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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한국 예술 가곡에 문을 여신 작곡가 이흥렬 & 아들! 한국적인 것으로 세상을 감동시킨 작곡가 이영조 (1)

예술/음악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17. 8. 9.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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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이어가는 父子음악인의 삶의 이야기]

아버지! 한국 예술 가곡에 문을 여신 작곡가 이흥렬
    아들! 한국적인 것으로 세상을 감동시킨 작곡가 이영조 (1)

 

  가까운 일본에는 대대로 아버지의 일을 아들이 이어가는 문화가 있어서 가족의 역사적 뿌리가 깊은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으로 역사적 뿌리가 많이 무너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번 8월호에서는 작곡가 이영조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동요 ‘섬집아이’를 작곡한 아버지 이흥렬 선생님의 삶과 음악, 그리고 아들인 이영조님의 삶과 음악 이야기를 특집으로 함께 실어보려 합니다.

 

한국 예술 가곡에 문을 여신 아버지, 작곡가 이흥렬(1907~1980)

  아버지는 밖에서 굉장히 유쾌하셨어요. 유머도 많으시고요. 그런데 집에 돌아오시면 엄하시고 밖에서 일어난 이야기는 좀처럼 하지 않으셨죠. 군대에서 ‘진짜사나이’를 많이 불렀는데 그게 아버지의 곡인지 몰랐어요. 군대에서 작곡가가 누군지 말해 주지 않잖아요. 제대하고 향토예비군 훈련을 갔는데, 교관이 오더니 “이 교수님은 선친이 작곡하신 군가 하나 지도해 주시죠?”하는 거예요. “어떤 군간데요?”라고 물었는데 ‘진짜사나이’라고 하는 겁니다. 깜짝 놀라 집에 돌아와 아버지께 “진짜 사나이를 아버지가 쓰셨어요?”라고 여쭤보니 “이런 불효막심한 놈~!” 불호령을 들었죠. 하하하

 

< 선친(이흥렬), 영희, 영금, 영조 >

 

청렴한 삶의 본을 보이신 아버지
  아버지는 공과 사를 분명하게 가르셨죠. 아버지께서 숙명여대 학장만 12년을 하셨어요. 학교에 문제가 있어 문교부 (지금의 교육부)로부터 해결을 위한 관선학장으로 부임하시자마자, 당시 학교에 계시던 가까운 친구 분들 일지라도, 문제의 중심에 있었던 분들은 모두 해고하셨어요. 그래서 주위 분들 모두가 깜짝 놀랐죠. 잘한 일이라고 평가는 받았지만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이 힘들거든요. 이렇게 워낙 철저하신 분이다보니 원망도 많이 받았겠죠. 제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과 지방을 오가는 시간강사를 하고 있었어요. 아버지께 학교에 한 시간 정도 강의할 기회를 달라고 부탁했는데, 아무 얘기가 없으시더라고요. “내가 학장으로 있는 동안은 안 된다”고 하셨다더군요. 그래서 12년 동안 한 번도 그 학교에서 가르칠 수 없었죠. 나중에 아버지께 “아버지는 그렇게 해서 멋지고 청렴한 교육가이자 작곡가가 되셨지만 저는 뭡니까?”라고 되물었더니, 아버지께선 “네가 그런 시대에 태어났다. 아버지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에 말이다”라고 대답하셨죠. 당시에는 속된말로 빽을 쓰는 게 다반사였거든요. 그런데 제가 나중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원장이 되고 나니 알겠더라고요. 집사람과 딸이 성악, 피아노를 외국에서 다 공부 했지만 당장은 강의시간을 줄 수가 없더라고요. 그때서야 ‘내게 아버지의 피가 있고, 아버지로부터 이것을 배웠구나’라고 생각했죠.

  기억에 남는 것이 있는데 요즘은 로비를 하기 위해 돈뭉치가 담긴 박스를 건네잖아요. 아버지 때는 갈비를 몇 짝씩 들고 오곤 했어요. 쌀가마도 들어오고요. 그럴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갈비를 저에게 주어 바로 정육점으로 보내셨어요. 상하기 전에 빨리 되팔아 그 돈을 은행에서 보낸 사람에게 다시 돌려보내게 한 거죠. 저를 앉혀놓고 가르치시지는 않았지만, 직접 보고 배운 것이 제가 공직생활을 하면서 정직할 수 있는 힘이 되었던 것 같아요. 이 점에 아버지께 많이 감사하고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죠. 아마 내 딸도 아버지와 내 피를 이어받아 강직한 길을 갈 거라 생각합니다.

