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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또옙스끼, 한국인에게 너무나 어색하지만 꼭 필요한 문학가!

2021년 12월호(146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1. 12. 3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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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니즘Russianism 연구 - 러시아 문학]

 

     도스또옙스끼, 한국인에게 너무나 어색하지만 
꼭 필요한 문학가!   

르네상스 이후 500여년의 서구의 문화(명)는 문화의 가장 깊은 영역인 종교,철학,윤리에서 문학,예술을 거쳐, 과학,기술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부분화,파편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문화(명)을 만든 인간 자체는 분명 총체적 존재이지만, 자기가 만든 부분화,파편화된 문화(명)환경 속에서 살다보니, 스스로를 부분화,피상화시키고 있습니다. 특히 눈에 당장 보이는 물질을 위주로 부분화,파편화되다 보니, 인간 삶의 영원성과 영속적 가치를 보장하여 총체적 만족감과 기쁨을 주는 종교,철학,윤리는 점차로 우리에게 무관한 것이 되어갑니다. 
이런 경향을 거스리기라도 하듯이, 인간성의 본질은 바로 종교,철학,윤리에 있다는 것을 으르렁 거리는 사자처럼 부르짖은 문학가가 우리의 앞선 시대에라도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기적과 같습니다. 그것도 서양문화(명)의 변방인 러시아에서 150여 년 전에 살았던 한 인물이 그런 엄청난 도전을 했는데, 그는 뾰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옙스끼(1821~1881)입니다. 서구문학에서 그와 같이 인간이 특히 진정한 종교에 기초할 때에 인간의 삶은 가장 근본적이고 오래가며 안정적 기초를 얻는다는 것을 나타낸 문학가라 말할 수 있는 인물은, [신곡]을 쓴 단테나 [실락원][복락원]을 쓴 밀턴 정도일 겁니다. 그에게 있어서 문학은 목적이 아니라 종교적 침잠, 철학적 사색, 그리고 윤리적 반성의 인생 삶의 근본 목적을 이루는 도구였을 정도입니다. 2021년 내내 코로나의 우울한 시간을 우리는 군포에서 러시아음악을 연주한 군포 프라임필의 [러시아니즘]과 함께 하며 행복으로 전환할 수 있었습니다. 그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러시아인이기는 하지만 민족과 시대를 뛰어넘어 인류 보편문제의 문학화에 성공한, 천년에 한번 나올법한 이 위대한 천재를 연구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을 겁니다. 특히 상대종교와 상대적 윤리적 전통을 오랫동안 가진 한국에서는 철저하게 자신의 내면을 파헤치며 절대성,보편성을 문학화하는 일에 매우 어색하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하기에 이 글의 주제를 도스또옙스끼의 문학이 가지는 중요한 특징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잡았습니다. 

1. 그의 생애 = 그의 작품  

1.1. 돈에 있어서 매우 짠돌이인 아버지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한 말이 무엇일지는 대충 짐작이 갈 겁니다. 그런데 이 청개구리같은 아들은 아버지의 교훈과는 정반대로 돈을 물쓰듯이 쓰는 망나니로 자라났습니다. 언제든지 돈에 쪼들렸으며, 심지어 아버지가 죽자 유산을 한번에 다 받아서 즉각 탕진해 버리는, 성경의 탕자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돈을 빨리 벌어서 빚을 갚을 길을 찾다가, 우연히 글을 쓰면 되겠다 생각하고 쓴 첫 소설 [가난한 사람들](1846)이 상트 뻬테르부르끄 문학클럽에서 히트를 칩니다. 돈에 쪼들린 자신의 생애가 소설의 제목과 내용에 그대로 녹아난 겁니다. 이렇게 글을 쓰는 문학가의 삶을 살며 글을 쓰고 돈을 받을 정도가 아니라, 미리 돈을 받고 글을 쓸 정도였으니, 얼마나 돈개념 없이 막 산 사람이었을까요. 돈이 늘 모자라서 급하게 글을 써내려갔고, 그래서 그의 문학의 진실성,작품성을 의심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작가 스스로가 인간의 제1욕망인 물질의 노예가 된 후에 그런 사람의 심리상태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묘사할 수 있게 된 겁니다.

