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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또옙스끼, 한국인에게 너무나 어색하지만 꼭 필요한 문학가(2)

2022년 2월호(148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2022. 2. 26.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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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 도스또옙스끼 2]

 

  도스또옙스끼, 
한국인에게 너무나 어색하지만 꼭 필요한 문학가(2) 

 

코로나 시국인 2021년에 한국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대여된 책, 도스또옙스끼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지난 2021년 12월호에 도스또옙스끼에 대한 첫째 글의 제목을 정하고 난 뒤, 모 일간지를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도스또옙스끼의 작품의 특징은 삶이 쉽고 풍요하게 돌아갈 때는 사람들이 잘 읽지 않다가, 삶이 정말 고통스러운 가운데 진실한 차원을 찾을 때에는 읽게 된다는 겁니다. 놀랍게도 코로나19라는 시점에서 죽음의 공포를 많이 느껴서인지 모르지만, 한국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대출된 책이 도스또옙스끼의 [까라마조쁘가의 형제들]이었다는 보고가  왠지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은 이상한 걸까요? 

작가 나이를 따라 정점을 향해 솟구쳐가는 도스또옙스끼의 작품들

도스또옙스끼가 만든 모든 소설들은 하나의 정점을 향해 점진적으로 치고 올라가는 긴 행진곡과 같습니다. 하나의 돌을 놓고, 그 기초 위에 다른 돌들을 쌓아가다가, 궁극적으로는 최정상에 돌을 올려놓는 모습인 겁니다. 즉 인간의 욕망과 죄악, 그 결과로서의 좌절된 삶과 징벌을 점차로 깊어져가는 차원과 더욱 강력해져가는 에너지로 일관되게 표현한 겁니다 : 1) 가난한 사람들(단편 1846), 2) 분신 The Double(단편 1846), 3) 죽은 자의 집(장편 1862), 4) 지하생활자의 수기(장편 1864), 5) 죄와 벌(대작 1866), 6) 도박군(단편 1867), 7) 까라마조쁘가의 형제들(대작 1880) 
작가의 생애 후반부에서 쓴 가장 중요한 ‘두 대작’magnum opus에서는 인간범죄의 궁극적인 형태인 살해를 다루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작품은 아버지살해를 중심으로 인간의 모든 욕망들이 총체적으로 분출됩니다. 첫째 작품인 [죄와 벌]에서는 이웃노파와 그 여동생을 죽이는 점만 다룹니다. 하지만 둘째 작품인 [까라마조쁘가의 형제들]에서는 약간의 근친상간과 함께 ‘아버지살해’, ‘자기 살해’를 핵심으로 다룹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살해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의 근원인 아버지를 살해하는 일에, 세 아들(첫째, 둘째, 그리고 서자)이 모두 직간접으로 가담하는 형태를 띈다는 점에서 [죄와 벌]의 스케일을 훌쩍 넘어섭니다. 그뿐 아니라 한 여자를 가족의 두 남자들이 모두 상관하는 막장드라마를 보입니다. 아버지의 애인을 좋아하는 첫째 아들 드미뜨리, 그 첫째의 약혼녀를 사랑하며 기이한 신경전을 벌이는 배다른 형제이자 둘째 아들인 이반이 만들어나가는 스토리입니다.  
한국에서는 이런 더럽고 타락한 스토리가 너무나 잔혹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끝까지 읽혀지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종교가 세속화되거나, 혹은 러시아와 같이 철저히 정치의 노리개가 된 전세계적 상황에서는, 이런 막장과 같은 사회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종교가 정치의 노예가 된 점에서 러시아 정교회는, 그 근원이 되었던 그리스정교회보다 훨씬 더 심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뾰또르 대제 이후로 러시아 정교회의 자율성을 없애버리고 신성종무원이라는 황제직속/직영종교기구를 만들어 버렸을 때, 즉 종교가 썩어가는 정치/사회에 그 어떤 예언자적 회개를 외치지 못하는 사회에 살았던 사람이 도스또옙스끼였습니다. 
      