 

어머니로부터 배운 교육의 힘
  아버님이 그렇게 청렴한 삶을 사실 수 있었던 이유는, 제가 알기로는 아버지의 어머니, 저의 할머니 때문인 것 같아요. 할머니는 일제시대에 전도사였어요. 미국의 기독교가 원산과 평양에 들어왔는데, 그때 선교사님을 만나 신앙을 갖게 된 거죠. 할머니는 제 기억으로는 마치 선생님 같은 분이셨어요. 소풍을 가면 할머니께서 남긴 음식이나 쓰레기들을 보자기에 따로 싸서 정리하도록 하셨어요. 그 당시에도 ‘분리수거’를 하신 거죠. 아버지께서는 이런 할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으신 것 같아요. 일단 음악이고 뭐고 기본적 정신들이 제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신 거지요. 인생이 재주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거든요.

 

‘한국의 슈베르트’로 불린 작곡가
  아버지께서는 일본에 가서 공부하셨어요. 아버지는 할머니를 따라 교회에 갔는데, 풍금소리가 너무 좋으셨다고 해요. 그걸 배우고 싶은데 당시에 한국에 음악학교가 없었지요. 그래서 할머니를 졸라서 신학대학을 지원하신 거죠. 그런데 입학 면접에서 “저는 오르간 배우고 싶어서 신학교에 왔다”고 솔직하게 답하신 바람에 낙방하셨지요. 대신 19살 때 일본의 동경예대로 유학을 떠나셨는데, 할머니 댁이 부유하셨거든요. 거기서 ‘모로이 사브로’라는 스승에게 피아노와 작곡을 배우셨어요. 그분은 독일에서 공부하셨는데 아버지뿐만 아니라 나운영씨 등 많은 한국 음악가를 길러내신 분이셨죠.


  3년 동안 공부하고 돌아오셨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의 가곡은 예술가곡이라기 보다는 애창곡수준 정도의 곡들이었어요. ‘성불사 깊은 밤’, ‘나의 살던 고향은’이런 곡은 좋지만 예술가곡으로서의 무대용 연주곡목으로 쓰기는 어렵거든요. 아버지께서 성악으로 무대화 된 예술가곡이 있어야겠다 생각하고 쓰신 것이 ‘코스모스를 노래함’과 ‘꽃구름 속에’입니다. 이 곡들은 소프라노들이 무대용 독창으로 부를 만큼 난이도와 규모가 있는 편입니다. 피아노가 단순히 반주 정도 해주는 것이 아니라, 노래하는 사람과 대등한 차원의 연주가 가능하게 만드신 거죠. 단순하고 쉬운 곡이 아니라 복잡한 구조를 갖추고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드는 곡을 처음 시도하신 분이 아버지시죠. 건축이라고 할 때 어느 정도 규모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작곡을 할 때도 화음과 조의 변화 등의 건축적인 설계를 해야 되지요. 당시에 노래는 16마디 정도가 보통이었는데, 아버지는 40마디의 예술가곡을 작곡하셔서 그 때문에 ‘한국의 슈베르트’라는 명칭이 붙여졌죠.

 

< 이흥렬 가곡집 - 코스모스를 노래함 >

 

< 꽃구름속에(Clouds of flowers) - 작곡가 이흥렬 / 소프라노 강혜정 > 

 

혼돈의 시대를 관통한 예술인
  1931년에 일본에서 돌아오신 아버지께서는 원산으로 돌아가셔서 모교인 광명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셨어요. 1934년에 ‘코스모스를 노래함’이 담긴 ‘이흥렬 가곡집’을 내셨죠. 1936년에 서울로 내려와 경성보육학교에서 홍난파 선생님과 함께 교편을 잡으셨고, 이대에서도 교수로 계셨죠. 그러다가 6.25를 맞았을 당시 저희 집은 꽤나 부유했어요. 하지만 6.25가 터지니 몸만 도망갈 수밖에 없었죠. 피난을 해야 하는데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겁니다.