1.2. 청년기에 프랑스에서 유래한 ‘공상적 사회주의’를 따르는 문학가 모임에참여하여 낭독한 죄로 붙잡혀 사형언도까지 받았으나, 형 집행 몇 분 전에 황제의 정지칙령이 내려와 가까스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때의 가슴조렸던 심리는 아마 경험한 사람 외에는 모를 것입니다([백치] 제1부 5장). 동시에 그는 간질발작을 경험하는데, 이 질병은 그의 전 작품에 흐르는 매우 동적이고 파괴적이며 기상천외한 대화와 전환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이룬 것 같습니다. 이 일 이후 옴스크에서 10여 년의 수형생활을 하면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전격적이고 근본적 회심을 체험합니다. 이전에는 낭만적 사회주의자였으나, 이후는 자신이 몸담았던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일종의 타락한 종교로 전락해 인류의 자유를 박탈하며 인간에게 가져올 엄청난 파괴와 죽음을 예견하고, 그것에 대해 철저히 싸우는 문학투사가 됩니다. 여기서도 그의 변화된 삶이 철저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1.3. 질병에 의한 첫째 아내의 사망 이후, 그는 인간의 제2욕망인 ‘성욕’의 노예가 되어버릴,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 그녀에게 휘둘리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런 경험 속에 주저앉아 있은 것은 아니고, 그 때의 인간의 심리를 예리하게 분석하여 작품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에 그는 탁월한 문학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 길은 인간존재 말살의 낭떠러지로 갈 수 있는 매우 위태로운 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적 사랑은 오히려 인간을 파멸로 이끌어가는 의지의 표현일 뿐임을 적나라하게 묘사합니다. 즉 디오니소스적이며 지배적 (남녀의) 격정적 사랑은 개인을 활활 불태우는 불이나 용암과 같지만, 이윽고 육욕에 한계조차 넘어버리면 오히려 차디찬 얼음으로 변해버립니다. 그래서 다시는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한 인간 심리를 여지없이 드러냈습니다. 즉 경험적으로 작가를 쥐고 뒤흔들며 지배했던 것은 그 여자가 맞지만, 오히려 작가는 그 여자의 손에 휘둘리는 자아를 실험적으로 다루어 인간 심리의 깊이를 파고드는 계기로 만들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은 이와 같이 몸이 부숴질 정도로 경험에 직접 첨벙 빠져드는 가운데 피로 쓴 것과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극도의 조울증 증세를 보이는 것 같은 묘사들을 한 것입니다. “지나치게 명랑하기도 하고 지나치게 침통하기도 하며, 한없이 거칠다가도 갑자기 주의깊고 부드럽기도 하며, 이기주의적이었다가 아주 숭고한 감정을 나타내기도 한다.”[뻬떼르부르끄 연대기 6월 15일]

1.4. 그는 수형기간을 채운 후 상뜨 뻬테르부르끄에 귀환한 다음에도 물질탕진의 습관은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출판업자로부터 거금을 미리 받아 단기간에 [도박꾼]이라는 주제의 소설을 완성해야 한다는 조건을 덥석 물었고, 또 그렇게 받은 돈을 즉각 탕진해 버렸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이 오히려 안달이 나서 불러주는 말을 속기할 속기사를 고용해 글을 빨리 완성하게 하자는 제안을 마지못해 받아들입니다. 이 때의 속기사는 평소에 작가를 존경하는 사람이었고, 오히려 그녀가 그를 다그쳐 결국 시일 내에 완성하므로 이 질곡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보다 25살이나 어린 이 여자가 나중에 둘째 부인이 된 스니뜨끼나입니다. 그런데 돈을 물쓰듯이 하는 그에게 생긴 또 하나의 중독인 도박은 둘째 부인의 정성스럽고 지혜로운 도움으로 해방되었습니다. 이렇게 그의 소설들은 삶과 밀접한 가운데 만들어지는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작가 문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인간 심리의 가장 근본적 바닥을 묘사하기 위해, 마치 그가 의도적으로 인생을 망치는 경험에까지 해 보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일반 인간이면 돈이든, 여성이든, 도박이든 일단 중독이 되면 그 어떤 정신적 활동을 하지 못하게 망가지는 편이지만, 그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인간심리의 가장 밑바닥에서 일어나는 일을 문학화하는 일에 절대로 손을 놓지 않은 집요함을 보였습니다. 오히려 그의 문학은 그에게 악하고 해로운 경험에 편성하여 아슬아슬하게 승리한 인간의 모습을 보입니다. 일반 문학가들은 상상 혹은 사고실험으로 일정한 상황을 연출하여 묘사하는 억지를 부리기 때문에 피상적이 되기 쉬운 것과는 완전히 다른 매우 실감나며 깊이 있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2. 그의 문학의 전부는 인간과 그 내면세계일 뿐 