도스또옙스끼 문학의 정점이지만 완성되지 않은 책, [까라마조쁘가의 형제들](1880) 

[죄와 벌](1866)에 비해 14년 후에 쓰여졌고 헌신적 아내에게 헌정한, 도스또옙스끼의 마지막 작품 [까라마조쁘가의 형제들](1880)은, 가장 방대하고 가장 복합적이며 가장 깊은 차원으로 인간의 마음과 심리의 변화를 그립니다. 원래 도스또옙스끼는 이것으로 마무리하지 않고 바로 [2부]를 저술하려고 마음먹었지만, 이 책이 출판된 후 1년도 채 안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발전적으로 쌓여가다가 드디어 정점에 도달한 이 작품에서, 그는 드디어 마귀와 대결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소개함으로서, 인간성의 ‘부정적인 것’을 모조리 그리고 철저히 드러낸 셈이었습니다. 이것보다 더 깊은 인간 타락과 고통과 슬픔은 불가능하기에, 2부에서는 단연코 ‘긍정적인 그 무엇’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갔어야 할 겁니다. 그런데 도스또옙스끼가 제시할 ‘긍정적 그 무엇’이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하면, 그가 러시아인으로 또 러시아 정교회의 교인으로 아무 것도 남긴 것이 없다고 판단됩니다. 이 소설 전 권을 통하여 대단히 수동적으로 묘사되어 둘째 형 이반에게 키스로 마무리하는 알료샤, 혹은 이반이 하는 [대심문관 이야기] 속에서 그리스도를 심문하던 심문관의 모든 말을 묵묵히 듣고 있다가 그에게 키스로 마무리하던 그리스도를 넘어선 그 어떤 것을, 도스또옙스끼와 그가 기초한 러시아정교회는 보인 적도 또 보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생애가 [1부]인 이 책으로 마무리한 것은 그에게는 최선인 것 같습니다. 그 이유를 요약해서 말하자면, 도스또옙스끼가 이해하고 전달하려고 했던 그리스도는, 본래적 예수 그리스도의 총체적 삶과 모든 사역중에 극히 일부에 불과한, 예수가 마귀에게 시험받은 장면에 정확하게 국한되었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의 피상적 도스또옙스끼 이해 비판

프로이트는 이 책을 바로 자신이 선호하는 이론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웅변해주는 것으로 여기며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바로 이 이론과 이 소설의 핵심 소재는 동일하게 ‘아버지 살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유물론자 프로이트와 기독교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도스또옙스끼가 정반대편의 대척점에 서 있다는 사실은, 니체가 도스또옙스끼와 대척점에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니체는 초인을 선호한 나머지 스스로를 초인으로 간주하다가 현실이 그렇지 않으니 자신을 죽임을 통해 외부를 부정하려는 시도인 자기 살해를 감행했습니다. 하지만 늘 안달복달하며 절대적으로 성공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강박에 흔히 시달리는 유대인인 프로이트는, 인간의 다양한 욕망 중의 하나인 성욕으로 모든 인간의 문제를 억지로 풀어 자신의 이론을 절대화하려는 억지를 부렸던 인물입니다. 그런 강박증의 하나로 미국에서의 강의 여정 중에 강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바지에 오줌을 쌌을 정도입니다. 도스또옙스끼는 니체와는 달리 신이 되려하는 인간 즉 초인이 되려하여 만인이 자기교를 만들어 스스로를 섬기는 존재가 된 인간(人->神)이 근본 문제임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도스또옙스끼는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낮아져 인간이 되셨다(神->人)는 복음에 돌아갔습니다. 프로이트의 성이론이 가볍기 짝이 없는 것은 그의 후배이자 제자인 빅터 플랭클이 독일군 멸절수용소 속에서 생존의 절실한 상황 속에서는 벌거벗겨진 여자의 육체들에 아무런 성욕을 느끼지 않는 현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도스또옙스끼의 아버지 살해 주제는, 엄마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아버지를 죽이려고 한다는 성욕위주의, 매우 무리한 인간 해석학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도스또옙스끼의 사회윤리적인 ‘아버지 살해’는 더 나아가 정치적으로는 러시아 권위의 원천인 ‘황제 살해’(알렉산드르 2세 암살),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종교적으로는‘피조물 인간의 창조주 하나님 살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네 형제들 : 첫째 드미뜨리, 둘째 이반, 셋째 알료사, 넷째 서자 스메쟈르꼬쁘 