  정부가 부산으로 피난을 가면서 아버지를 포함한 예술인 박두진, 서정주 등 시인과 음악가 10명도 함께 몽땅 데려가 군가, 및 애국의 노래 등을 만드는 작업에 종사하도록 했던 거지요. 하여튼 우리 가족이 천안쯤 피난 가는데, 북한 군사들이 우리를 지나가더라고요. 가나 마나한 피난이라 생각해 천안의 아무 집이나 들어가 머물다가 서울 수복이 되자 수원까지 올라왔죠. 마침 수원 옆 오산에 미 항공전투 여단이 있었어요. 그곳 미군들이 아버지께 군 교회 성가대 지휘를 부탁해서 아는 음악가들을 불러 모아 성가대를 조직하셨지요.

< 대한민국정부수립가 >

 

  그 때 반주자가 한동일 피아니스트의 아버지 한인화 선생님이셨어요. 거기 조그만 미제 오르간이 있어서 저는 동일이 형과 함께 치면서 놀았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환한 얼굴로 오시더군요. 피난가기 전 서울 집에 있는 피아노를 미군에게 부탁해 가져오게 했다는 거예요. 피아노가 트럭으로 실려 오는 날 저녁, 누나와 온 가족이 너무 좋아서 펑펑 울었어요. 폭격으로 피아노 줄 열댓 개가 끊어졌지만 고칠 수 없어 그대로 쳤죠. 그런데 아버지는 신기하게도 조를 바꿔서 잘 치셨지요.

  6.25가 끝나고 사회가 안정되자 아버지는 1960년에 뜻있는 분들과 함께 서라벌예대를 만드셨어요. 이 학교는 후에 중앙대학 음악대학이 되었어요. 문학가 김동리, 임동권 선생님을 비롯해서, ‘가고파’와 ‘봄이 오면’등을 작곡하신 김동진 선생님,‘ 자장가’와 ‘들국화’를 작곡하신 김대현 선생님이 그 주역들이죠. 그러다가 1963년에 숙대 학장님이 되신 거고요.

 

< 이흥렬 선생과 일곱 자녀들이 사용했던 한국 최초의 YAMAHA 피아노 >

 

수많은 예술가들의 친구
  숙대에서 정말 열심히 일하셨는데 그 당시에는 TV나 골프 같은 놀이가 없었잖아요. 날마다 예술가들이 우리 집 마당에 와서 밤 11시까지 한 잔하시며 이야기를 나누셨지요. ‘보리밭’을 작곡한 윤용하 선생님은 거의 3년을 우리 집에서 살다시피 하셨고, ‘용의 눈물’과 ‘연산군’등의 역사소설로 유명한 월탄 박종화 선생님도 계셨고요. 박두진, 이은상 선생님과 같은 시인들도 있었지요.


  사실 가곡을 쓰는 영감의 50%이상은 시가 주는 거예요. 시가 주는 영감을 소리로 바꿀 뿐이죠. 많은 작곡가들이 가사와 상관없이 곡을 쓰는데, 중요한 것은 가사를 제대로 표현하고 전달하는 거예요. 가사에서 강조하는 것에 맞춰 곡을 써야하는데, 가사 따로 음악 따로 일 때가 많은 거죠.

 

소중한 교훈을 유산으로 남겨주신 아버지
  아버지가 1980년에 돌아가셨는데, 다 마비가 되고 심장과 얼굴만 살아계실 때 저희 자녀 모두를 부르셨어요. 자녀들 대부분이 음악을 하는데 대뜸 “너희들 굶어 죽을 자신 없지?”라고 농담같이 물으시는 거예요.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농담할 수 있는 여유가 있으셨던 거지요. 그러면서 “사람이 세 가지를 조심해야 하는데, 하나는 재물이고, 하나는 명예고, 또 하나는 권력이다”라고 하셨죠. 특히 너희들 재물을 탐내지 말아라. 예술가가 재물을 탐하면 추해 진다고 말씀하셨어요. 예술가는 명예가 스스로 따라 오잖아요. 또 자리에 오르면 유혹이 생기고요. 아버지는 이것들을 많이 겪으셨을 거예요.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주신 소중한 교훈인 셈이죠.

 

< 아들! 한국적인 것으로 세상을 감동시킨 작곡가 이영조 > 바로가기

 

이 글은 <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제 94호 >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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