2.1. 도스또엡스끼에게 인간은 소우주이며 모든 존재의 중심이었습니다.1) 인간 이외의 자연이나 동식물은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인간 가운데 우주의 수수께끼가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인간의 외적 조건보다도 인간의 내면, 즉 영혼의 구조, 감정의 변화, 생각의 전개, 사상의 전환 같은 것이 그의 작품에서 주를 이룹니다. 인간의 심연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을 철저히 모든 작품 속에서 그리고 그의 생애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파헤치고 있습니다. 무궁무진한 것이 그 안에 있으므로 스스로는 죽기 전에도 다 파헤치지 못했다고 여겼을 겁니다.  
그에게는 항상 중심이 되는 인물이 있으며 이차적인 인물이 그 중심인물을 향해 움직이거나 반대로 중심인물이 이차적 인물에 빛을 던집니다. 예를 들어, [악령](1872)에서 핵심인물은 스따브르귄이며 이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돌아갑니다. 같이 나오는 샤토프, 베르호벤스키, 키릴따브르귄는 주인공인 스따브르귄의 분열된 인격의 단편이며, 이 특이한 인격이 파생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스따브로귄이라는 수수께끼같은 인물의 비밀을 푸는 것이 이 소설의 독특한 주제입니다. 또 두 번째 소설 [분신](1848)에서는 능력과 지위만이 중요한 외적 사회에서 불안을 견디지 못해 분열되는 자아를 소개합니다.“내가 아니고 놀랄 정도로 나랑 닮은 누구 다른 사람인 척할까? … 그래 나는 내가 아니야, 나는 내가 아닌 거야”[분신 1장],“똑같은 사람들이 끝도 없이 생겨났고, 마침내 도시는 똑같은 사람들로 꽉 차버렸다”[분신 10장].

2.2. 그래서 그는 문학가이기 전에 인간학자이며, 마치 실험실에서 하듯이 인간성의 위대한 실험가가 된 겁니다. 인간을 일단 이상적 상황에 놓은 후에 거기서부터 내면적이지 않은 모든 외형적 조건과 형태들을 하나씩 까발리고 제거한 후에 그에게 남은 모든 사회적 조건과 같이 인간이 믿고 의지할 보루들까지 모조리 붕괴시켜 버립니다. 그의 이런 연구는 아폴론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정반대로 ‘디오니소스적 정념’을 불태우는 차원으로 전개하면서, 인간성의 심연의 바닥에 내려앉습니다. 이런 체험의 태풍 속에 일단 들어간 사람이 드디어 태풍의 중앙에 앉아 태풍의 모든 것을 실감나게 묘사한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가 직접 겪은 간질 증세와 이런 처절한 심리묘사가 모종의 관련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심하게 상처를 입은 것은 그(라스꼴리니코쁘)의 자존심이었고 그는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에 병이 난 것이다”[죄와 벌 에필로그 2장] 그는 이렇게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에 도끼를 휘둘러 노파와 그것을 목격한 순진한 그 동생까지 죽였으나, 도끼를 휘두른 후에도 그렇게 만족시키려고 하던 자존심이 충족되지 않아서 병에 걸린 매우 해괴한 인간심리를 묘사하였습니다. 이러한 괴상한 인간 심연의 모습은 늘 나타나는 주제였습니다.
“나는 한평생을 거짓말만 했어요. 진실을 말할 때조차 말입니다. 나는 단 한 번도 진리를 위해 말한 적이 없고 나 자신을 위해서만 말해 왔어요. 문제는 내가 거짓말을 하면서도 나도 그것을 믿는다는 겁니다. 삶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거짓말을 믿지 않는 것, 그래요, 바로 그겁니다!”[악령 3부 7장]. 