네 형제들은 한 아버지가 성적 욕망을 아무렇게나 발산하여 관계한 세 어머니로부터 난 아들들이었으니, 가족의 기본 설정 자체도 매우 뒤틀려 있습니다. 첫째 부인에서 얻은 아들이 드미뜨리였다면, 둘째 부인에게서는 이반과 알료사, 그리고 비밀리에 딴 여자를 건드려 자녀를 얻었으나 비밀리에 하인으로 부려 버리는 설정 자체가, 종교와 윤리가 붕괴된 여느 사회의 모습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 일어나는 단 하나의 주제인 ‘아버지 살해’에 모두가 관여해가는 가는 모습이 이 기나긴 장편소설의 핵심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 네 아들들은 각각 어떤 인간형을 대변합니다. 즉 신성이 육화된 존재인 막내 알료샤, 정반대로 지성이 육화된 존재인 둘째 이반, 육체적 욕망 덩어리인 첫째 드미뜨리, 그리고 차별받고 버림받은 울분으로 기어이 아버지 살해를 저질러버린 서자 스메쟈르꼬쁘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지만 핵심 주인공은 둘째 아들 이반이었습니다.   
도스또옙스끼의 창작노트에는 둘째 아들 이반을 ‘파시즘과 코뮤니즘을 따라 하나님 없는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무신론자’, ‘서구적 합리주의와 이성주의의 러시아적 발현’으로 정의했습니다. 그 종교적 핵심은 ‘인간의 마음속에 (영혼)불멸에 대한 믿음을 없앤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주장으로 표현됩니다. 즉 이반이 막내인 알료샤를 앞에 놓고 주고받은 반문은 [까라마조쁘가의 형제들] 속에 담긴 이야기인 [대심문관의 이야기]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면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하는가?’하는, 소위 ‘신정론’神正論theodicy 문제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왜 이런 악을 행할 자유를 주어서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느냐?’ 그렇지만 악의 (존재)문제는, 절대적 자유, 즉 인간이 자신을 창조한 창조주의 법칙을 거부하고 자신의 법칙을 세우며, 자신이 창조주가 되는 것까지도 창조주가 허용한 엄청난 자유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반은, 하나님이 이런 자유를 주지 않고, 선한 것만 (본능적으로) 행하는 존재로 인간을 만들었다면, 악이 세상에 있을 리가 없으며 세상이 불행해질 리가 없다는 주장을 한 겁니다. 그래서 자신은 ‘무신론자라기보다 신이 창조한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결국 알료사가 그것을 ‘(신에 대한) 반역’이라고 외쳤고, 무신론자인 이반의 궁극적 목표는 ‘신이 없는 유토피아의 건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악의 존재와 신의 전지전능에 대한 질문은 더 근본적으로 종교의 핵심질문인 ‘신이 과연 존재하기나 하나’에 해당합니다.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1) 불멸에 대한 믿음도 없고, 2) 도덕률의 존재근거도 없으며, 3) 따라서 모든 것이, 심지어 식인마저 허용된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논리 전개는 현재 우리의 직관에 너무나 어긋난다는 것을 즉각 압니다.  
그렇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이반은 죄를 짓는 인간 내면의 불안을 그대로 자각하고 드러내는, ‘정직한 사람, 위대한 죄인’입니다. 이에 비해서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는 척하며 자신만의 골방에 들어앉아 스스로의 양심을 편안하게 만들고, 밖에 나와서는 깔끔한 복장과 말끔한 얼굴 표정으로 만남들을 이어나갑니다. 속으로는 자기 성을 쌓고 그 안에서 자기만의 통치법을 만들다가, 어느 순간엔 자기통제가 되지 않아 자신과 바깥의 경계가 허물러지고 외부인을 살인적으로 공격하는 일상인들보다, 이반은 훨씬 ‘정직한 사람’인 셈입니다. 이반이 자신의 분신처럼 여겼고 실제 살인을 감행한 스메쟈르꼬쁘는, 아버지가 죽고 난 뒤에 찾아오는 불안에 대해 솔직하게 떨고 있는 이반을 비웃습니다. “그 때만해도 도련님은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늘 자기 입으로 말하더니, 이제 와서는 왜 그렇게 불안에 떨고 있는 거지요?” 물론 이반이 ‘사회적 법정’에서는 부친살해를 했다고 정죄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의 법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취지의 말을 한 겁니다. ‘형인 드미트리와 아버지를 각각 독사로 비유하고, 한 마리의 독사가 다른 한 마리를 잡아먹는 길 밖에 없다.’ 즉 아버지 살해를 ‘예감’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기대’까지 했던 겁니다. 바로 이런 (악한) 기대에 스메쟈르꼬쁘가 슬쩍 개입해서 일을 해치웠을 때에, 이반은 적극적으로 막아서기는커녕, 오히려 스스로를 합법적으로 만들기 위해 무책임하게 집을 떠나 모스끄바로 가버렸습니다. 
