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화가 리까르도와의 만남, 그림의 고정관념 알에서 깨어나다

2021년 11월호(145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1. 11. 22. 20:17

본문

화가 리까르도와의 만남, 그림의 고정관념 알에서 깨어나다

그네 타는 후안. 1992. 유화(100x100cm)

 

지난 8월의 어느 날, 친구이자 화가 Ricardo를 만났다. 리까르도가 그린 그림을 내가 ‘Dibujo’라고 말하는 버릇이 있다며 ‘Pintura’라고 말해야 한다고 여러 번 교정시켜주었다. 그러니까 ‘삔뚜라’는 그림(페인팅, 회화)이고 ‘디부호’는 데생(드로잉, 소묘)이라는거다.
도화지나 천에 선으로 그린 그림이나 수채화 물감, 유화 물감으로 그린 그림을 나는 그동안 ‘Dibujo’(데생)라고 부른 셈이었으니, 교양 떨어지는 인간이 되고만 셈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화가 리까르도는 단호하면서도 끈질기게 자기가 그린 유화들을 내가 ‘디부호’라고 지칭할 때 마다 ‘삔뚜라’라고 부르라며 집요하게 교정시켜주었다는 얘기다. 까다롭게 군다고 빈정 상했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을 해보니 일반인이라고 하더라도 전문가나 예술가를 친구로 두려면 적절한 교양을 갖추지 않고서는 관계유지가 되질 않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다. 물론 전에도 비슷한 경험이 한번 있었다. 사진가 박진호씨를 다큐멘터리사진가로 지칭한 적이 있었는데 순수사진예술가라고 불러야 한다고 분명하게 구분시켜주었었다.


| 친구인 화가 리까르도를 만난 이유
페친 백은희씨로부터 전에 이런 메세지를 받았다. “그림 사러 가심 제게도 보여 주세요. 사고 싶은 것 있나 보려고요. 노익호 쌤 안목이라면 믿을 수 있고, 취향이 닮은 점도 있고, 돈 보내라면 보내드릴께요.” 페이스북에 화가 리까르도와 관련된 포스팅을 올린 적이 있었고, 코로나사태에 어찌 먹고 사는지 걱정이 들어 한번 만나 작품 몇 점을 사줘야겠다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 글을 읽고 가벼운 기분으로 메세지를 보낸 것이 아니겠나 싶었지만 기분은 굉장히 좋았다. 왜냐하면 내가 알기로 진짜 그림을 사는 친구들을 거의 보지 못했기 때문에 가벼운 흥분까지 일었다. 그러고도 한 달이나 훅 지난 후에야 날을 잡아 화가 리까르도를 만나게 된 것이다.


| 화가 리까르도에게 사려던 작품
2006년 말, 화가 리까르도는 나를 모델 삼아 자기 집, 작업실에 불러 유화로 내 얼굴을 그렸다. 그릴 당시 카셋 테이프로 바흐의 ‘브란덴부르그’ 협주곡을 틀어주어 지루하지 않았는데다 의외로 빠르게 그렸다. 30분 남짓해서 완성했기 때문에 사실 소스라치게 놀랬다. 붓을 쓰지 않았고, 미술용 나이프로 쓱쓱 그렸기에 나중에 덧칠하여 완성할 줄 알았는데 끝났다고 했으니 거짓말이 아닌가 의심했다는 말이다. 정말 내 얼굴이 그려져 있었고 아주 훌륭한 예술작품이 되어져 있었다. 리까르도의 말로는 그려진 내 얼굴 초상화를 보고 느껴지는 이미지를 떠올려 추상적인 그림을 그리고 나면 내 얼굴 작품이 끝나는 거라 했다. 이런 식으로 PLAZA DE ARMAS(칠레 산티아고 구시가지의 중심에 위치한 아르마쓰 광장)에서 볼 수 있는 구두 닦기, 광대, 음료수판매 아주머니, 마술사, 노숙자 등 총 30명의 초상화를 완성하고 그에 따른 추상적인 그림을 30점 그린 후 전시회를 가질 것이라는데 나는 아르마쓰 광장 근처에 문방구를 경영하고 있기에 뽑힌 거라 했으니 참말로 재미지지 않았겠나. 그리고 리까르도는 그의 60점 그림을 2007년 4월에 카톨릭대학에서 ‘EN LA PLAZA DE ARMAS’(아르마쓰 광장에서)라는 제목으로 전시했다.
전시회가 끝난 후 내 초상화, 리까르도 초상화, 마술사 초상화 이 세 점(이미지화까지 포함하여 여섯 점)이 특히 훌륭하여 구입하리라 마음먹었더랬다. 그러나 구입할 수가 없었는데 이유는 리까르도가 전시회를 여러 차례 가지려는 계획을 내게 얘기했기 때문이었다. 이러다 저러다가 시간도 이미 많이 흘렀고 리까르도도 반백이 훨씬 넘어갔으니 작품에 대해 많은 애착도 줄었으리라 생각했다. 내 초상화를 팔라하면 쉽게 팔리라 기대했다. 아니, 꼭 가지고 싶었다. 화가 이은미씨가 그려준 초상화와 칠레의 화가 리까르도가 그려준 초상화를 갖게 된다면 비교하면서 오는 굉장한 희열이 있을 것이기에. 