2.3. 그런 인간이 활동하는 공간으로서 그는 도시를 설정합니다. 뽀또르 대제가 전심을 기울여 만든 화려한 영화 세트장과 같은 쌍뜨 빼째르부르끄는 수많은 농노들의 피와 죽은 뼈 위에 건설된 가공품이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버리고 자연을 떠나 뿌리가 뽑힐 때, 도시라는 매우 가공할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도시는 인간의 비극적 운명의 장소가 됩니다. 독특한 분위기의 지하셋방, 기괴한 실내장식, 악취가 나는 상점들이 즐비한 도시는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이 만들어낸 신기루,환상에 불과합니다. 이런 도시의 환상 속에서 인간은 중독, 부친살해, 자살, 광기와 같은 온갖 악과 범죄의 계획을 합리적으로 포장하는 겁니다. 

2.4. 도스또옙스끼는 선과 악과 그것에 대한 깨달음을 철저히 공간화시킵니다. 그런데 이 공간은 이전의 서구의 문학작품들과 비교됩니다.
첫째, 중세의 단테의 [신곡]에서의 공간은 천국과 지옥, 그리고 인간이 사는 공간이 서열적으로 균형을 이룹니다. 
그렇지만 둘째, 17세기 이후의 휴머니즘의 공간은 인간을 긍정하려고 스스로를 자연의 세계에서 완전히 폐쇄해 버렸고, 천국과 지옥도 인간 앞에서 폐쇄해 버렸습니다. 인간은 자신 내부의 마음의 제국 속으로 황제처럼 잠입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셋째, 도스또옙스끼의 공간은 이어서 또 다른 단계로 내려갔습니다. 이 홀로 있는 자신만의 공간이라는 지하세계 속에서, 무시무시한 적그리스도와 지옥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천국도 새롭게 등장합니다. 이것은 외부에 의해서 강요된 가운데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궁극적인 심연과 정면으로 마주할 때에 펼쳐지는 거대한 신세계인 겁니다. 의식이라는 대지의 표면에서 호흡을 크게 하며 자신의 어두운 지하방으로 내려가 그 세계를 탐험한 겁니다. 

[지하생활자의 수기 1864]에서 시작된 지하의 인간은, 못생기고 추악한 인물의 변증법을 변주합니다. 여기서 만난 인간은 극단적이며 비합리적이며, 불가항력적으로 자유와 고뇌의 무궤도를 질주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무한한 자유를 가진 인간이라면, 이 자유는 분명히 고통이며 파멸에 이르기 쉬운 길이지만, 이 고통과 재난은 인간에게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이어서 [대심문관 이야기]에서 인간과 그 운명의 변증법은 절정에 이릅니다.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만남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까라마조쁘가의 형제들]에서 차남 이반 까라마조쁘는 자아의지의 극대화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길을 걷는 결과 받을 징벌을, 마지막으로 조시마와 막내 알료샤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통한 천국의 길로 회복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2.5. 인간 내면의 심연 속의 모든 인간현상의 해결책은 역설적이게도 여전히 인간에게 있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였습니다. 이 자유는 두 가지 정반대 방향으로 쓸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을 신격화하는 길이며, 둘째는 인간이 진정한 하나님을 발견하는데 이 자유를 쓰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둘 중의 하나만 택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아니라면 존재할 수도 존재할 가치도 없기 때문입니다. 신이 되는데 자유를 쓴 인간타락은 오직 인간이 되신 하나님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도스또옙스끼에게서 인간됨의 근본은 자유에 있습니다. 즉 인간 자신을 만든 하나님이라도 배신할 수도 있는, 막강한 우주적 자유에 있습니다(창세기 2장의 선악과). 그래야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유한 자’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태초부터 사탄의 꾀임을 받아서(‘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신이 되려하는 인간’(人-神), 초인이 되려고 이 자유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뒤집어진 슬픈 현실을 해결하는 길은 매우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심’, 즉 성육신(神-人)하신 그리스도에게만 있음을 선포합니다. 작가의 내면이라는 지하 속에서 온갖 흉측한 분열된 인간 존재와 썩은 냄새나는 모습들과 그 지옥에 또아리 틀고 앉은 적그리스도도 보이지만, 동시에 그 추하고 더러운 곳에 인간의 몸으로 하강하신 그리스도가 만드는 천국도 보인 겁니다. 
  