이렇게 아버지 살해, 황제 살해, 하나님 살해도 감행하는 ‘마귀적 법칙’을 세우는 ‘마귀적 자유’를 누렸지만, 그 반대편에 제어할 수 없는 ‘양심의 자유’가 불쑥 솟아나는 ‘정직한 이반’의 내면이 소개됩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사건을 파헤치려 애써봅니다.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또 다시 ‘거짓된 이반’이 등장하여, 첫째인 드미트리가 범인일거라는 확신을 가슴 속에 구겨넣습니다. 하지만 다시 ‘정직한 이반’이 몽롱한 자책감을 느끼고 등장하여, 스메쟈르꼬쁘를 몇 번씩 방문하는 가운데, 결국 사건의 전모를 알아냅니다. 그래서 양심의 자유를 되찾고, 밤늦은 시간에 판사를 찾아가서 증거물을 내어놓고, 스메쟈르꼬쁘와 자신을 동시에 고발하려고 서두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곧 그 고발을 내일로 미룹니다. 이 때에 ‘정직한 이반’과 ‘거짓된 이반’이 동시에 등장하여, 왠지 스메쟈르꼬프가 자살할 것 같은 ‘예감’도 들지만, 그것을 ‘기대’하는 분리된 내면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둘째 아들 이반은, 도스또옙스끼가 그 동안 이전의 소설에서 묘사했던, 복잡하고 뒤틀어진 심리의 주인공들인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지하생활자’,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쁘’, [악령]의 ‘끼릴로쁘’와 ‘스따브로긴’, [미성년]의 ‘베르실로쁘’가 이제 최정점으로 발전된 심리상태를 대변한 겁니다. [까라마조쁘가의 형제들]에서 이반은 실제적으로 ‘남우주연상’을 받을 인물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수동적으로 행동하는 그리스도를 닮은, 막내 알료샤는 구원의 근원이기는 하지만, 활동상에 있어서는 ‘남우조연상’을 받을 존재로 소설에서는 부각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선善goodness의 수동성/비적극성은, 역설적으로 인간에게 광대한 행동과 양심의 자유를 주며 동시에 해방을 주는 해결책입니다. 또 알료샤는 살아있을 때 성인이라고 여겨졌던 자기 스승 조시마 장로의 시체에서 향내가 나야 한다는 기적이라는 미신에 속박되지 않고 조시마 장로의 살아있을 때의 행동의 위업과 하나님의 전능을 계속적으로 믿을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알료샤가 꾸는 가나 혼인 잔치(요한복음 2:1-11)에 대한 꿈은, 이반이 겪는 살떨리는 악몽과 완전한 대비를 이룹니다. 즉 ‘알료사의 영성’은 ‘이반의 이성’과 철저하게 대비됩니다. 결국 도스또옙스끼는 재빨리 그리스도로 달려가는 간단한 해결책을 구하는 편리한 신학자의 길이 아니라, 죄악으로 고통하는 인간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문학가의 길을 택한 겁니다. 
즉흥적이며 다혈질적인 첫째 아들 드미뜨리는, 죽은 어머니가 남긴 유산을 노리며 집을 방문했으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만 횡설수설 지껄이는 존재입니다. 길고 고된 심문 후에, 굶주린 ‘아기’꿈을 꾸자 갑자기 지독한 연민을 느껴서, 자신이 십자가를 지며 아버지를 없애려는 악한 생각을 했다는 것을 근거로 죗값을 스스로 치르겠다는 착한 마음을 품습니다. 그렇지만 알료샤가 ‘형은 준비가 되지 않았고, 그런 십자가는 형의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듣자, 태도를 곧 바꾸어서 짓지도 않은 죗값을 감당하는 것이 이제는 오히려 두려워져서 미국으로 내빼고 맙니다. 욕망과 죄책감으로 이리저리 흔들거리는 또 한명의 인간을 소개한 겁니다.     
도스또옙스끼는 넷째이며 서자 스메쟈르꼬쁘를 ‘악취나는 하인’이며 ‘부엌데기 요리사’로 표현하면서, 그람스코이의 그림 ‘관찰자/바라보는 자’에 비유합니다. 그는 결코 바보는 아니었고, 오히려 어떤 뚜렷한 목적도 없이 수시로 무언가를 관찰하고 그 인상들을 쌓아가는 존재로, 뚫어지게 대상화시켜서 ‘관찰하는 자’마귀의 전형적 특징을 따릅니다. 그는 자신을 낳아 놓고도 아들로서 취급해주지 않을 뿐 아니라 하인으로 부려먹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이 극에 달했습니다. 그의 이런 감정을 이용해서, 이반은 ‘한 마리의 독사가 다른 독사를 잡아먹으라지’라고 하면서 아버지 살해를 은근히 부추긴 겁니다. 그는 지적 악마인 이반과 점점 하나가 되어가서, 결국 ‘아버지 살해’와 그런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 세상을 통째로 부인하는 ‘자기 살해/자살’이라는, 이중살해를 감행합니다. 서유럽의 낭만주의에 중독되어 철저히 의존한 악마화 된 이반과는 정반대로, 순전히 러시아적 악을 대변하여 러시아적 행동력과 파괴력이 얼마나 섬뜩한 지를 보여줍니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까라마조쁘가의 형제들] 속의 작은 책 [대심문관 이야기]