| 리까르도를 만나 산 작품들
리까르도를 만나 내 초상화를 사고 싶다고 했더니 어디에 있는지 기억할 수 없다고 했다. 솔직한 내 심정은 이랬다. 리까르도가 코로나사태에 돈이 궁핍하리라 짐작하여 초상화 시리즈 60점 전체를 내가 다 구입한다고 해도 작품 값을 비싸게 부르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작품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니! 어이가 없었다. 갖고 싶은 마음이 태산 같았기에 더더욱 답답했다. 이런 마음으로 그가 보여주는 작품들을 감상했는데, 하나 같이 훌륭한 작품으로 보이는 게 아닌가! 그가 광장의 화가로 앉아 그림을 그리며 팔던 작품과는 딴판이었다. ‘좋은 작품은 집에다 다 갖다 놨구먼~’이라 속으로 생각하면서 보여준 작품 모두를 다 구입했다. 리까르도는 기분이 좋았던지 다음에 자기 집에 초대할 테니 점심을 같이 먹자는 약속까지 했다. 사실, 화가 리까르도를 만나긴 했지만 주저했었다. 그간에 그와 나의 관계라는 게 그저 작품의 판매자와 구매자의 관계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이미 고흐도 있었고 다빈치도 있었지만
찬사가 귀에 닳도록 듣고, 눈에 치이도록 보고 또 보았던 ‘별이 빛나는 밤에’와 ‘모나리자의 미소’. 그래서 마치 내가 그림에 대해 다 알고 있었다는 착각과 고갱의 일생을 다룬 서머셋 모옴의 ‘달과 6펜스’를 정독한 덕분으로 미술에 관련한 부족함이 없다 자부했던 내가, 현존하는 칠레의 화가 중 하나인 리까르도를 만나면서 마치 알에서 깨어나는 경험을 한 것이다.


| 드디어, 내 초상화의 행방을 알게 되다!
정말 리까르도가 점심을 차려주는 날이 올 줄이야! 올해 들어 두 번째 그를 방문한 날, 그의 부인 까르멘이 맛있는 요리를 해주었다. 감격에 눈물겨웠다. 그가 날 진짜 친구로 받아준 표식으로 이만한 게 더 있을까?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던 내 초상화에 대해 부인 까르멘이 이렇게 말해 주었다. “2013년 아뜰리에에 도둑이 들어 리까르도의 초상화 시리즈 60점을 포함해 내 초상화를 비롯해 총 300점을 훔쳐갔어!”라고. 리까르도는 회상하기도 끔찍해서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했던 것이다.

 

칠레에서 노익호

melquisedec.puentealto@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45>에 실려 있습니다.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는 

  • '지역적 동네'뿐 아니라 '영역적 동네'로 확장하여 각각의 영역 속에 모여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스토리와 그 속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문명, 문화현상들을 동정적이고 창조적 비평과 함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국내 유일한 동네신문입니다.
  • 일체의 광고를 싣지 않으며, 이 신문을 읽는 분들의 구좌제와 후원을 통해 발행되는 여러분의 동네신문입니다.

정기구독을 신청하시면  매월 댁으로 발송해드립니다.
    연락처 : 편집장 김미경 010-8781-6874
    1 구좌 : 2만원(1년동안 신문을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예금주 : 김미경(동네신문)
    계   좌 : 국민은행 639001-01-509699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