습니다. 한 시간 동안 발만 동동 구르다 전기를 잠시 차단했다가 다시 가동시켰습니다. 보통 장비에 문제가 생기면 ‘껐다 켜보는’ 원초적인 방법을 실행합니다. 이 방법은 생각보다 굉장히 효과적입니다.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다시 냉동실이 정상적으로 작동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냉장고는 전날과 동일한 에러 메시지를 띄우며 점차 물바다가 되어가고 있었지요. 금요일이라 당장 고치지 않으면 주말 내내 상할 음식 생각에 걱정이 눈앞을 가렸습니다. 남편과 함께 오늘은 일을 쉬고 냉장고 수리에 전념하기로 했지요. 서비스 센터에 접수를 하고, 당장 냉동실의 먹거리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친정으로 옮기는 미션을 수행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냉동실에서 꺼내 버려야 하는 음식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김에 몇 달간 ‘해야지, 해야지’하며 미루었던 냉장고 청소를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반강제적으로 냉장고 정리정돈을 실행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갖추어진 셈이었지요. 

냉장실과 다르게 냉동실은 내가 언제 넣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할 만큼 오래된 음식이 종종 발견되기도 합니다. 나중에 정리하려고 생각만 하고 손도 안 댄 선물 받은 멸치 상자, 먹을 주인을 찾지 못한 각종 떡, 음식 할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을 때 받아왔던 찹쌀가루, 요리할 때 설탕 대신 넣으려고 직접 만든 키위즙 등 처분해야 할 것들이 다양했습니다. 드디어 헤어져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한 가지 버리기 아까웠던 것은 얼마 전 한 번 먹을 양만큼 일일이 다지고 소분해서 얼린 엄청난 양의 대파였습니다. 파는 냉동실을 나오는 그 즉시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한번 녹기 시작한 파는 아까워도 눈물을 머금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냉동실의 냉기를 못 받아 약해진 냉장실도 함께 정리를 했습니다. 냉장실 하단에 채소 칸 서랍을 완전히 분리해내지 않았더라면 김장김치의 국물이 뒤로 흘러 바닥에 얼어있는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 냉장고는 부모님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독립해서 살게 되면 냉장고는 온전히 나의 것이 됩니다. 냉장고는 나와 식구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소중한 식재료의 저장 공간인데, 나의 ‘게으름’과 ‘귀찮음’도 함께 저장해 버렸던 것 같습니다. 청소는 깊은 사색으로 이끄는 매력이 있습니다. 특히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을 청소하게 될 때 말이지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쩌지 못하는 난감한 상황은 늘 예고하지 않고 불쑥 찾아옵니다. 결혼 후 만 7년을 넘게 살면서 냉장고가 고장 난 적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아주 가끔 냉장고 모터 소리가 유독 시끄럽게 들릴 때면 ‘냉장고가 고장 나는 건 아니겠지?’라고 걱정을 잠깐 하고는 잊어버렸습니다. 막상 이런 일이 생기니 막막해지더군요.

평소 ‘원래’ 잘 작동해서 그 소중함을 인지조차 못했던 냉장고가, 늘 그 자리에서 있는 듯 없는 듯 보이지 않게 제 역할을 해주는 주변 환경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주려고 했나 봅니다. 만약, 냉동식품을 임시로 맡길만한 곳이 주변에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먹고사는 데만 집중하느라, 아파트 단지 내에 편하게 왕래하며 개인적인 일을 부탁할 수 있는 집이 없다는 현실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친정이 멀지 않은 곳에 있어 그나마 얼린 음식의 일부를 보존할 수 있어서 다행스러우면서도, 그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새삼 감사함을 느꼈지요. 만약 남편이 일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고 집안일은 ‘원래’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치부한 채 출근해 버렸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혼자 택시를 타고 짐을 나르는 불편함과 고단함을 감수해야 했거나 음식을 모두 버려야 했을 것입니다. 그보다 먼저 부부 사이에 크나큰 다툼이 생겼을 테지요. 또한, 서비스 센터 담당 기사가 최대한 빨리 방문해주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요? 당일 방문으로 변경되기 전까지는 1주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하마터면 몇 날 며칠 먹거리에 대한 걱정 때문에 불편한 일상을 참아야 했겠지요. ‘만약 애프터서비스 자체가 없었다면?’, ‘냉장고가 개발되지 않았더라면?’, ‘누군가의 노고가 없었더라면?’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으레 이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오만이었는지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저녁에 방문한 서비스 센터 기사의 점검 및 가벼운 수리 덕분에 냉장고는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터 교체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금전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적지 않은 수리비를 지불한 날이었습니다. 세상에 ‘당연해 보이는 일’을 ‘당연하지 않게’ 보는 태도를 가질 때, 주변에 늘 있었던 감사한 일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Life Designeer 주수연
brunch.co.kr/@lifedesigneer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44>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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