추리소설 기법에 익숙한 도스또옙스끼는 거대한 소설 [까라마조쁘가의 형제들] 속에 작은 스토리인 [대심문관 이야기]를 담아 형태를 만들어내었습니다. 이것은 둘째 아들 이반이 하는 말 속에 담겨있는 이야기로, 대심문관은 이반의 시적인 대리인인 셈입니다. 로마교의 부패가 극성이던 16세기 스페인을 이야기의 역사적 상황으로 설정한 가운데, 재림한 그리스도와 종교재판을 주관하는 대심문관 사이의 대화가 바로 [대심문관 이야기]입니다. 대심문관은 온갖 자기를 부인하는 수련을 했으나, ‘죽음 뒤에는 어두움 밖에 없다’라고 자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모든 기대를 버리고 오직 현실에서 모든 욕망을 만족시키는 삶을 살기로 작정하여, 악마와 결탁하며 교회를 자기 뜻대로 지배하려 했던 인물입니다. 요한계시록(20:10)에서는 ‘정상 삼위일체’인 성부-성자-성령을 마귀가 뒤집어 ‘모방 삼위일체’imitation trinity인 마귀-짐승-거짓예언자가 말세에 나타날 것을 말하는데, 대심문관은 ‘거짓예언자’정도로 저자는 설정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 갑자기 그리스도가 재림하였고, 대심문관은 그를 잡아 감옥에 가두고 그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대화’라고 했지만, 사실 그리스도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오직 대심문관만 이야기하는 형국입니다. 이것은 둘째 아들 이반이 수동적인 알료사 앞에서 폭포수와 같은 말을 쏟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또 이반과의 대화를 끝내고 키스하고 떠나는 알료사와, 대심문관에게 말없이 키스하고 대화를 끝내는 그리스도는 매우 닮았습니다. 또 이 키스는 매우 역설적으로 그리스도를 배신한 가롯 유다가 그를 팔려고 신호를 주기 위해서 키스를 한 것을 연상시킵니다. 예수는 그를 향하여,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나(사람의 아들)를 파느냐”(누가복음 22:48) 라고 하면서, 그의 배신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 그가 돌이키기를 최후로 요청한 셈입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를 향해서 키스를 했지만, [까라마조쁘가의 형제들]과 [대심문관 이야기]에서는 정반대로, 그리스도가 대심문관에게, 알료사가 이반에게 키스합니다. 예수의 얼굴과 맞닿은 가롯 유다의 입술이 불타듯 했을 것처럼, 그리스도의 키스를 받은 대심문관과 알료사의 키스를 받은 ‘이반의 마음에도 불이 타는 듯했지만, 모른 척하고 여전히 자신의 생각을 고수’합니다. 도스또옙스끼의 그리스도는 철저히 침묵하는데, 유일한 행동이 키스인 셈입니다. 키스라는 행동을 통해서 말하는 셈입니다. 그리스도가 가롯 유다를 향하여 불같은 질문으로 마지막까지 회개를 요청했듯이, 도스또옙스끼의 그리스도는 단 하나의 사랑의 행위인 키스로 엄청난 헛된 이론을 지껄이는 대심문관과 이반을 압도해 버립니다. 사실 그런 헛된 말에 대응하는 것 자체가 그 헛된 논리와 말에 끌려들어가는 꼴이 될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단연 ‘침묵’이 ‘수다’를 이겨버린 겁니다.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segens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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