2.6. 인간 심연의 지하공간을 묘사하면서 작가는 르네상스 이후로 발전되어온 서구문화(명)의 휴머니즘의 위기 뿐 아니라 휴머니즘의 진정한 패배와 파멸을 묘사합니다. 이 점에서 도스또옙스끼는 니체와 나란히 대조되어야 합니다. 니체는 도스또옙스끼를 칭찬했으나 방향은 정반대로 가버렸습니다. 즉 니체는 휴머니즘에 의해서 창조된 인간숭배의 최후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모든 존재가 도스또옙스끼의 신이 되려한 인간(人-神), 즉 초인으로 흡수되어서 인간파멸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인간들은 초인(히틀러,스탈린)에 의해 방어되기는커녕 치욕과 무능과 공허에 굴복당하고 오직 초인을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이 초인, 우상이야말로, 인간이 그 앞에 무릎 꿇어야 하며, 인간과 인간의 모든 것을 아귀같이 잡아먹어버립니다. 유럽의 휴머니즘은 니체에서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으며, 니체의 자살은 자신의 말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 되었습니다. 니체가 ‘신을 죽인다’는 것은‘인간을 죽인다’는 말에 다름이 아닙니다. 니체에게는 인간도 신도 없으며 오직 ‘초인’만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니체보다 먼저 도스또옙스끼는 이런 유럽 휴머니즘의 불가피하고 치명적인 결말인 인간 신격화로 나가는 인간 말살을 미리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이 지옥도가 그가 묘사한 마지막이 아닙니다. 그의 변증법의 반대편인 적그리스도를 대적할 그리스도의 빛 아래 선 인간을 소개합니다. 작가는 버림받은 가장 무서운 인간 속에서까지 하나님의 형상을 찾았습니다. 인간을 찾아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사랑은 휴머니스트의 값싸고 인간을 궁극적으로 죽이는 허구적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인간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을 죽임에 내어놓는 하나님의 사랑만이 지하 인간의 살길이며 지하에도 천국이 임할 수 있음을 보였습니다.  
[죄와 벌 1866]에서 라스꼴리니꼬쁘가 노파와 그 동생을 살해한 것은 휴머니즘의 위기와 종말을 보여줍니다. [까라마조쁘가의 형제들 1880]에서 차남 이반과 그의 이차적 자아인 스메르댜르꼬쁘를 설정한 것은 작가의 천재적 배열입니다. 종인 스메르댜르꼬쁘는 주인이 흘린 작은 돈 지폐 석장(30루블)을 그대로 가져오는 정직을 보였으나, 실은 주인 아버지를 죽이고 더 큰 돈(3천루불)을 벌기 위한 일종의 투자금이었습니다.2) 수치스럽고 짐승같은 아버지를 미워하여 종으로 하여금 죽이도록 사주한 이반은 - ‘초인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휴머니즘의 끝판이 보여주는 - 부친살해자가 받을 심리적 고통을 결코 없앨 수 없었습니다. 장남 미챠도 단지 “아버지 같은 인간은 살 자격이 있어?”라고 빈정거렸고, 비록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을지라도 사실상 부친살해에 동참한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경험한 후에는 스스로 살인죄를 짊어지고 법의 부당한 벌을 인계받았습니다.


1) 베르자예프, 도스토에프스키의 세계관, 52.

2) 석영중,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2021, 43.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segensong@gmail.com

 

이 글은<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46>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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